드라마

추노에 비친 현대판 노비

부드러운힘 Kim hern SiK (Heon Sik) 2010. 1. 14. 08:50

과거에는 시골에서 상경한 젊은 여성이 담당했던 가정부가 텔레비전 드라마에 많이 등장했다. 젊은 여성에서 나이든 여성으로 이동했다가 한동안 사라졌던 그 가정부가 다시 텔레비전에 등장하고 있다. 남의 집 일을 도맡는 예전의 가정부는 생활고와 쉽게 연상되었다.

2004년, 드라마 < 불새 > 에서는 가정부가 헬퍼(helper)라는 이름으로 전문화되어 등장하기도 했다. 이 드라마에서 젊은 20대의 여성 주인공의 삶은 생활고와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다시 돌아온 가정부에서 고상한 이름은 이제 찾을 수 없다. 그들의 삶은 다시 팍팍하다.

드라마 < 별을 따다줘 > 의 남부러울 것 없던 진빨강(최정원)은 어느 날 갑자기 하층민으로 전락하고 가정부로 일하면서 동생들을 먹여 살려야 한다. 시트콤 < 지붕 뚫고 하이킥 > 의 신세경의 아버지는 많은 부채를 남기고 산 속에 숨어살다가, 견디지 못하고 외양어선을 타야 했고, 신세경은 동생과 함께 남의 집 가정부로 일한다.

한동안 미디어에서 가정부는 잘 보이지 않았고, 그 가정부의 역할은 옌벤 아줌마가 대신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미디어의 가정부는 다시 한국인들이 맡고 있다. 더구나 가정부는 나이든 아줌마가 아니라 젊은 20대의 여성들이라는 것이다. 가정부를 노비와 견줄 수는 없지만, 어려워진 삶과 빈부의 격차가 사회적 징후로 나타나고 있는 것을 반영하고 있는지 모른다.

드라마 < 추노 > 에 대한 폭발적인 관심은 시대적 징후라는 말이 있다. 노비이야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비이야기 자체는 눈길을 끌만한 소재가 되지 못하므로 차별성이 없다. 엄밀하게 말하면 드라마 < 추노 > 는 그동안 다루어지지 않은 추노꾼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도망간 노비를 잡아주고 돈을 챙기는 전문 노비사냥꾼인 셈이다.

일단 추노꾼을 통해 보이는 사회적 신분적 모순은 분명 존재한다. 그것은 과거의 이야기만으로 한정된다면 감정이입은 덜 할 것이다. 어쨌든 사극에는 현대인이 사유와 고민이 투영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애써 꺼내든다면, 양극화와 비정규직, 실업의 범람이라는 사회적 현상을 볼 때 일단 전국민의 삶이 노비화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감이 드라마 < 추노 > 에 반영되어 있다는 것이다.

드라마 < 추노 > 는 병자호란 이후 노비의 숫자가 인구의 절반에 육박한다는 역사적 문제의식에 바탕을 두고 있다. 매우 비극적인 상황이 아닐 수 없으며, 이에 대한 대중적 공감대가 형성될 수밖에 없다. 노비는 약자를 상징하고, 대중과 시민 그리고 국민은 강자라기보다는 약자이기 때문에 감정이입과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인구의 절반이 노비라는 가정은 사실적 근거로 사용되지만 과장된 감이 없지 않아 있다. 3분의 1이라고 보는 견해도 존재하며, 서울과 지방의 기준은 다르고 서울로 몰려든 인구가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노비로 뛰어들며 임금을 받으려는 행위가 늘어난 결과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무엇보다 노비의 양태도 드라마와 다르다.

노비에는 사노비와 외거노비가 있다. 외거노비가 대부분을 차지했다. 사노비는 솔거노비, 가내노비라고 일컬어졌는데 최악의 생활을 하고 있었다. 드라마 < 추노 > 에서는 대부분 가내노비를 보여주고 있다. 가내노비의 비극적 상황 때문이겠다. 더구나 개인의 노비를 잡는데 추노꾼이 나서는 상황을 그리고 있으니 당연하겠다.

하지만 자칫 조선시대의 노비가 드라마 < 추노 > 의 모습과 같을 것이라는 잘못된 생각을 가질 수도 있다. 한편으로 조선 후기가 될수록 노비의 인구는 많아졌지만, 생산력과 상업의 발달로 신분에 관계없이 부를 축적하는 인구도 늘어난다.

드라마 < 추노 > 에서 투영되는 또 다른 감정이입의 축은 '악역을 맡은 자'의 눈물이다. 노비를 잡아들이며 자신의 호구지책을 유지하는 추노꾼이 그렇게 행복한 삶을 영위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대길(장혁)은 추노꾼을 통한 자신의 삶과 김혜원(이다혜)을 향한 사랑을 위해 충실할 뿐이다. 그렇다고 비정하게 자신의 이익만을 취하는 인물은 아니다.

어차피 추노꾼이야 존재해야 하는 것이고, 그것을 되도록 선하게 수행하는 태도를 지닌다. 어쩌면 현대인들은 이대길과 같은 삶을 살고 있는지 모른다. 먹고 살기 위해 조직과 시스템상 차마 못할 일도 하지만 그 안에서 되도록 인간답게 살고자 한다. 하지만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 일이 많을 때 추노꾼과 비슷하다.

드라마 < 추노 > 에는 이상적인 인물도 등장한다. 송태하(오지호)와 같이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지는 않고 사회적 명분에 충실한 인물도 존재한다. 그는 선한 역할을 수행한다. 물론 쉽지 않은 길이다. 그를 어렵게 하는 것은 권력이다.

선과 악은 쉽게 현실에서 상대적이 된다. 그것을 쉽게 상대화 시키는 것은 돈과 권력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절망하지는 않는다. 이대길이 비록 돈에 무릎을 꿇지만 그 안에서 인간미를 찾으려 한다면, 송태하도 결국 권력의 안에서 내부 투쟁을 하는 아바타지만 휴머니즘을 실현하려 한다.

하지만 개인적 휴머니즘의 한계도 떠올려야 하겠다. 무엇보다 이대길의 가정을 파괴하고 추노꾼으로 몰고, 송태하를 노비의 신분으로 전락시킨 것은 결국 사회구조와 그 모순이었다. 따라서 과거를 통해 현재를 진단하고 미래를 성찰한다고 할 때, 결국 주목을 해야 하는 것은 노비나 추노꾼이 아니라 빈부격차와 불안한 신분 지위의 증가를 양산하는 한국 사회의 모순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