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전통속의 하이테크놀로지

칠기

부드러운힘 Kim hern SiK (Heon Sik) 2014. 5. 6. 21:16
[오마이뉴스 김범태 기자]
▲ 이석구作 채화칠기 ‘화접도’의 일부 채화칠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장인의 손으로 깎고, 다듬고, 칠하는 공정을 거쳐야 한다. 마치 하나의 예술작품을 접하고 있는 느낌이다.
ⓒ 김범태

영롱한 옥빛 바탕에 수십 마리 나비떼가 하늘하늘 춤추며 유영하고, 현기증이 날 정도로 화려한 꽃잎은 수줍은 미소를 한껏 머금은 채 장롱에 내려앉았다.

깊이 있는 푸르스름한 청색 배경에 어디서 날아왔는지 여러 마리의 학이 유유히 날갯짓하며, 흰 구름 사이를 노닌다. 손잡이만 없었더라면 마치 한 폭의 벽화를 보는 듯한 착각에서 한동안 헤어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채화칠기(彩畵漆器) 장인 이석구씨의 작품 '화접도'와 '운학도'를 마주하고 받은 느낌이다. 모두 가로 4.2m, 세로 2m의 14자가 넘는 대형 장롱이다. 문갑에 그려진 선홍빛 매화는 금방이라도 꽃망울을 터트릴 듯 생생하다. 이내 카메라에 담아보지만 그 고유의 색감이 디테일하게 살지 않아 안타깝다. 

이렇듯 오색찬란하면서도 단아한 채화칠기는 이석구씨가 우리 고유 전통공예작품의 '잃어버린' 빛깔을 찾으려는 평생의 노력이 결실을 맺으면서 재현되었다.

채화칠기는 목기에 옻칠을 수십 번 한 후에 옻에 여러 가지 안료를 배합하여 다양한 색과 문양을 그려 넣는 우리 민족의 전통공예기법.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나전칠기의 제작기법을 토대로 하되 작업 과정이 다르다. 특히 옻칠에 천연안료를 써 색을 내는 과정이 힘들다.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옻 산지인 우리나라는 삼국시대부터 옻칠과 채색 안료를 이용한 칠기 공예품을 사용해왔다. 특히 신라칠기는 중국과 아라비아의 인기 수출품이었고, 조선시대에도 채화칠기는 우리 생활과 밀접한 관련을 맺으면서 다양하게 제작되어 왔다고 한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검은색 일변도의 나전칠기가 우리 칠기공예를 대표하게 되었다. 일제치하에서 많은 나전칠기 장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고, 국내에 있던 장인들도 조선총독부 산하 이왕직미술품제작소에 소속되어 일본식 나전칠기 기법만을 전수받게 된 것. 

때문에 한동안 우리 주변에서 전통 채화칠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어느 누구로부터 고유의 기법을 배울 수도 없었다. 그사이 천편일률적인 나전기법은 화려한 디자인과 색상을 앞세운 수입가구에 밀려 쇠락하고 말았다.

▲ 채화칠기 장인 이석구씨 이씨는 “채화칠기야말로 우리 민족의 미적 감각을 보여주는 최고의 전통이자 한국을 대표할 수 있는 문화작품”이라고 자신한다.
ⓒ 김범태

그러던 중 나전칠기 장인이었던 이씨가 삼국시대부터 옻칠에 다양한 색을 넣은 품격 있는 채화칠기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했다. 그는 30여 년간 여러 문헌과 자료를 섭렵하며 채화칠기의 재창조를 위해 구슬땀을 흘렸다.

하지만 단절된 역사와 문화를 복원하는 작업은 결코 쉽지 않았다. 맥이 끊긴 채화칠기를 복원하기 위해 수천 번의 실패를 거듭해야 했고, 아무도 시도하지 않는 길을 걸어야 했기에 주변으로부터 오해의 눈총도 받아야했다.

그러던 중 각고의 노력 끝에 지난 1996년 '낙랑시대 전통 채화칠기 복원 계승 성공 발표회'를 통해 오방색을 기본으로 은은하면서도 자연스러운 우리 민족 고유의 색을 재현한 채화칠기를 세상에 내놓게 되었다.

정양모 전 국립박물관장은 그의 작품을 보고 "혁신적"이라고 감탄하며 "마치 꽃밭에 들어가 있는 듯하다"고 놀라워했다. 생전의 김수환 추기경은 그가 만든 보석함을 로마 교황청에 부활절 선물로 보내기도 했다. 그의 작품은 지금도 몽골과 이란, 러시아 대통령 관저에 소장되어 있을 정도로 뛰어난 예술성을 인정받고 있다.

이씨는 이와 함께 대한민국 현대미술대전 대상수상 작가전과 한·일 평화미술교류전시회, 한·중 상호교류전 등 국내외 많은 전시회를 통해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독특하고 아름다운 우리의 칠기문화를 소개했다.

특히 프랑스 파리의 가람아트홀에서 열린 초대전과 미국 뉴욕에서 가진 부리지포드대학 초청전에서는 '파란눈'의 외국인들에게 영롱한 자개빛의 아름다움을 과시하기도 했다. 현지 언론은 "현대의 그 어떤 도료로도 따라올 수 없는 옻칠의 무한한 장점과 천연염료로 얻는 그의 채화 옻빛은 세월이 지날수록 은은함과 심오함을 더하여 한국을 대표하는 전통예술작품으로 손색이 없다"고 호평했다.

그는 "채화칠기야말로 우리 민족의 미적 감각을 보여주는 최고의 전통이자 한국을 대표할 수 있는 문화작품"이라고 자신한다.

"인공색소나 안료가 아닌 천연안료와 옻으로만 색을 낸 가구는 채화칠기가 세계에서 유일합니다. 모든 것을 손으로 깎고, 다듬고, 칠하니 만드는 데만 수개월이 걸리죠. 특히 채화칠기의 신비로운 색은 작품을 완성한 바로 그 순간에 나타나지 않고, 최소 2~3년 정도가 걸립니다. 겉으로 색이 점점 우러나오기 때문이죠."

▲ 다양한 종류와 색상의 채화칠기 채화칠기는 목기에 옻칠을 수십 번 한 후에 옻에 여러 가지 안료를 배합하여 다양한 색과 문양을 그려 넣는 우리 민족의 전통공예기법이다.
ⓒ 김범태

하지만 이씨는 단지 전통의 복원에만 심혈을 기울이지 않는다. 오히려 전통(과거)과 창작(현대)의 미감이 조화를 이루고, 함께 호흡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또 현대인의 감성에 맞는 새롭고 독창적인 디자인을 창안하고, 과감하게 도전하는 것이 장인의 정신이라 생각한다.

이 때문인지 그의 주변에는 장롱, 문갑, 화초장, 보석함 등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현대의 생활양식에 맞도록 재창조한 작품이 눈에 많이 띈다. 그러고 보니 화려하면서도 은은한 채화칠기의 멋스러움이 현대의 생활패턴에도 잘 어울릴 듯하다.

그러나 근래 들어 이씨에게는 남모르는 걱정이 있다. 바로 채화칠기의 산업화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 일반화된 옹기나 도자기와는 상반된 모습이다. 일부에서는 이에 대해 "도자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남겨진 유물이 적은 까닭에, 한편으로는 칠공예 발전에 소홀한 탓에 칠기는 가장 낙후된 전통유산이 되었다"고 말한다.

실상 칠공예는 가구뿐 아니라, 그릇, 의류, 목제품, 피혁물, 철기물, 제사, 장례, 건축 등 두루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실제로 일본의 경우 칠기그릇이 식생활용기 등으로 일반 가정집이나 음식점에서 상용화되어 있으며, 백화점에도 최고급 상품 중 하나로 판매되고 있다.

이처럼 상업성은 추락되고 단순히 전통문화나 예술작품으로만 국한되어 인식되다보니 이를 배우겠다고 나서는 후계자도 없는 상황이다. 이러한 부실한 현실에서 가까스로 복원한 채화칠기의 역사가 또다시 단절되는 것 아닌지 걱정하는 것이 이씨의 또 다른 염려다.

자국의 칠공예 발전을 방치하고 있는 정부의 무관심도 그에겐 서운한 대목이다. 전통을 이어가려는 젊은 세대의 도전이 지속될 수 있도록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게 그의 마음이다. 

칠기에 입문한 지 올해로 46년째. 그는 오늘도 신비로운 색상이 돋보이는 옥색 배경에 섬세하면서도 화려한 꽃밭을 만들고, 십장생을 그리고, 나비를 춤추게 한다. 혼신을 다한 그의 모습에서 어떤 숭고한 역사의식과 사명감도 전해져 온다.

하지만 우리의 고급문화가 어느새 천덕꾸러기가 되어 외면당하고 있는 현실에서 채화칠기 기법이 후손들에게 계속 이어지기를 바라는 장인의 주름은 더욱 깊게만 패어간다. 우리 민족의 색을 되살리려는 한 장인의 열정과 인내의 예술혼이 황혼에 다다른 그의 인생길에서 언제쯤 값진 열매로 맺힐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