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화된 경기침체 아래 끝없이 쏟아지는 트렌드 담론, 그 가운에 트렌드의 본질을 진단하고 거품과 과장을 꿰뚫는 김헌식 교수의 ‘트렌드 클리닉 E016’이 발간됐다. ⓒ나우데이즈매년 각종 매체와 서적에서 트렌드에 관한 담론들은 수없이 쏟아진다. 장기화되고 있는 경기 침체와 그 속에서도 확장되고 있는 나름의 문화를 분석해보려는 시도는 계속해서 이루어지고 있지만, 반짝하는 유행이 아니라 장기적인 데이터 분석에 성공한 사례는 흔치 않았다. 이에 트렌드라는 이름 하의 ‘
OO대세’ 나열에 질린 사람들에게 ‘트렌드 클리닉 E016’을 추천한다.
신간 ‘트렌드 클리닉 E016’은 트렌드의 본질에 대한 진단을 하고 거품과 과장을 꿰뚫는 트렌드를 읽는 책이라고 소개한다. 그래서 제목에 트렌드와 E016 사이에 ‘클리닉’이 들어간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저자 김헌식 교수는 “트렌드는 단기간에 일어나기 보다는 시간을 두고 일어난다. 이 때문에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분별을 해야한다”고 말한다. 마치 지금 불씨가 떨어져 활활 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트렌드는 뭉근하게 열을 가해왔던 것이 드디어 발화한 것이라는 관점이다.
이런 관점은 저자가 사용하는 언어에서 확실히 느낄 수 있다. 우선 제목부터 다소 당혹스럽다. ‘E016’ 이천십육이라고 읽는 건 맞는지 고민 되지만, 어쩐지 익숙한 제목이다. 생떽쥐베리의 소설 ‘어린왕자’의 소혹성 ‘B612’에서 따왔기에 낯설지만은 않은 것이다. 김 교수는 이런 것이 바로 ‘트렌드’라고 말한다. 익숙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것. E016의 E는
Earth와
Exoplanet 양면을 띄고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지구같지만 외계행성 같은 낯설음이 공존하는 것이 트렌드”라고 제목에서부터 말하고 있다.
이런 발상을 해낸 김헌식 교수는 문화평론가이자, 대중들에게는 ‘세바시(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에 나왔던 사람으로 잘 알려져 있다. 특히나 베스트셀러인 ‘의외의 선택 뜻밖의 심리학’은 마케팅 입문서로도 입소문 나있다. 최근에 그의 서적들은 문화 프레임과 시스템의 결합적인 관점으로 ‘미래’를 바라보기 때문에 이번 ‘트렌트 클리닉 E016’으로 한해의 트렌드를 읽을 수 있을 것이다.
‘트렌드 클리닉 E016’은 4부로 나눠져 있고, 한 부 안에서도 다양한 항목으로 나눠져 있어 한 권을 읽는데 부담이 없다. 한 권의 책이지만, 요즘 트렌드라는 ‘스낵 컬쳐’에도 어울리는 형식이다. 네가지 분야는 ‘사회·경제’, ‘라이프·스타일’, ‘커뮤니케이션·테크놀로지’ 그리고 ‘미디어 콘텐츠’다.
우선 목차에 눈길을 주면 처음에는 아주 낯선 단어들의 나열로만 보인다. 하지만 이내 어디선가 한 번 본 듯한 단어들로, 한번만 생각하면 의미를 유추할 수 있는 단어들이다. 이론적인 데이터로서의 트렌드가 아니라, 생활밀착형 트렌드를 조사해 우리가 해봤거나, 할 수 있는 내용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첫 장에서 우리는 바로 사회·경제 분야의 ‘
RPG’라는 용어를 맞이한다. 흔히 롤플레이게임(
Role Play Game)으로 알려진 이 단어로 시작을 한 것은,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다양한 ‘역할’을 맡고 있다. 그리고 그 사이를 얼마나 유연하게 오가며 역할을 수행하는지가 성공의 척도가 되기도 한다. 김 교수는 “정해진 역할이 없고 언제든 바뀔 수 있는 점”을 들어 “우리가
RPG 속에 있다고 해도 지나침이 없어보인다”고 말한다.
과거의 우리는 역할이 어느 정도 정해져 있었다. 한 배역에서 한 얼굴을 보여주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일상은 물론,
TV에서도 다변화된 캐릭터를 원한다. 이를 책에서는 다양한 예시를 들고 있다. ‘복면가왕’ 처럼 계속해서 한 사람이 캐릭터변신을 하기를 원하거나, 개인도 페이스북 등
SNS에서 좋아요를 누르고, 댓글을 다는 이용자인 동시에 한 계정의 운영자가 된다.
이렇듯 다소 낯설게 느껴질 수 있는 ‘사회·경제’ 분야의 트렌드 담론이지만, 계속해서 쉬운 예를 통해 읽어나가면 대부분 자신에게 적용할 수 있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다. 실제로 책을 읽어나가면서 쉐어하우스, 편도족, 싱글 이코노미, 인턴, 공유경제, 웹루밍, 순한 술 등등 2016년을 살아가는 자신이 사용하고 있거나, 적어도 주변 사람과 밀접한 영향을 주고 받는 현상들을 이론적으로 접할 수 있어 한층 흥미를 더한다.
다음 ‘라이프·스타일’ 장으로 넘어가면 앞서와는 다른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타인의 삶을 들여다볼 기회가 적다. 어릴 적 앞집 아저씨가 어느 회사에서 어떤 직위로 일하는지 알고 있었고, 나아가 어떤 생활패턴을 가지고 있는지 알고 있었던데 비해, 지금 앞집 아저씨의 직업은 물론이고 출퇴근 시간조차 알기 쉽지 않다. 대신 우리는 이 챕터를 통해 타인의 삶을 읽고, 내 삶은 얼마나 트렌디한지 생각 해 볼 수 있겠다.
TV에서 하루가 멀다하고 ‘쿡방’이 쏟아진다. 게다가 쿡방에서 요리하는 남자를 얼마나 강조하는지, ‘요섹남(요리하는 모습이 섹시한 남자)’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다. 그렇다면 실제로 요리하는 남자들이 늘어났을까, 우리는 이 트렌드를 ‘운동하는 여자 요리하는 남자’에서 읽을 수 있다. 김 교수는 남자의 요리와 여자의 운동이 모두 각자의 ‘자산’이라는 측면에서 접근해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또한 요섹남에서 그치지 않고 ‘요설남(요리에 설탕쓰는 남자, 백종원)’까지 이어가 친환경유기농 웰빙라이프에 신물 난 이들의 라이프에 대해서도 알려준다.
‘커뮤니케이션·테크놀로지’는 스마트폰을 24시간 곁에서 떨어뜨리지 않는 현대인에 아주 특별한 챕터다. 물론 과거에 휴대폰,
mp3, 신문, 핸드북, 노트, 거울, 시계 등 모두 따로 들고 다녔어야 할 것들이 스마트폰 안에 들아가있으니 항상 스마트폰과 함께 하는 것이 이상한 일도 아니다. 하지만 이제는 스마트폰이 사람의 운동, 수면, 식단 패턴을 분석하고 생활습관을 조절한다. 운전도 자율주행으로 스마트하게 하는 시대가 왔다. 나아가 매체들은
SNS나 댓글을 이용해 쌍방향 소통을 지향하고, 영화는 4D로 보고, 프린트는 3D로 한다.
이 모두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처럼 느껴진다. 10년전에는 상상만 했던 일들이 어느새 일상이 됐다. 이 장에서 우리는 언제부터 이것들이 일상화 되었고, 앞으로 어떻게 변화할 것이며, 지금 우리가 이 스마트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각종 중독에 빠지는 등 부작용을 초래하지 않을 지 생각해 볼 수 있다. 특히 이 스마트한 세상 속에서 차보다 비싼 일반 시계에 값을 지불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가치’의 의미도 다시 느낄 수 있다.
마지막으로 ‘미디어 콘텐츠’ 장에서는 웹드라마,
SF엔터테인먼트, 컬러링 북 등의 콘텐츠부터 복고, 키덜트, 육아까지 광범위한 미디어에 대해 이야기한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이 책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가지콘(가볍게 지적인 콘텐츠)’이다. 간단한 예시로 ‘지대넓얕’이라는 베스트셀러를 들었다. 이 책은 ‘지적인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이라는 제목이다. 이를 보며 김 교수는 시대적 정서의 변화에 놀라움을 표했다. “시대적인 경향이 가볍고, 얕은 것에 대한 부끄러움이 없다”고 말하며 너무 무겁고 진지했던 전 시대에 대한 반향이라고 분석했다.
책을 읽다 보면, 김헌식 교수는 이 책에서 ‘결정장애 세대’라는 단어를 종종 사용한다. 이는 모든 것이 가능해져 버린 세대를 일컫는 표현이다. 올리버 예게스의 책 제목으로도 사용된 적 있으며, 폭 넓은 가능성과 무궁무진한 기회, 즉 ‘멀티 옵션’이 주어진 현대인들이 오히려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 지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고 무기력감에 빠진 채 “글쎄요(
Maybe)”만을 되뇌는 사회를 말한다.
한 유럽인 아시아 전문가가 중국의 저력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들은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지 않고, 목표만을 바라보고 가는 ‘브레이크 없는 열차’라고 표현한 바 있다. 많은 결정권을 가진 서구 열강들이 주춤거리고 있는 지금, 중국은 “목표를 가슴에 꽂아라” 또는 “문제를 디딤돌로 두라”는 구호를 외치며 알리바바의 마윈, 샤오미의 레이쥔을 배출해내는 것이다.
우리는 비록 브레이크 없는 열차가 될 수는 없지만, ‘트렌드 클리닉 E016’을 통해 미래를 읽고 달리는 열차가 될 수는 있을 것이다. 변화를 느낄 새도 없이 빠르게 변해가는 사회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것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저성장 시대의 불확실한 미래 속에서 단발적으로 유행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이고 객관적인 트렌드 분석이 필요한 것이다.
이에 우리는 거시적이고 추상적인 관점과 미시적이고 구체적인 관점을 동시에 바라보며 한 개념에 대해서 여러 시각을 제시하는 트렌드 리더가 필요하다. 그저 장미빛 미래만 늘어 놓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걸어온 길과 서있는 지금을 분석해 걸어갈 미래의 징검다리를 두드려 볼 수 있게 만들어 주는 책이 필요한 것이다. ‘트렌드 클리닉 E016’은 시작하면서 말했듯이 클리닉이라는 단어를 사용해 트렌드 분석 자체를 진단하고, 치료하는 것을 지향한다. 이에 앞으로 김 교수의 트렌드 클리닉 시리즈가 E017, E018로 연작되기를 응원해본다.
데일리안 이선민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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