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리뷰

삶과 민주 사회의 진정한 주인되게 하는 노자 사상

부드러운힘 Kim hern SiK (Heon Sik) 2015. 7. 13. 16:40

삶과 민주 사회의 진정한 주인되게 하는 노자 사상

-생각하는 힘 노자의 인문학


노자의 사유가 집적된 ‘도덕경’은 비록 수천 년 전의 사상서인데, 주류 사회나 교육기관 어디에서도 가르치거나 중요하게 전승시키지는 않지만 항상 많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탐독해 왔다. 그렇게 시대는 각각 달라도 노자의 사상을 사람들이 언제나 다시금 펼치는 동기가 있었을 것이다. 최진석의 ‘생각하는 힘, 노자의 인문학’은 그간 수천년 이래로 수많은 사람들이 왜 노자의 사상을 펼쳤는지, 그리고 앞으로도 왜 펼칠 것인지에 대해서 주목하고 있다. 물론 이런 다룸은 기존의 노자에 대한 접근법에서 거리를 둔 채 이루어져 더욱 차별적인 흥미를 자극하기도 한다. 


우선, 저자는 노자의 사상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거나 갑자기 땅에서 솟은 것이 아니라 사유의 역사적 과정을 통해 탄생했다고 본다. 특히, 경제적 발전과 정치 사회적 분화와 혼란의 와중에 탄생했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저자는 당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솔루션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은, 주, 춘추전국 시대를 거치면서 형성되는 불-혈연-상제-덕-도라는 개념의 진전이라는 도식 속에 이를 담으려 했다. 이러한 진전은 노자가 왜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가에 초점을 맞춘다. 즉, 지식과 정보의 전달이거나 단순히 해석을 중점에 두는 것이 아니라 사고할 수 있는 법, 그것도 인문적으로 사고하는 법을 중요하게 다룬다. 노자의 사상을 도(道)의 실재적 탐구론쯤으로 보는 것은 이러한 인문적 사고 방법의 진전을 막는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저자는 책을 통해 일관되게 실체나 본체가 아니라 유무상생의 관점에서 대립적 경계의 사유를 중요하게 강조한다. 경계에 있다는 것은 특정 신념이나 이념에서 벗어나 통찰하고 사유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이 진정한 노자의 인문학 그리고 노자의 사상을 통해 생각하는 힘을 기르는 것이라고 본다.


우선 노자 사상의 역사적 배경과 연원을 보면, 하늘 중심, 혹은 하늘 의존적인 은나라에서 땅, 인간 중심인 주나라 시대 이후 춘추전국시대라는 혼란기에서 공자와 마찬가지로 노자도 인간의 길을 모색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즉, 천명(天命)을 극복하고 ‘인간의 도’를 찾으려 했다는 것이다. 이런 인간의 도는 비의성, 임의성, 주관성을 극복하고 투명성과 객관성, 그리고 보편성을 실현하는 것을 말한다. 다만, 공자는 사람 사이의 인(仁)을 통해, 노자는 자연의 법칙을 통해 인간의 도를 실현하려 했다. 공자는 인간의 내면에서 노자는 자연에서 존재와 사유의 근거를 마련했다. 공자는 인간성을 바탕으로 보편적인 기준을 확보하고 사람들이 그것을 실현해나가야한다고 주장했고, 노자는 이렇게 보편적 기준을 규정하고 분별 강조하는 것이 가치론의 함정에 빠지고 오히려 차별과 갈등의 원인이 된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노자의 사유에서 핵심적인 사유는 무엇일까. 우선 저자는 유무상생을 강조한다. 노자가 유와 무로 인간의 주관성을 탈피하고 자연의 객관성으로 향했고 말한다. 자연이라는 질서 속에서 인간의 질서를 형성하는 토대를 마련하려 했다는 것이다. 노자는 신의 질서를 자연의 질서로 대체하면서 인간의 길에 적용하려 했다. 공자는 신의 질서를 인간의 질서 형성에 그대로 대체하려 했다. 이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개념이 유무상생인 것이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이 무가 먼저이고 유가 나중인 것이 아니라 노자는 유와 무가 공존한다고 본다. 유와 무가 공존하는 것은 매우 현묘한 일이라고 표현한다. 노자는 그래서 “그렇게 같이 있다는 것은 현묘하다고 한다, 현묘하고도 현묘하구나 이것이 바로 온갖 것들이 들락날락거리는 문이로다.”라고 말한다. 또한 “이 세계는 무계열과 유계열의 두 대립면의 공존으로 되어 있고 이 두대립면의 긴장과 공존이 이 세계를 만들고 있으며, 죽는 것도 태어나는 것도 유와 무의 관계성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말한다. 대립과의 상호의존관계 그것이 노자가 이해하는 세계의 존재형식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따라서 노자가 말하는 ‘도’라는 개념은 하나의 형식이거나 원칙에 머물지 않고 유무상생이라는 세계의 존재를 드러내는 기호나 글자라고 말한다. 저자는 이런 대목에서 기존 학자들이 도를 특정한 존재성을 가진 실재로 보는 것과 다른 견해를 취한다. 유와 무가 새끼줄처럼 꼬이듯이 상호의존한다는 것이다. “비어야 쓰음이 있고, 꽉차면 쓰임이 없다”는 노자의 말은 이를 잘 나타내고 있다. 이런 유무상생의 상호의존 맥락에서 노자는 도를 표현할 때 “새끼줄 같구나”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도는 개념화 할 수 없고, 변화와 관계속에서 생각할수 밖에 없다. 따라서 同, 玄, 混, 一, 道는 같은 맥락 안에 있는 개념인 셈이다. 모두 대립면에서 공존하고 관계하면서 무화의 뒤섞임 속에서 무엇인가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노자의 관계론은 공자의 예처럼 보편적 기준을 위한 관계가 아니라 목적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가치를 인위적으로 강조하지 않아도 된다. 하나의 목적이 아니라 각자의 관계적 자율성을 추구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거피취차에 더 맞는 태도인 것이다. 이 말은 현재의 이것을 버리고 저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하는 것을 말한다. 즉, 어떤 가치의 목적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 자체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것은 현실의 구체성을 의미한다. 그것은 집단성이 아니라 개별자에 대한 주목을 낳는 것을 뜻한다. 이는 서양철학이 이성, 합리성, 추상성, 관념성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맥락이다. 현실을 중요시했기 때문에 더 이상 현실은 신의 세계로 떠나야할 곳이 아니다. 경험할 수 있는 현실이 제일 중요하기 때문이다. 서양이 철학이 이성의 질서를 만들지만, 공자와 노자가 경험을 통해 질서를 모색했던 점에서 더욱 이를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전통적인 서양철학을 탈피하려는 근현대 철학과 노자의 사상은 맞닿아 있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노자의 사상에서는 선과 악, 합리와 비합리, 이것과 저것의 분명한 구분보다는 서로 뒤섞여 있는 흐릿한 상태에 주목한다. 밝음과 어두움의 이분법적인 구분이 아니라 그것의 교차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즉 노자는 유무상생의 흐릿한 경계의 관계는 하나의 ‘一’에  있다고 보는 것이다. 경계의 관계성 때문에 도가사상에서는 ‘광이불요’, 빛을 발하지만 눈을 부시게 하지 않는다는 점이 중요하다. 또한 ‘화광동진’, 빛이 나되 그 빛이 다른 하찮은 먼지들가 조화를 이루어 같아진다는 말을 중요하게 간주한다.


경계성의 사유를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 경계를 인식하지 못한 사람은 과감한데 과감할수록 그 식견은 좁아진다. 하나에 쏠리고 고착되기 때문이다. 지적인 사람은 편견에 차기 쉽다고 말하는데, 노자는 하나의 구멍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이다. 사랑이 깨지는 이유에 대해서 저자는 사랑하지 않아서 깨지는 것이 아니라 너무 사랑해서 깨진다고 말한다. 그것은 바로 경계가 깨어지고, 한쪽으로 쏠려들어가면서 사랑의 관계가 깨어지고 마는 것이다. 사랑을 깨뜨릴까봐 노심초사하는 것이 사랑을 깨뜨리는데 이것은 사랑과 미움이 같이 맞물려 공존한다는 생각을 못하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따라서 유무상생의 관점에 바탕을 두고 명확한 것보다 불분명한 흐릿한 상태, 확신에 차 있지 않은 태도를 갖는 것이 세계와 순조로운 관계를 형성하는 기초라고 노자가 말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이 책을 통해 저자가 집중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무위의 개념이다. 노자는 바람직한 것을 추구하기보다는 자연스럽게 바라보이는 것에 나서는 것을 무위라고 말한다. 이런 맥락에서 노자는 “얻기 어려운 재화가 사람의 행동을 어지럽힌다”고 말한다.  얻기 어려운 재화라는 것은 사람들이 욕망하지만 손에 넣을 수 없는 물건이다. 인위적으로 욕망하는 것은 사회나 문화적 조건에 따라 달라진다. 특히나 겉으로 보여지는 것을 위해 욕망하기도 한다. 이때문에 노자는 “성인은 배를 위할망정 눈을 위하지는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배는 스스로 고파지는 것이다. 성공에 대한 태도도 다시금 생각하게한다. 노자의 ‘도덕경’ 2장은 成功이라고 하지 않고 功成이라고 하는 점을 저자가 주목하는 이유이다. 성공은 사람이 이루는 것을 말하지만, 공성은 공이 이루어지는 것을 말한다. 자연스러운 흐름을 강조하고 인위적인 행위를 우선하는 개념이 아닌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노자는 물을 애써 맑게 하지 않으며 혼탁한대로 둔다. 본래 물이 완전무결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이런 태도를 갖춘 사람은 어떠한 태도를 보일까. 자연스럽게 놓여 있음을 강조하는 이들은 꽉 채우려하지 않고 오직 채우지 않기 때문에 자신을 너덜너덜하게 하지 특정한 모습으로 완성치 않는다.“라고 말한다. 보통 ‘대기만성’이라고 읽는 ‘도덕경’ 제41장의 ‘대기면성’의 경우에도 독특한 해석을 내놓는다. 그 해석은 큰 그릇이 늦게 이루어진다는 뜻이 아니라 큰 그릇은 특정한 모습으로 굳어지는 것이 아니라 너덜너덜한 상태로 있는것을 가리킨다고 저자는 말한다. 노자는 무위를 통한 無不爲를 강조하는데, 유위의 태도는 자신의 기준대로 움직이는 사람을 말하고 무위를 있는 그대로인 것에 대응하는 자세를 말한다. 무위의 태도를 보이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없다는 말이다. 노자는 더 나아가 “통치자가 이같은 이치를 지킬 수 있다면, 만물은 저절로 교화될 것”이라고 말한다. 무위의 사유가 통치철학에도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음을 적시하고 있는 것이다.


 ‘도덕경’ 48장을 보면 배움에 대해서도 이러한 무위의 관점을 잘 볼 수 있다. 노자는 배움을 행하면 날마나 보태지고 도를 행하면 날마다 덜어진다고 말하고 있다. 공자의 철학에서는 배움 즉 학습을 중요하게 생각해서 끊임없이 쌓도록 한다. 그러나 노자는 갈수록 덜어내도록 한다. 이는 유위의 행위들을 덜어내는 것을 말한다. 무위는 학습과 경험을 통해 쌓여가는 지식이나 신념 등을 덜어내고 원래의 자연스러운 있는 그대로에 부응하려는 태도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노자는 “덜고 덜어내면 무위의 경지에 이르는구나”라고 말했다. 무엇보다 이는 모든 것을 버리라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노자는 “무위를 실천해봐라 그리하면 안되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것이다. 유위는 인위적인 일거리를 만들어내는 것을 말한다. 때문에 “천하를 차지하는 것은 항상 일거리를 없애기 때문이다.”, “일거리를 만들면 천하를 차지할 수 없다”라고 말한다. 노자는 천하를 차지하기 위해서 무위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는 쓸데없는 일거리를 자꾸 만들어서 자연스럽게 해야 할 일을 망치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이를 압축한 말이 천장지구이다. 노자는 “천지자연이 장구할수 있는 까닭은 그 자신을 살리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장생할 수 있다고 말한다. 세계는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변화하고 그것은 흐름을 타게 된다. 


저자의 관점에서는 자신 스스로 어디에 고정되어 있거나 틀에 집착한다고 하면 본래의 목적조차 얻을 수 없게 된다고 보는 것이다. 유학이 보편적인 기준을 향해 달려가기에 필연적으로 가치론에 빠지는 것과 달리 노자의 사상은 세계와 능동적이고 자율적으로 관계하기 때문이다. 지식과 사고 그리고 과거 경험에 빠지면 세계의 실상이나 변화를 알 수가 없다. 통치술에서도 마찬가지 원리가 적용되는데, 군주는 백성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에 대응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보이는 대로 반응할 수 있는 것은 무위를 실천하는 것이며, 그것은 바로 대립면의 공존에 대한 인식을 체득하는 것이다. 바로 유무상생의 원리 즉 ‘도’를 실천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원리를 체득 실천하는 사람들은 어느 하나에 치우치지 않고 빠지지 않는다. 때문에 선을 강조하지도 않도 자신의 도덕적 윤리적 우월성을 강조하지 않는다. 세속적인 것을 폄하지도 그것을 극찬하지도 않는다. 자신의 능력을 부각하지도 그것을 은폐하지도 않는다. 그냥 그대로 흘러가거나 보여지는대로 둔다.  


이러한 노자의 사상은 현대인들에게 어떤 의미인가,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가. 이 책의 끝은 노자의 사유가 ‘자기’에게로 돌아온다. 유무 상생, 관계성, 경계면, 무위의 사유들은 자신 스스로의 자율성 회복에 모아진다. 외부의 모순을 지적하고 그것에 대한 비판과 혁명을 말하는 것보다는 자신에 대한 혁명을 말한다. 저자는 자신에게 집중해서 스스로 자기 자신을 사회의 책임자로 등장시킬 때 변화를 위한 사회 공헌도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사회적 변화나 개혁을 위한 명분을 내세워 자기 자신을 소외시킬수록 애초의 목적과 멀어지고 오히려 많은 해악을 끼치게 될 뿐이라고 말한다. 노자가 소국과민을 강조하는 것은 원시공동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각 개인을 바탕으로 자율적인 주체성을 통해 각자의 무위를 실현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과도한 국가개입이나 정책의 과잉을 벗어나 각 시민 개개인의 행복을 실현시키는 방법을 말하는 것이다. 노자가 사람들의 결승문자를 회복하자는 것도 사람과 사람의 커뮤니케이션이 가진 관계적인 현실과 변화를 반영하자는 뜻이다.


저자는 노자의 사유가 기업의 생산, 경영과도 맞물려 있다고 말한다. 거대한 조직 안에 있는 현대인들은 자신의삶을 영위한다는 자존감이 아니라 볼트와 너트같은 사물감을 더 느끼므로 노자의 사상처럼 개개인이 스스로 그러한 상태로 자율적으로 임할수 있다면, 자발성을 통해 자율성을 갖고 행복을 누리는 존재가 될 것이며 그것이 조직의 생산성도 올릴 수 있는 것이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당연히 조직을 넘어서 국가에도 이런 있는 그대로의 본연의 태도를 통해 스스로 자율적인 구성원들로 채워지는 것이 모든 개개인들의 행복을 위해 바람직하다고 본다. 그것은 노자 사상을 통한 자율 민주주의의 실현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글/김헌식  교보문고 북멘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