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리뷰

측정이 만들어낸 현대 사회의 풍경은 유토피아인가

부드러운힘 Kim hern SiK (Heon Sik) 2015. 3. 15. 11:56

-로버트 크리스의 <측정의 역사>를 읽고

 

한 텔레비전 방송 프로그램에서 여성 출연자가 180cm이하는 ‘루저’라고 발언해 파문을 일으킨 적이 있다. 만약 cm 라는 측정단위가 없었다면 이런 루저 발언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영국의 공장에서는 흔히 모기 좆(gnat's ass)과 모기 좆털(cock hair)이라는 단위를 쓰는데, “그 바늘을 왼쪽으로 모기 좆털 만큼 움직여!”라고 하는 것이다. 만약 이런 단위를 쓴다면 사람의 키는 모두 이 단위보다 매우 크므로 루저는 없을 것이다. 물론 이런 우스꽝스러운 단위는 측정행위가 얼마나 자의적으로 이루어지는가를 조롱하고 풍자하고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예컨대, 우리가 흔히 절대적인 측정 단위로 알고 있는 킬로그램에 대해 학자들이 계속 다시 규정하려는 움직임이 오래전부터 있었다. 그 이유는 킬로그램이라는 단위가 불안정하기 때문이다. 불안정하다는 말은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측정을 하는 이유는 세상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전제해서다. 이런 전제는 서구 사상에 뿌리가 깊다. 플라톤은 『국가』에서 인간 정신의 가장 훌륭한 부분은 측정과 계산을 신뢰하는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측정이 정확하다고 여길수록 측정의 오류는 커질 수 있다. 마르틴 하이데거는 측정이 성공적이라는 이유 때문에 세상을 유일한 방법이 측정이라고 여기는 우를 범할 수 있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측정은 결국 받아들이는 사람의 태도에 좌우된다. 측정은 객관적이기도 하지만 주관적이다. 인류역사에서 측정은 세상을 이해하는 것에서 이제 우리 자신을 이해하는 도구로 바뀌기 시작했다. 앞서 언급한 키만이 아니라 몸무게 그리고 각종 신진대사, 심지어 정신이나 심리를 측정하기 시작하면서 우리의 정체성을 탐구하는데 측정학을 사용한다. 

 

우리는 어떤 때는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정확도를 요구하지만 어떤 때는 느슨한 척도에 만족하거나 오히려 좋아한다. 179cm의 키를 가진 사람은 측정도구가 느슨해서 180cm가 넘도록 해주었으면 한다. 몸무게가 많이 나가는 사람들은 저울이 자신의 몸무게를 가볍게 나타내줄 때 좋아한다. 정확하게 측정할수록 좋은 평가를 듣지 못한다.

 

이러한 점은 측정이 정확성을 가지고 있어도 인간 사회에서는 외면을 받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즉 이는 객관적이고 명징한 측정이 오히려 주관적이고 부정확하여도 수용되고 유지될수 있다는 점을 말해준다. 측정은 주로 과학자들의 영역으로 간주된다. 인공물과 자연 현상, 물리적 현상을 단위의 기준으로 삼아 진리 탐구 차원에서 정확한 측정 방법과 도구를 고안하는 노력들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방법과 도구가 실제로 널리 사용되려면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측정학의 역사가 단순히 과학자들의 영역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이 대목에서 드러난다.

 

진나라는 전국 통일 후 가장 먼저 도량형을 통일했다. 청나라는 도량형 때문에 망했다. 청나라 말기의 사례를 보면, 아편전쟁 이후에 주요 세관과 시장이 외국 상인에게 넘어갔고 중국 상인들은 자신들의 도량형을 쓰지 못했다. 황제에게 도량형 통제권이 없었다. 이는 중국 상인들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했고 불리한 점은 바로 이익의 감소로 나타났다. 청 왕조가 도량형 등의 문제를 통제하지 못하자 우창봉기가 일어났고, 이 봉기는 신해혁명으로 이어졌다. 이를 계기로 청 왕조는 무너지고 1912년 중화민국이 건립된다. 중화민국은 측정체계에 매진한다. 즉 측정은 정치와 뗄 수 없을뿐더러 이는 바로 경제적인 요인과 밀접하게 맞물려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정치가들은 도량형의 통일 통해 권력기반을 다졌고, 상인들은 도량형의 차이를 통해 사리사욕을 채웠다. 영국은 아프리카의 황금해안에 있는 아산티 제국을 무너뜨리고 자체 도량형을 파괴하면서 자신들의 도량형을 강요하여 황금을 둘러싼 막대한 이익을 편취했다. 오늘날 세계가 각종 표준전쟁에 혈투를 벌이고 있는 점은 이 때문이다. 그 혈투에 정치적인 세력도 결합한다.

 

미터법의 확산은 과학자나 시민이 아니라 프랑스 혁명세력들이 구체제를 완전히 바꾸기 위한 일환으로 시행되어 가능했다. 그래서 ‘미터법은 프랑스 군대의 총검 뒤에서 행진했다.’는 말이 나왔다. 드디어 1950년대 이르러 프랑스혁명 세력들의 바람대로 미터법은 보편성을 갖게 되었는데, 각국이 미터법을 받아들인 것은 정확해서가 아니었다. 국가적 통일을 도모하고 제국주의를 몰아내며 국가 경쟁력을 키우는 한편 국제 사회의 일원이 되려는 동기에서 수용했다. 이는 정치 경제적인 요인 때문에 자발적으로 수용한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미터법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미국의 과학자들은 미터법을 현대 과학기술의 필수조건으로 생각했다. 1957년 10월 소련이 우주선 스푸트니크호를 발사하면서 기술격차에 대한 우려가 터져 나왔다. 소련은 1927년 미터법을 채용했던 것이다. 물리학자 에드워드 텔러는 미터법으로 전환하지 않으면 세계의 주도권을 미국이 차지하지 못할 것이라고 했지만 아무런 조치도 취해지지 않았다. 미국 정치인들은 미국이 잘 나가고 있기 때문에 애써 전환을 할 필요가 없다고 보았으며, 무엇보다 돈 드는 개혁이라면 질색이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앵글러 색슨족은 미터법을 쓰지 않거나 프랑스에서 만든 것은 사용하지 않는다는 민족과 국가적 ‘감정’이 개입되기고 했다.

 

이러한 점 때문에 벌어진 가장 비극적인 사례는 1999년 1억 2500만 달러를 투입해 만든 화성기후 탐사선이 화성궤도에 진입하다가 폭발한 사건이다. 사고가 난 이유는 공학자들이 로켓 프로그램을 만들 때 야드파운드법을 쓰고 다른 집단은 미터법을 썼기 때문이다. 아직도 연료의 양을 재는 단위가 달라서 비행기가 중간에 비상 착륙하는 일도 벌어지고 있다.

 

현대 세계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측정경관(metroscape)이라고 한다. 측정이 일정한 경관을 만들어냈다는 말이며, 현대 세계는 측정이 만들어낸 경관이라는 것이다. 측정체계는 제품을 만들어낼수 있고, 노동자와 시장, 산업을 형성했다. 정치적 경제적 그리고 사회 문화적인 역학관계들을 구성하고 강화 혹은 소멸시켰다. 자본주의의 출현은 측정과 분리가 불가능한 것이다. 

 

자본주의 시대의 측정 기준은 과학자들이 말하는 단위가 아닐지 모른다. 우리가 자동차의 기름을 넣을 때, 몇 리터를 넣어달라고 하지는 않는다. '3만원어치요' 혹은 '5만원어치요' 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그렇다. 사람은 연봉이 얼마이냐에 따라 물건은 얼마짜리이냐에 따라서 그 측정의 정확성이 매겨지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측정은 과학의 영역이 아니라 사회의 영역이기도 하다라는 점은 이해가 되기도 하다. 

 

앞서 180cm이하는 루저라는 발언은 측정이 만들어낸 부정적인결과를 말해준다. 루저는 사회에서 실패자이다. 체코의 속담에 여섯 살이 채 안된 아이들의 옷 치수는 재지 말라는 말이 있다고 하는데 아이들이 체구로 서열이 매겨질까 봐서 였다. 폴란드 시인 미츠키에비치는 ‘컴퍼스, 저울, 자는 생명 없는 물건에나 갖다 대는 것이다.’라고 했다. 사물을 측정하는 수단이자 학문인 측정학이 인간을 사물화하고 서열화하는 것은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니라 비인간을 위한 것이 된다. 자본주의 사회의 측정은 그럴 가능성이 많은 것이고 그것이 자본주의 측정경관의 모습이기도 하다. 다만 3D 스캐너와 같이 인간의 패션을 위해 몸을 정밀하게 측정하는 기술은 앞으로도 계속 발전할 수밖에 없다. 삶의 질을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현대의 측정 체계는 일반 시민이나 개인이 그것을 좌지우지 할 수 없다. 국제단위계의 측정도가 정확하게 세련될수록 근본원리를 이해하는 것도 갈수로 어려워지고 있다. 속인다 해도 알 수가 없는 지경이다. 아산티 제국의 사람들처럼 눈 뜨고 황금을 빼앗기는데 정확한 도량형이 사용되고 있다는 이유로 그 꼴을 지켜보고만 있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플라톤은 측정을 하는데 전혀 다른 두가지 방법이있다고 했다. 하나는 숫자와 단위, 척도 시작점을 기준으로 측정하는 것이다. 이를 '존재적(ontic) 측정'이라고 한다. 다른 측정은 자나 저울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알맞음이나 옮음이라는 측정방법의 기준을 사용하는 것이다. 이를 '존재론적(ontological) 측정'이라고 한다. '존재론적(ontological) 측정'은 구체적인 속성을 다루지 않는데 그것은 양적인 측정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선, 정의, 미 등이 그 예이다. 현대사회에서 측정이 우리를 현혹시키고 혼란스럽고 심지어 파괴하는 것은 무엇을 측정하는가 왜 측정하는가를 보지 않고 측정 자체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존재적(ontic) 측정'이 '존재론적(ontological) 측정'을 침범하는 것이 바로 180cm 이하 ‘루저 발언’이다. 인간을 180cm라는 수치로 사람의 가치에 대한 존재론적 평가를 내렸기 때문이다. 노동산물의 수치로 인간의 가치를 평가할 수 없는 것도 같다.

 

존재적 측정과 존재론적 측정에서 우리가 지켜보아야 할 것은 측정행위가 하나하나 어떻게 수행되는가가 아니라 측정 경관이 ‘우리에게 무엇을 하느냐’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다. 또한 측정학의 역사에서 중요한 것은 측정경관이 어떻게 생겨났고 대안이 무엇이었으며 그 대안이 거부되고 거부된 결과가 무엇을 얻고 잃었는지 되새겨야 한다. 나라가 망하거나 사람이 크게 상하고, 민중들의 삶이 피폐해진 것 말이다. 그런 면에서 존재적 측정과 존재론적 측정은 한쪽이 절대 옳은 것이 아니라 상호 보완의 관계에 있는지 모른다.


김헌식(교보문고 북멘토, 소셜컬처크리틱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