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리뷰

중국인문기행이 우리 현대인들에게 필요한 이유

부드러운힘 Kim hern SiK (Heon Sik) 2015. 6. 24. 20:23

중국인문기행이 우리 현대인들에게 필요한 이유

-송재소의 ‘시와 술과 차가 있는 중국 인문 기행’


김헌식





우리가 어떤 지역을 여행의 대상지로 삼는 것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곳에 없는 무엇인가를 찾기 위해서다. 만약 우리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곳이라면 여행의 대상지로 삼지 않을 것이다. 낯선 것은 새로운 삶의 자극을 준다. 우리의 삶과 다른 어떤 활력이나 깨달음을 다른곳보다 더 많이 줄 듯 싶은 공간은 있어 보인다. 그것은 우리 삶과 완전히 분리돠는 것이 아니라 연계되어 있을 때 더 강화된다. 그러한 연계를 우리는 공감이라고 한다. 중국을 여행할 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는 찾게 되는 무엇인가는 어떤 것일지 생각해 볼 수 있고 공감의 공유를 기대한다.


최근에는 중국은 거대한 경제 시장의 대상지로 생각한다. 그렇기에 돈을 벌기 위한 곳쯤으로 생각하고 접근하는 경향이 있다. 중국이 경제적 대국으로 떠오르기는 했지만, 유럽이나 미국에 비해서 문화적인 선진국으로 여기지 않는 경향이 있다. 때문에 중국의 현재 보다는 과거의 유적을 보거나 자연환경 때문에 관광 목적지로 선정하는 경우가 많다. 과거 역사 유적이나 자연환경에서 느끼는 것은 거대함이라는 스케일에 있을 것이다. 바로 한국보다는 땅넓이나 인구, 그리고 자연의 지형이나 건물과 성곽 등의 규모에 놀라고 만다. 그러나 이러한 장대함이나 광활함이라는 스케일은 잠시 시각적인 즐거움만 줄 뿐 정신이나 지적인 만족감을 주기에는 한계가 많다. 더구나 바쁘게 살아가는 한국의 현대인들이 중국을 방문해야할 이유가 없다면, 매력적인 공간으로 다가오지 못할 것이다. 우리 일상과 거리가 먼 공간, 그냥 큰 나라일 뿐이겠다.


‘시와 술과 차가 있는 중국인문기행’은 왜 우리가 중국에 방문해야하는 지, 그 여행동기에 대한 현대적인 연계적 공유감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해준다. 이 책은 일단 한문학을 전공하거나 기본소양을 갖고 있는 이들에게는 매우 유용한 책이 될 수 있다. 책이나 작품으로만 대하던 이백, 두보, 소식 등이 머물거나 활동했던 곳을 직접 방문한다는 것은 오랜 소망을 실현하는 듯이 가슴이 설레도 때로는 벅찰 수 있을 것이다. 유명한 문인들이 실제 존재했던 공간을 직접 거닐 수 있기 때문에 상상했던 광경이 실제 눈앞에 펼쳐지는 것은 매우 지극한 즐거움을 줄만할 것이다. 백제성에 올라 이백의 ‘조발백제성’을, ‘악양루’에 올라서는 두보의 ‘등악양루’를 석종산에서는 소식의 ‘석종산기’를 음미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 책이 관련 전공자나 소양있는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중국이라는 공간자체가 그러하기 때문이겠다.


이 책을 통해서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은 자연환경으로 대변되는 공간은 인간과 분리될 수 없으며, 오로지 자연으로만 존재할 때는 그것이 갖고 있는 의미와 깨달음이 배가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인간과 결합하여 그들의 사유와 활동의 흔적이나 유산을 대할 때 오히려 그 자연환경이 더욱 각별한 의미가 되어 다가오기 마련이다. 더구나 이 책에는 일반인들이 쉽게 갈수 없는 특별한 공간들을 방문하고 문학과 역사 그리고 사유를 결합시켜내고 있다. 강서성 구강, 남창, 경덕진 그리고 안휘성의 황산에서 강소성 남경에 이르는 곳을 두루두루 그리고 세밀하게 살핀다. 앞에서 언급한 ‘특별’하다는 것은 고급이라는 의미와는 좀 다른 의미라고 하겠다. 인문적인 지식이나 소양이 있는 사람들만이 골라서 탐방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인문은 문학과 역사에 대한 기본적인 관심과 그것에서 사유하는 것을 말한다. 공간은 역사를 품고 있고, 그 역사를 꾸린 것은 인간이기 때문에 공간에서 읽어내고 사유하는 힘은 단지 과거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열어가는데 중요한 일깨움을 주기 마련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수많은 위인이나 인사들은 모두 과거 속에 존재하는 인물들이 아니라 오늘날 현대를 살아가는 개개인들이라는 점에 눈길을 줄 필요가 있다. 그들은 권력과 금력을 치달아가는 질풍노도와 혼돈의 세월 속에서 문화적이고 인문적인 이상사회를 꿈꾸었던 이들이었다. 그리고 상처받고 고통받은 자신의 심신을 여러 공간에 머물면서 치유를 했다. 그리고 여전히 자신의 꿈을 유지하고 그것을 실현하려고 했다. 현실과 이상의 좌절사이에 놓여있는 것은 그들이나 지금의 현대인들이마 매한가지다.

세계적인 현상일뿐만 아니라 한국인들이 여행에 관심을 갖게된 것은 그만큼 심신이 피폐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무한 경쟁 시대에서 심신이 상처로 얼룩져 있기 때문에 이를 치유하려고 여행을 떠나고 있다. 이제 여행은 단지 즐거움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힐링을 위한 중요한 매개 수단이 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 공간에서 삶의 희망과 꿈을 염원해본다.


이 책의 저자가 방문한 많은 곳들은 바로 이와 밀접하다. 수많은 문인들이 방문하고 그자리에 남긴 것은 바로 현실의 쓰라린 상처 속에서  이상과 꿈을 소망한 것들이었다. ‘여산 진면목’이라는 유명한 어구를 낳은 소동파의 시 ‘제서림벽’은 소식이 왕안석과 벌인 정치 투쟁에서 패배하고 44세에 황주로 좌천되어 6년간 사실상 귀향살이를 마치고 돌아가는 와중에 여산에 10일간 들렀다고 쓴 시이다. ‘석종산기’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소동파가 1084년 여주단련부사에 임명되어 황주를 떠나 임지로 가는 중에 덕흥위에 부임하는 큰 아들과 들렀다가 쓴 시이다. 소동파는 항주 통판으로 밀려났고, 이때 오잠 지역에 자주갔고 그 와중에 시를 남겼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오잠승려의 녹균현’이다. 이 시는 세속적인 욕망을 멀리했던 혜각 스님의 인품을 높이 노래한 작품이다. 좌천 당한 소동파의 처지에서 세속적 욕망을 위해 경쟁하는 것의 허무함을 담은 것이다. 


이백은 756년 안록산의 난을 피해 부인 종씨와 함께 병풍첩에 초당을 짓고 은거하기도 했다. 그는 이때 죽을 때까지 여산에 살 결심을 하기도 한다. 그는 잠시 영왕의 사람으로 일하다가 760년 죽기 2년 전에 다시 여산에 돌아온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여산은 그 자체의 아름다움만으로도 천하의 명산으로 불리기에 손섹이 없지만, 만약 이백과 백거이의 자취가 없었다면 여산이 오늘날 명성을지닐 수 있었을까. 여산의 풍광이 이백과 백거이로 하여금 아름 다운 시를 쓰게 했지만 이백과 백거이로 인하여 여산이 더욱 아름다운 산이 되었을 것이다.”이러한 점은 자연이 그대로 존재하는 것을 넘어 사람이그것이 의미부여를 해줄때 더욱 가치를 갖게 되는 것이라는 점을 말해준다.


도연명이 29세에 작은 벼슬에 나가 41세 때 팽택의 현령으로 임명되었으나 80일만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면서 쓴 시가 바로 ‘귀거래사’이며, 성자현에  은거하면서 ‘귀원전거’를 짓는다. 그는 “오랫동안 새장안에 갇혀 있다가/ 이제 다시 자연으로 돌아왔다네”라는 표현을 이 작품에서 하게 되는데, 이는 도연명이 아니라 바쁘게 조직 속에서 사는 현대인들에게도 공감할 만 내용이다. 역시 ‘귀거래사’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구름은 무심히 봉우리에서 나오고 새는 나는데 지쳐서 돌아올줄 모르는구나”도 마찬가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도연명이 ‘의만가사’라는 작품에서 ‘다만 한스러운 것은 살아있을 때 술 실컷 마시지 못한 것이라네’라는대목에서 밝혔듯이 술을 매우 좋아한 것은 세속의 근심을 잊고 자연과 합일하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한 것이다. 이 책에서 술을 매우 강조하고, 중국의 술을 상세한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가 있을 것이다. 자연 속에서 술을 매개로 자연과 접신한 것이다. 술은 인간을 솔직하게 본성에 맞게 풀어주는 촉진제이자, 커넥터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또한 중국의 차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전하고 있다. 차야말로 자연의 맛을 통해 인간의 심신을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기호품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과 합일이라는 점에서 역시 좋은 역할을 한다.    


또한 저자는 백거이가 머물면서 자신의 소망과 꿈을 담아낸 작품의 현장을 잘 살펴주고 있다. 강서성 구강에는 비파정이 있는데 이는 당나라 시인 백거이의 ‘비파행’을 기념한 정자이다. 비파행은 815년 이해하기 힘든 죄명으로 강주사마로 좌천되어 거의 유배생활에 가까운 생활을 보낸다. 가을 밤 손님을 전송하기 위해 나왔다가 비파를 타는 여인의 사연을 알게 되고 그 처지가 자신과 비슷하다고 생각해 그 자리에서 지은 시가 바로 ‘장한가’와 함께 백거이의 대표작이자 증국문학의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비파행’이다. 문학작품을 아는 이들에게 그 창작의 현장을 방문하는 것은 대단한 감흥을 전한다. 기구한 여인의 삶을 담은 비파행은 ‘처량하고 처량하여 앞의 소리 같지 않아 사람들 거듭 듣고 얼굴 가리고 흐느끼네 그중에 흘린 눈물 누가 가장 많은가 강주사마 푸른 적삼 흠뻑 젖었다.’라고 끝을 맺는다. 이런 대목은 백거이가 여인에게 감정이입을 했듯이 그곳을 방문하는 이들도 충분히 자신의 감정을 투영할수 있을만 하다. 


이상과 꿈을 품은 문인은 아무것도 아닐 수 있는 자연에 사람들 사이에 의미를 부여해주는 존재이기도 하다. 또한 그러한 공간은 후세 사람들에게 현실을 넘어서서 이상적인 삶과 사회에 대한 염원을 다지게 만드는 성지와 같은 공간이 되기도 한다. 장안의 벼슬 생활을 청산하고 10여년간 방랑을 하던 이백이 53세의 나이에 경정산에 들러 현실에 대한 환멸과 인간에 대한 실망을 담아낸 시가 바로 ‘독좌경정산’이다. 저자는 유정한 인간이 사는 세상은 무정한데 원래 무정한 산은 도리어 유정하다고 생각한 이백은 산이 그이고, 그가 산이기 때문에 ‘오직 저 경정산이 있을뿐’이라고 이백이 노래했음을 밝히고 있다. 또한 이는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불합리한 현실에 대한 마음을 담고, 경정산 처럼 의연하고 변치않은 마음과 태도 남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으로 풀이하고 있다. 실제로 이백은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겠다는 꿈을 버리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때문인지 경정산은 천하의 명산이 되었고, 경정산을 읊은 시가 1.000여편에 이른다. 그렇기 때문에 경정산 입구에는 백거이, 두목, 한유, 유우석, 매요신, 탕현조의 부조상과 오르는 길에 수많은 시비가 있는 것이다.  


한편, 유명한 문인이나 인사라해도 혼자 스스로 이름을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앞선 사람의 흔적이 어린 공간은 문학적 영감을 더욱 촉진하기도 한다. 이백의 묘가 청산에 있는데 이곳은 본래 남조의 뛰어난 시인 사조와 인연이 깊은 곳이다. 명문 귀족 출신이지만 정치적으로 모함을 선성의 태수로 좌천되었다. 그곳에서 별장을 짓고 평생을 보냈는데 이백은 그를 매우 존경했다고 한다. 이백은 사조를 그리워하는 시를 50여편 남겼다고 한다. 이처럼 어떤 공간은 자연만이 아니라 그 공간에 머물렀던 사람을 흠모하게 만들고, 그를 생각해서 또한 작품을 남기는 공간이기도 하다. 그것이 인문정신의 지속적인 공간적 계승이라고 볼 수가 있을 것이다. 다녀간 곳이 아니라 그곳에 영원히 잠든 곳은 더욱 더 많은 공간적인 의미를 갖게 된다. 이백은 부협질이라는 질병으로 당도현 남쪽 10여리 용산에서 마지막 작품 ‘임종가’를 남기고 생을 마감했고, 청산 남쪽 기슭에 묻혔다. 이백 묘원에는 태백비림이 있는데 이 안에는 유명문인과 인사 108명의 글과 글씨가 있다. 이안에 있는 ‘거배요월’이라는 이름의 이백 석상이 있는데 이말은 환관 고역사와 양귀비의 모함을 받아 쫓겨 나 유랑을 할 때지은 ‘월하독작’에 나오는 말이다. 이 시를 통해 이백은 인간세상의 이해 관계를 떠난 순수한 교유를 꿈꾸고 있고 인간 세상에서는 “정없는 교유”나마 영원히 유지할 수 없기 때문에 아득한 은하수에서 기약하려는 것이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그것은 어쩌면 이백의 철학이라고 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런 공간 스토리텔링에 현실 좌절적인 이야기만 있는 것은 아니다. 채석기에 가면 이백 기념관이 있는데, 이곳의 태백루에는 이백이 당대의 부정부패 권력을 상징했던 고역사와 양국충을 혼내주는 이백의 기개를 담은 스토리도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백과 같은 이상주이자들의 행동이 현실에서 발현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지금도 지속되었으면 싶은 마음 때문일 것이다. 심지어는 그가 신선이 되었기를 바라기도 한다.


인근의 취라산 연벽대는 널따란 바위로 이백이 술을 마시다가 강물에 비친 달을 잡으려다가 빠진 곳이다. 송나라 시인 매요신은 ‘채석월증곽공보’라는 작품 속에서 빠진 이맥을 고래가 등에 태우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이야기를 담았다. 이백이 원래 신선이었으니, 신선이 되어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백기경승천도’이다. 천재적인 시인 이백의 죽음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하는 후대사람들의 마음이 담겨 있는 것이다.   


이외에도 처주의 낭야산 취옹정(중국 4대 명정)에는 당송 팔대가 가운데 한 명인 구양순이 머물렀다. 1045년 조정의 간신들에 참소를 당해 벽지인 저주의 태수로 좌천된 그는 낭야산 취옹정에 승려 지선의 초청으로 들러 ‘취옹정기’라는 작품을 남긴다. 저자는 이 작품은 구양순 작품 중 가장 뛰어난 산문이며, 중국 산문의 백미라고 평가한다. 전초현의 오경재 기념관에는 당대 최고의 풍자소설가였던 오경재의 흔적을 만날수 있다. 경제적인 이문에는 밝지 못해 재산을 없애고 사람들의 비난 속에 살았던 그는 40세에 ‘유림외사’라는 소설을 10년 만에 완성한다. 당대의 사회적 모순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고발한 풍자문학의 맥미를 쓴 것이다.  

물론 인문정신은 비단 문학이나 문인에게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역사 속에서 영웅호걸들의 이야기를 많이 접할 수 있고 중국이라는 공간도 마찬가지다. 예로부터 중요한 지역일수록 많은 인물들이 역사의 격변기에 등장했다. 이러한 대표적인 공간은 남경이라고 할 수있다. 남경은 금릉이라고 예로부터 불렸고, 이백, 두목, 유우석 등이 활동하는가 하면 명나라 주원장, 태평천국운동의 홍수전, 중화민국을 세운 손문 등과도 밀접한 공간이다. 또한 일본제국주의 침략 등 열강의 각축장이기도 했다. 이러한 면모는 중국의 많은 지역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사실들은 비단 중국만이 아니라 우리와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점들이기도 하다. 


중국에는 수많은 문인들이 존재하고 역사적 인물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있었던 곳은 역사서나 작품이 아니라 실제 공간이었다. 그 공간을 실제로 찾아보는 것은 당대의 삶과 사유를 좀더 피부 깊숙히 느낄 수 있게 만든다. 그러한 공간을 찾아가는 것은 단지 지적 허영심을 충족 시키거나 전공지식에 대한 확인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남들에게 과시하려는 것이 아님은 더욱 더 그렇다. 많은 이들이 다녀가고 사유하고 그리고 흔적으로 때로는 작품으로 남긴 공간은 바로 지금의 현대인들에게도 똑같이 해당될 수 있기 때문에 인문기행의 의미가 각별해질 수있다는 점을 이책은 담아내고 있는 셈이다. 우리는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여전히 고민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세계사적인 상황은 더욱 그것을 격화시킬 가능성이 많아지고 있는 듯 싶으니 인문기행의 필요성은 더욱 증가하겠다. 

글/김헌식 교보문고 북멘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