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리뷰

왕은 오히려 적장자가 되는 게 아니었다오.

부드러운힘 Kim hern SiK (Heon Sik) 2015. 3. 17. 16:32





드라마 ‘징비록’을 보면 선보가 방계혈족 출신의 왕이었기 때문에 열등감과 불안감이 심한 것으로 묘사된다. 이전의 왕들이 적장자였기 때문에 선조의 고민이 컸다는 내레이션도 접할 수 있다. 그리고 그가 정사를 하는데 부정적인 요인이되었다는 언급은 빈번하다. 이는 비단 이 드라마나 영화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조선시대에는 정말 왕들은 적장자 그러니까 장자들이 물려받았을까? 또한 적통들이 왕위를 계승했을 때, 정사를 잘 돌보았던 것일까? 


우리는 흔히 전통적으로 가문의 재산을 첫째 아들에게 물려주기에 조선의 임금들은 왕위를 장자에게 물려준 것으로 생각한다. 이런 때문에 좌절한 둘째 아들이나 셋째 아들 그리고 후궁 소생 자식들의 한을 떠올릴 수도 있다. 하지만 실제로 살펴보면 조선의 왕들이 자신의 위치를 장자에게 물려준 경우가 제대로 없다. 그것은 자의로 그러한 경우도 있었고, 타의로 주변 환경과 역학구조 때문이기도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 이는 그만큼 겉으로 드러난 것과 달리 왕위 계승이 고정적이라는 전통국가에서 왕이라는 자리를 두고 치열하게 경쟁을 벌인 증거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무엇보다 왕이 되지 못한 자도 불행했을지 모르지만 치열한 과정을 통해 왕이 된 사람들도 그렇게 행복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적장자로 임명된 왕들이 성군이 된 것도 아니었으며, 그 출생이 미흡해도 훌륭하게 그 역할을 해내는 경우도 많았다. 세상일에는 모두 일장일단이 있고, 양지가 있으면 음지가 있는 법. 이러한 점을 잘 살펴보고 있는 책이 조민기의 ‘조선임금 잔혹사’이다. 





조선은 임금의 정실부인 즉 왕비가 나은 아들인 적자 그중에서도 장자에게 물려주는 것이 원칙이었다. 하지만 이런 예는 많지 않았다. 조선의 4대 임금으로 성군으로 불리는 세종이 원래 왕위 계승권자가 아니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태조 이성계도 첫 번째 부인에서 난 장자가 아니라 두 번째 부인 강씨 즉 신덕 왕후의 막내아들을 세자로 책봉했다. 그러나 이방원은 태조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혼인한 한씨의 다섯 번째 아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또한 자신의 첫째 아들 양녕대군이 아니라 세 번째 아들인 충녕대군을 왕으로 삼았고 그는 나중에 세종으로 일컬어졌다. 물론 세종이 비록 본래 왕이 될 위치는 아니었지만, 그 어떤 왕보다 더 훌륭한 업적을 달성했다. 그가 본래 왕이 될 사람이 아니었던 점이 더 군주의 도리에 매진하도록 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그는 능력 때문에 선택된 왕이기도 했다.

왕자의 난을 일으킨 태종으로 말미암아 세종은 자신이 적절한 제왕 혈통 출신이 아니었던 점 때문인지 문종에 대해서 매우 공을 들였다. 문종이야말로 왕비 소생의 적장자였다. 그렇기 때문에 세종이나 신하들이 훌륭한 군주로 만들기 위해 매우 진력했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제왕의 도를 너무 많이 닦았기 때문인지 건강이 좋지 못했다. 그런데 여기에다가 기존의 왕들과 달리 세종은 세자가 되지 못한 왕자들에게 정치 참여를 독려했다. 하지만 이것이 문종 이후의 정치적 격변을 낳는 결과가 되었다. 즉 세종에서 문종으로 이어지는 왕위 계승에서 자신의 정치적 욕망을 키운 아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던 세종이었다. 그 아들이 바로 수양대군이었다. 수양대군은 문종이 세상을 떠난 지 1년 만에 문종에서 단종으로 이어지는 왕위를 찬탈하는 계유정난을 일으킨다. 수양대군은 왕이 된 뒤에 세종이 설치한 집현전을 없애버린다. 만약 문종이 제왕의 도를 덜 닦았다면 오래 살아남아 단종이 권력기반을 다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게 했을지도 모른다.

성종도 본래 왕이 될 수 없었다. 처음에는 괜찮았다. 세조는 즉위하여 장남을 세자로 만들었다. 그가 바로 성종의 아버지 의경세자이다. 하지만 전혀 생각하지 못한 일이 벌어진다. 의경세자가 스무 살의 나이에 죽고 만다. 이 때문에 세조의 차남이 왕위에 오르게 된다. 바로 그가 예종이었다. 성종은 아버지 의경세자의 죽음으로 수많은 종친중의 한 명에 불과해졌다. 하지만 예종은 1년 2개월 만에 죽고 만다. 정상적이라면, 예종의 아들이 왕위를 이어야 하지만 성종이 왕위를 물려받았다. 이는 당대의 권력가 한명회의 힘 때문이었다. 성종이 바로 한명회의 사위였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성종은 극단을 달리지 않으면서 훈구와 사림파를 적절하게 아울러 우아하고 화평한 정치 상황을 만든다. 그러나 화평한 가운데 불안의 씨앗이 있다. 성종 시기에 가장 전형적인 사례는 바로 폐비 윤씨 문제였다. 정희왕후를 비롯한 대비들이 폐비 윤씨를 모함하였고, 성종은 왕후 윤씨를 폐하고 사약을 내리게 되었다. 물론 이 문제는 연산군의 폭정을 낳는 일이 되었다. 그런데 연산군의 폭정은 비단 이 폐비 윤씨 문제 때문만으로 빚어진 것은 아니다. 연산군 또한 적장자로 촉망 받는 임금이었다. 연산군은 조선 왕들 중에 몇 안 되는 적장자 태생의 왕이었기 때문에 신하들도 주목을 하였고, 연산군도 포부가 컸다. 하지만 성군을 만들겠다는 신하들의 의욕은 지나쳤고 연산군은 신하들의 언행에 문제가 많고 그들의 세계관에 동의하지 않게 되면서 적대적인 관계를 갖게 된다. 그는 성리학적 세계보다는 문화예술적인 자유분방함을 추구하면서 대신들과 대립했다. 무엇보다 그는 왕위 계승에서 거리낄 것이 없으므로 왕권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었다. 여기에 자신의 출신 문제인 폐비 윤씨로 인해 극단적인 살인과 폭력, 그리고 사화를 일으킨다. 이 때문에 극단적인 왕권에 대한 견제를 모색하게 되고, 정권을 잡은 신하들은 그를 폐륜 군주로 왕의 기록에서 삭제했다.

연산군의 견제를 받으면서 살아남았던 동생 중종은 이러한 신하들의 왕이 되었다. 바로 중종반종으로 그는 언감생심 왕의 자리에 오른다. 그는 조선 최초로 신하들이 추대한 왕이었다. 그러므로 당연히 중종은 왕으로 자립하기 보다는 신하들에 휘둘리는 상황이 되었다. 국정의 주도권이나 의사결정에서 자신의 독립적인 언행을 하기가 쉽지 않았다. 심지어 그는 자신의 왕후와 이혼을 강제로 해야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변하기 시작한다. 그 단초가 조광조였다. 훈구파들을 견제하기 위해 전격 발탁하지만, 거꾸로 사림파가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조광조를 제거하면서 그는 왕권을 확실하게 행사하는 임금이 되었기 때문이다.

조선의 14대 왕인 선조는 왕가의 방계혈족이 임금의 자리에 오른 최초의 사례였다. 13대까지 적어도 왕과 왕비 혹은 세자와 세자빈의 소생이 왕에 올랐지만 선조는 이와 달랐다. 명종은 외동아들인 순회세자가 13살에 요절을 하면서 더 이상 자식을 얻지 못한다. 중종의 소생인 덕흥 대원군의 세 아들을 비롯한 왕족의 종친 가운데 한 사람을 왕위에 올리려 한다. 덕흥대원군은 중종의 후궁 창빈 안씨의 아들이었다. 영의정 이준경과 인순왕후는 명종이 왕위를 결정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자 중종의 일곱 번째 아들이자 덕흥대원군의 세 번째 아들인 하성군을 왕으로 지명한다. 그가 바로 선조이다. 선조는 자신이 적통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을 한다. 신하들은 그를 최고의 왕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선조는 차츰 지쳐 간다. 자신의 출신 때문에 자신감도 사라졌다. 여기에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붕당정치가 격화되기 시작한다. 무엇보다 그를 괴롭힌 것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라고 하는 전대미문의 전쟁이었다. 전쟁의 와중에 선조는 더욱 더 심신이 피폐해졌다. 

선조는 장남 임해군을 세자로 임명했지만 그는 말썽을 부려 세자의 자격을 박탈당했다. 하지만 선조는 차남인 광해군에게 왕위를 줄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신성군을 마음에 두기도 했다. 임진왜란은 광해군에게 기회를 제공해주었다. 선조가 아끼던 신성군이 불행히 요절하는가 하면 그는 또 하나의 조정 분조를 이끌고 임진왜란 전장을 누비고 민생을 살펴 공을 크게 세웠다. 하지만 선조는 뒤늦게 낳은 아들 영창대군에게 왕위를 줄 생각을 하기도 했다. 더구나 명나라에서는 내부 사정 때문인지 광해군을 세자로 인정하지 않아왔다. 결국 그는 차남임에도 왕위에 올랐고, 준비된 군주로 대동법과 호패법 그리고 실리외교를 펼친다. 그러나 그는 대북파와 정치적 동고동락을 하면서 정적들을 양산했다. 청나라를 의식한 중립외교는 대명사대주의자들의 정치적 명분이 되었다. 더구나 영창대군을 죽게 하고, 영창대군의 어머니이면서 자신의 또 다른 어머니인 인목대비를 폐하게 된 일은 결정적이었고 정적들은 그를 패륜을 저질렀다하여 왕의 자리에서 쫓겨낸다.

조선의 군주 가운데 적통의 마지막 임금은 숙종이었고, 숙종의 후궁 최씨의 아들이 영조이다. 중요한 것은 영조의 어머니 최씨가 무수리 출신이라는 점이다. 영조는 숙종처럼 강력한 군주가 되고 싶었다. 숙종은 출생이 떳떳했기 때문에 각 세력들의 긴장과 이완을 적절하게 활용하여 정국을 주도했다. 하지만 영조는 노론을 등에 업고 왕이 되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자유롭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노론의 등살에 자신의 장자인 세도세자를 죽게 만든다. 이에 대한 죄책감으로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는 왕위에 오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한다. 노론은 죄인의 아들을 왕에 올릴 수 없다고, 극력 반대하던 상황이었다. 사실 정조는 혼자의 능력과 근신으로 왕이 되기도 했지만 자신의 콤플렉스 때문에 벌어진 정치적 사단과 도덕적 윤리적 죄책감을 극복하기 위해 사도세자의 아들을 자신의 계승자로 만든데 최선을 다했다. 정조는 즉위 원년부터 7차례의 암살위협에 시달린다. 이런 상황 속에서 정조는 개혁적인 작업들을 추구하고 탕평책을 펼친다. 그가 왕이 된 것은 그의 화성행렬을 통해서 상징하듯 아버지의 한을 풀기 위해서 였는 지도 모른다. 죄인의 아들도 훌륭한 군주가 될 수 있음을 잘 보여준 사례였다. 하지만 그는 김조순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아 세도정치의 씨앗을 뿌리기도 한다.  


최악의 군주로 인조를 꼽히기도 한다. 어떻게 보면 왕이 되지 말아야했을 사람인지도 모른다. 그는 중립외교의 광해군을 쫓아내고 왕위에 올라 대명사대주의를 추종했고, 결과적으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불러와 백성들을 고통스럽게 했다. 더구나 청나라에 잡혀갔던 소현세자의 행태를 문제 삼아 독살했다는 혐의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소현세자는 청나라에 가 있는 동안 청나라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이미 앞선 문물들을 많이 섭력하여 조선의 변화와 개혁을 이끌 수 있는 군주 재목으로 꼽히던 인물이었다. 인조가 그러했든 그의 뒤에 있는 세력이 그러했듯 소현세자는 독살을 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만약 인조가 등장하지 않았다면 광해군은 중립외교를 추구하여 두 호란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며, 소현세자가 왕위에 올라 개혁적인 정책으로 조선이 근대화되는데 크게 기여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본래 인조는 선조의 13명 서자 가운데 한명일 뿐이었다. 그는 반정의 성공으로 왕이 되는 데는 성공을 했지만, 왕으로서 그리고 조선이라는 나라를 실패하게 만든 왕이었다. 


조선에서 왕이 되는 이유는 적장자 계승의 원칙대로 되는 것은 아니었다. 혹은 자신이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것만도 아니었다. 더구나 왕이나 신하가 자신의 의도대로 왕을 만들고자 했을 때 제대로 된 경우는 많지 않다. 연산처럼 적장자는 오만해질 수 있었고, 그렇지 않은 자들은 위축되기도 했지만 잘 극복하고 성공하기도 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제왕은 하늘이 내는 것이라는 말이 다시금 조선왕조에서도 확인 되는지 모른다. 물론 조선 왕족들 사이에서 왕위가 계승된 것만은 분명하지만 말이다. 어쨌든 제한된 구조 안에서 왕위의 계승이 이루어지는 상황에서도 치열한 다툼과 경쟁이 있음을 여실히 확인할 수 있다. 현대적 관점으로 볼 때 중요한 것은 출신이 아니라 능력이다. 하지만 그 자리에 오르는 과정이 적절하고 합법적이어야 함은 물론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반드시 문제가 생길 수 있으며, 그것은 국가 특히 민생의 피폐함을 낳는다는 사실을 잘 볼 수 있다. 그러니 선조처럼 적장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모든 책임을 전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거꾸로 적장자라는 이유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이점에서 보았을 때 드라마 ‘징비록’의 선조에 대한 묘사가 어떠해야 하는지 좀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이는 선조를 묘사하는 다른 드라마에서도 마찬가지다. 앞으로도 우리가 생각해야할 것은 적통의 계승이라는 것이 얼마나 허황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일 것이다.  


글/김헌식. 교보문고 북멘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