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공예·나전기술의 융합 … 불교용품 주로 제작
고려사의 재발견 명품 열전 ⑥ 나전칠기
박종기 국민대 교수 j9922@kookmin.ac.kr | 제340호 | 20130915 입력
고려문화의 또 다른 정수를 보여주는 명품은 나전칠기(螺鈿漆器)다. 현재 16점이 전해진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1점을 빼곤 모두 해외(일본 10점, 미국 3점, 유럽 2점)에 유출돼 있다. 나전칠기는 칠공예(漆工藝)와 나전 기술이 합쳐진, 이른바 기술의 융합에 의해 생산된 명품이다. 나전 기술은 원래 중국 당(唐)나라에서 건너왔다. 이와 달리 목재제품 등에 옻칠을 입히는 칠공예 기술은 이른 시기부터 우리나라에서 축적돼왔다. 우리나라 칠공예의 장식기법이 주로 자개를 이용해왔기 때문에 칠공예 기술과 나전기술을 분간하지 않고 사용하면서, 나전칠기가 단일한 기술로만 제작된 것이라는 오해를 받게 된 것이다.
또한 고려의 나전기술은 중국과 달랐다. 당나라의 나전은 자단(紫檀·동남아 등지에서 식생한 나무)과 같이 단단하고 무늬가 아름다운 나무에 바로 나전을 새겨 넣었다. 그래서 목지나전(木地螺鈿)이라 한다. 반면에 고려의 경우 경전·염주 등을 담는 나무상자에 굵은 삼베를 바르고 옻칠을 한다. 그 위에 잘게 썬 나전을 새겨 넣은 후 다시 옻칠을 덧입힌다. 그런 후 나전 무늬에 덮인 칠을 벗겨내고 광 내기 과정을 거쳐 제품이 생산됐다. 이렇게 나전 기술과 칠공예 기술이 결합돼 나전칠기라고 했다.
나전대모국화당초문 염주합 세부도. 국화꽃의 붉은색 꽃술과 잎은 채색한 대모, 흰빛 잎과 넝쿨은 나전을 각각 새겨 넣은 것이다. 꽃 주변 테두리는 은과 구리선을 가늘게 꼬아 넣은 것이다. 약 900년 전 만들어진 나전칠기의 아름답고 화려한 무늬는 아직도 선명하게 살아 있다. [사진 일본 당마사(當麻寺)]
대표작은 나전대모국화당초문 염주합
두 가지 기술의 융합으로 제작된 나전칠기는 제작기법상 세 가지 특징을 갖는다. 첫째, 1㎝ 이내로 자른 조개 조각으로 무늬를 엮는다. 이를 절문(截文·끊음질 무늬)이라 한다. 이 과정에서 흰빛에 일곱 가지 색이 어른거리는 조개 특유의 색깔이 드러난다. 둘째, 바다거북 등딱지인 대모(玳瑁)의 뒷면을 채색해 나전과 함께 그릇 표면에 무늬를 놓는다. 조개와 붉은빛으로 채색된 대모의 색깔이 어울려 환상적인 색감을 보여준다. 셋째, 잘게 쪼갠 자개들을 정교하게 새긴 꽃이나 넝쿨무늬 주변에 은(銀)·동(銅)으로 꼰 가느다란 금속선을 둘러 꽃줄기와 넝쿨을 명확하게 드러냄으로써 무늬 구성에 디자인적 질서를 부여한다. 고려 나전칠기의 화려하면서도 전아(典雅)한 멋은 이 세 가지 기술이 결합된 무늬의 아름다움에 있다.
하지만 나전칠기의 수요가 많아져 대모를 조달하기 힘들어지자 대모 장식은 점차 사라진다. 초기 작품(11~12세기)에 대모의 장식이 많이 나타나는데, 현재 전해지는 나전칠기의 종류는 주로 불교 의식과 관련된 제품이다. 대장경 등을 담는 나전경함(經函)이 전체 16점 가운데 9점으로 가장 많다. 나전칠기의 가장 아름다운 대표작인 나전대모국화당초문(*넝쿨무늬) 염주합(사진) 역시 불교 의식용 제품이다. 이처럼 나전칠기는 당시 성행한 불교 문화와 밀접한 관련 속에서 제작됐다. 1272년(원종13) 원나라 황후가 대장경을 담기 위해 나전으로 장식된 상자를 요구하자, 고려는 전함조성도감(鈿函造成都監)을 설치한 것(『고려사』 권27 원종 13년 2월조)이 그 증거다(유홍준, 『유홍준의 한국미술사 강의2』, 2012년).
무늬 주변에 금속 선(線)을 넣는 기법은 고려 공예예술을 상징하는 기법이다. 금속공예에선 금속 표면에 무늬를 깊게 파낸 다음 가느다란 금실이나 은실을 메워 넣는 금(金) 입사(入絲), 은(銀) 입사 기법으로 나타난다. 도자공예에선 도자기 표면에 문양을 새기고 그 속에 검정·빨강·하양의 흙을 메운 뒤 구워 특유의 문양을 드러내는 상감기법으로 구현됐다. 고려의 나전칠기는 이같이 오랜 세월 동안 축적된 칠공예 기술에다 조개를 잘게 썰어 아름다운 문양을 새겨 넣는 정교한 나전 기술의 결합을 통해 탄생한 명품이다.
“(고려에서) 그릇에 옻칠하는 기술은 정교하지 못하지만, 나전 기술은 세밀하여 귀하다고 할 수 있다”(地少金銀 而多銅 器用漆作不甚工 而螺鈿之工 細密可貴)(『고려도경』(1123년) 권23 토산조).
고려에 온 송나라 사신 서긍은 위 기록과 같이 칠공예와 나전 기술을 분리해 평가했다. 실제로 고려는 왕실의 기물을 관장하던 관청 중상서(中尙署)에 나전장(螺鈿匠)과 칠장(漆匠)을 분리시켜 관리했다(『고려사』 권80 식화지). 서긍은 또한 고려에선 칠공예보다 나전 기술이 더 발달했다고 했다. 그의 지적은 사실 중국에 비해 화려하게 옻칠을 사용하지 않은 것을 지적한 데 불과하다. 실제로 그는 고려에서 옻칠공예가 성행한 사실을 같은 책 『고려도경』에 기록하고 있다. 즉 ‘쟁반과 소반은 모두 나무로 만들어 옻칠을 했으며’(『고려도경』 권33 궤식(饋食)조), ‘왕과 관료들이 사용한 붉은 칠을 한 소반(丹漆俎)을 사신에게도 사용했다’(권28 단칠(丹漆)조)고 했다. 당시 식생활 전반에 쟁반·소반 등 칠공예 제품이 널리 쓰였다는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
나전국화문경함. [사진 일본 도쿄국립박물관]
원 왕실도 옻칠과 匠人 보내달라 요구
목재 제품에 옻칠을 하면 방수 효과와 함께 쉽게 부패되거나 썩는 것을 예방하고 그릇의 아름다운 모양을 유지할 수 있다. 그래서 옻칠공예는 목기(木器)에 주로 활용되었다. 이규보 역시 다음 기록과 같이 술병에 옻칠을 하여 사용했다.
“박으로 병을 만들어 술 담는 데 사용한다(自瓠就壺 貯酒是資). 목은 길고 배는 불룩하여, 막히지도 않고 넘치지도 않는다(頸長腹枵 不咽不歌). 그래서 내가 보배로 여겨, 옻칠을 하여 광채 나게 했다(我故寶之 漆以光之)”(『동국이상국집』 권19 잡저 칠호(漆壺)).
우리나라에서 옻칠 기술은 청동기 시대 이후 유물에서 칠 제품이 출토될 정도로 일찍부터 발달돼왔다. 신라 때는 옻칠 공예를 전담한 부서인 칠전(漆典)이 있었다. 또 그릇에 칠을 해 장식한다는 뜻으로 식기방(飾器房)이라 했다(『삼국사기』 권39 잡지). 앞서 언급했듯이 고려 때도 중앙관청에 칠장(漆匠)을 소속시켜 칠공예 제품을 생산하게 했을 정도로 옻칠공예가 성행했다. 전국에 닥나무(楮), 잣나무(栢), 배나무(梨), 대추나무(棗) 등과 함께 옻나무(漆)를 심게 해 옻을 계획적으로 생산했다(『고려사』 권79 식화지 명종 18년(1188) 3월조). 그래선지 일찍부터 옻칠의 품질과 제작 기술이 뛰어났다.
“묵구(墨狗) 등 7명이 원나라에 금칠(金漆)을 보내라는 황제의 명령서를 갖고 왔다. 국왕(*원종)은 ‘우리나라가 비축한 금칠은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환도할 때 모두 없어졌고, 생산지인 남쪽 섬은 요즘 역적(*삼별초 군대)이 왕래하는 곳이 되었습니다. 틈을 타 생산해 보내겠으며, 우선 갖고 있는 열 항아리를 보냅니다. 옻칠의 액을 짜는 장인은 직접 생산지에서 징발하여 보내겠습니다’라고 보고했다”(『고려사』 권27 원종 12년(1271) 6월조).
원나라가 고려의 옻 품질이 뛰어나고 그것이 많이 생산된다는 사실을 알고 옻칠과 함께 장인을 함께 보내줄 것을 요구한 기록이다. 개경 환도 직후 옻칠이 많이 생산된 남쪽 섬 지역이 삼별초 군대에 점령되어 제대로 생산될 수 없었던 사정도 알려준다. 고려는 위 기록대로 삼별초 난이 진압된 2년 후인 1276년(충렬왕2) 원나라에 황칠(黃漆)을 공납했다.
원나라가 요구한 금칠은 황칠의 다른 이름이다. 원래 칠에는 옻칠과 황칠 두 가지가 있다. 옻칠은 옻나무에서 채취한 짙은 적갈색 진액이다. 지금도 많이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고려시대 옻은 황칠나무에서 주로 채취한 황금 색깔의 진액이다. 서긍도 당시 ‘나주지역에 황칠이 많이 생산되어 왕실에 공납되었다’라고 기록했다(『고려도경』 권23 토산조). 조선 후기에 이수광은 ‘고려의 황칠은 섬에서 생산되는데, 6월에 채취하였다’(『지봉유설』 권19)라고 전한다. 황칠은 부와 권력의 상징인 노란색을 띠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며, 또한 금 색깔과 같다고 해서 금칠이라 불렀던 것이다. 두릅나무과에 속하는 황칠나무는 남해안과 일대 섬에서 자라는 우리나라 토종의 늘 푸른 넓은잎나무다. 금빛을 띠면서 나뭇결을 살려내는 화려한 맛이 있어 왕실 등에서 선호했다(박상진, 『역사가 새겨진 나무이야기』, 2004).
기병用 말 안장·언치도 나전으로 장식
서긍은 앞에서 본 것처럼 “고려의 나전 기술은 세밀하여 귀하다”고 극찬했다. 현재 남아 있는 고려 나전 제품은 모두 목재제품을 이용한 것인데, 서긍이 극찬한 나전은 다른 제품이었다. 즉 그는 ‘기병이 사용하는 안장과 언치(안장 깔개)는 매우 정교하며 나전으로 장식하였다(騎兵所乘鞍韉極精巧 螺鈿爲鞍)’(『고려도경』 권15 기병마(騎兵馬)조)라고 말해 말 안장에 새겨진 나전 기술을 높이 평가했다.
1080년(문종34) 7월 고려는 송나라에 나전으로 장식한 수레(螺鈿裝車) 1대를 조공했다(『고려사』 권9, 1243년(고종32). 무신정권의 권력자 최이는 왕실 사람과 재추(*고위관료)에게 잔치를 베풀었는데, 커다란 그릇을 나전으로 장식했다고 한다(『고려사』 권129 최이 열전). 즉 나전 기술은 목재 제품뿐 아니라 가죽 수레와 그릇 등 다양한 제품에도 적용되었던 것이다. 나전은 선물용으로 주로 사용되었다. 예종 때 문신 문공인(文公仁·?∼1137)은 거란에 사신으로 가서 나전 그릇을 선물로 많이 주었는데, 이후 거란의 사신이 고려에 오면 항상 나전 그릇을 요구하는 폐단을 낳았다고 한다(『고려사』 권125 문공인 열전). 고려에서 나전 제품이 많이 유통되고 외국에까지 널리 이름을 떨쳤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나전 기술 역시 칠공예 기술과 함께 발달된 것이다.
나전칠기는 이같이 칠공예 기술과 나전 기술이 함께 발달해야 생산될 수 있다. 어느 한쪽 기술만 발달하면 명품이 나올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제작된 제품이 송·거란·원나라 등으로부터 호평을 받았던 것은 당시 공예 기술이 높은 수준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술은 다른 분야에도 영향을 끼쳐 상감청자·고려지(高麗紙)·대장경을 명품의 반열에 올려놓게 했다. 이 점에서 고려왕조는 진정한 문화·기술의 강국이었다. 이외에도 고려선(高麗船)·금속활자·불화(佛畵) 등 수준 높은 명품 문화재를 낳게 했다.
또한 고려의 나전기술은 중국과 달랐다. 당나라의 나전은 자단(紫檀·동남아 등지에서 식생한 나무)과 같이 단단하고 무늬가 아름다운 나무에 바로 나전을 새겨 넣었다. 그래서 목지나전(木地螺鈿)이라 한다. 반면에 고려의 경우 경전·염주 등을 담는 나무상자에 굵은 삼베를 바르고 옻칠을 한다. 그 위에 잘게 썬 나전을 새겨 넣은 후 다시 옻칠을 덧입힌다. 그런 후 나전 무늬에 덮인 칠을 벗겨내고 광 내기 과정을 거쳐 제품이 생산됐다. 이렇게 나전 기술과 칠공예 기술이 결합돼 나전칠기라고 했다.
두 가지 기술의 융합으로 제작된 나전칠기는 제작기법상 세 가지 특징을 갖는다. 첫째, 1㎝ 이내로 자른 조개 조각으로 무늬를 엮는다. 이를 절문(截文·끊음질 무늬)이라 한다. 이 과정에서 흰빛에 일곱 가지 색이 어른거리는 조개 특유의 색깔이 드러난다. 둘째, 바다거북 등딱지인 대모(玳瑁)의 뒷면을 채색해 나전과 함께 그릇 표면에 무늬를 놓는다. 조개와 붉은빛으로 채색된 대모의 색깔이 어울려 환상적인 색감을 보여준다. 셋째, 잘게 쪼갠 자개들을 정교하게 새긴 꽃이나 넝쿨무늬 주변에 은(銀)·동(銅)으로 꼰 가느다란 금속선을 둘러 꽃줄기와 넝쿨을 명확하게 드러냄으로써 무늬 구성에 디자인적 질서를 부여한다. 고려 나전칠기의 화려하면서도 전아(典雅)한 멋은 이 세 가지 기술이 결합된 무늬의 아름다움에 있다.
하지만 나전칠기의 수요가 많아져 대모를 조달하기 힘들어지자 대모 장식은 점차 사라진다. 초기 작품(11~12세기)에 대모의 장식이 많이 나타나는데, 현재 전해지는 나전칠기의 종류는 주로 불교 의식과 관련된 제품이다. 대장경 등을 담는 나전경함(經函)이 전체 16점 가운데 9점으로 가장 많다. 나전칠기의 가장 아름다운 대표작인 나전대모국화당초문(*넝쿨무늬) 염주합(사진) 역시 불교 의식용 제품이다. 이처럼 나전칠기는 당시 성행한 불교 문화와 밀접한 관련 속에서 제작됐다. 1272년(원종13) 원나라 황후가 대장경을 담기 위해 나전으로 장식된 상자를 요구하자, 고려는 전함조성도감(鈿函造成都監)을 설치한 것(『고려사』 권27 원종 13년 2월조)이 그 증거다(유홍준, 『유홍준의 한국미술사 강의2』, 2012년).
무늬 주변에 금속 선(線)을 넣는 기법은 고려 공예예술을 상징하는 기법이다. 금속공예에선 금속 표면에 무늬를 깊게 파낸 다음 가느다란 금실이나 은실을 메워 넣는 금(金) 입사(入絲), 은(銀) 입사 기법으로 나타난다. 도자공예에선 도자기 표면에 문양을 새기고 그 속에 검정·빨강·하양의 흙을 메운 뒤 구워 특유의 문양을 드러내는 상감기법으로 구현됐다. 고려의 나전칠기는 이같이 오랜 세월 동안 축적된 칠공예 기술에다 조개를 잘게 썰어 아름다운 문양을 새겨 넣는 정교한 나전 기술의 결합을 통해 탄생한 명품이다.
“(고려에서) 그릇에 옻칠하는 기술은 정교하지 못하지만, 나전 기술은 세밀하여 귀하다고 할 수 있다”(地少金銀 而多銅 器用漆作不甚工 而螺鈿之工 細密可貴)(『고려도경』(1123년) 권23 토산조).
고려에 온 송나라 사신 서긍은 위 기록과 같이 칠공예와 나전 기술을 분리해 평가했다. 실제로 고려는 왕실의 기물을 관장하던 관청 중상서(中尙署)에 나전장(螺鈿匠)과 칠장(漆匠)을 분리시켜 관리했다(『고려사』 권80 식화지). 서긍은 또한 고려에선 칠공예보다 나전 기술이 더 발달했다고 했다. 그의 지적은 사실 중국에 비해 화려하게 옻칠을 사용하지 않은 것을 지적한 데 불과하다. 실제로 그는 고려에서 옻칠공예가 성행한 사실을 같은 책 『고려도경』에 기록하고 있다. 즉 ‘쟁반과 소반은 모두 나무로 만들어 옻칠을 했으며’(『고려도경』 권33 궤식(饋食)조), ‘왕과 관료들이 사용한 붉은 칠을 한 소반(丹漆俎)을 사신에게도 사용했다’(권28 단칠(丹漆)조)고 했다. 당시 식생활 전반에 쟁반·소반 등 칠공예 제품이 널리 쓰였다는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
목재 제품에 옻칠을 하면 방수 효과와 함께 쉽게 부패되거나 썩는 것을 예방하고 그릇의 아름다운 모양을 유지할 수 있다. 그래서 옻칠공예는 목기(木器)에 주로 활용되었다. 이규보 역시 다음 기록과 같이 술병에 옻칠을 하여 사용했다.
“박으로 병을 만들어 술 담는 데 사용한다(自瓠就壺 貯酒是資). 목은 길고 배는 불룩하여, 막히지도 않고 넘치지도 않는다(頸長腹枵 不咽不歌). 그래서 내가 보배로 여겨, 옻칠을 하여 광채 나게 했다(我故寶之 漆以光之)”(『동국이상국집』 권19 잡저 칠호(漆壺)).
우리나라에서 옻칠 기술은 청동기 시대 이후 유물에서 칠 제품이 출토될 정도로 일찍부터 발달돼왔다. 신라 때는 옻칠 공예를 전담한 부서인 칠전(漆典)이 있었다. 또 그릇에 칠을 해 장식한다는 뜻으로 식기방(飾器房)이라 했다(『삼국사기』 권39 잡지). 앞서 언급했듯이 고려 때도 중앙관청에 칠장(漆匠)을 소속시켜 칠공예 제품을 생산하게 했을 정도로 옻칠공예가 성행했다. 전국에 닥나무(楮), 잣나무(栢), 배나무(梨), 대추나무(棗) 등과 함께 옻나무(漆)를 심게 해 옻을 계획적으로 생산했다(『고려사』 권79 식화지 명종 18년(1188) 3월조). 그래선지 일찍부터 옻칠의 품질과 제작 기술이 뛰어났다.
“묵구(墨狗) 등 7명이 원나라에 금칠(金漆)을 보내라는 황제의 명령서를 갖고 왔다. 국왕(*원종)은 ‘우리나라가 비축한 금칠은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환도할 때 모두 없어졌고, 생산지인 남쪽 섬은 요즘 역적(*삼별초 군대)이 왕래하는 곳이 되었습니다. 틈을 타 생산해 보내겠으며, 우선 갖고 있는 열 항아리를 보냅니다. 옻칠의 액을 짜는 장인은 직접 생산지에서 징발하여 보내겠습니다’라고 보고했다”(『고려사』 권27 원종 12년(1271) 6월조).
원나라가 고려의 옻 품질이 뛰어나고 그것이 많이 생산된다는 사실을 알고 옻칠과 함께 장인을 함께 보내줄 것을 요구한 기록이다. 개경 환도 직후 옻칠이 많이 생산된 남쪽 섬 지역이 삼별초 군대에 점령되어 제대로 생산될 수 없었던 사정도 알려준다. 고려는 위 기록대로 삼별초 난이 진압된 2년 후인 1276년(충렬왕2) 원나라에 황칠(黃漆)을 공납했다.
원나라가 요구한 금칠은 황칠의 다른 이름이다. 원래 칠에는 옻칠과 황칠 두 가지가 있다. 옻칠은 옻나무에서 채취한 짙은 적갈색 진액이다. 지금도 많이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고려시대 옻은 황칠나무에서 주로 채취한 황금 색깔의 진액이다. 서긍도 당시 ‘나주지역에 황칠이 많이 생산되어 왕실에 공납되었다’라고 기록했다(『고려도경』 권23 토산조). 조선 후기에 이수광은 ‘고려의 황칠은 섬에서 생산되는데, 6월에 채취하였다’(『지봉유설』 권19)라고 전한다. 황칠은 부와 권력의 상징인 노란색을 띠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며, 또한 금 색깔과 같다고 해서 금칠이라 불렀던 것이다. 두릅나무과에 속하는 황칠나무는 남해안과 일대 섬에서 자라는 우리나라 토종의 늘 푸른 넓은잎나무다. 금빛을 띠면서 나뭇결을 살려내는 화려한 맛이 있어 왕실 등에서 선호했다(박상진, 『역사가 새겨진 나무이야기』, 2004).
기병用 말 안장·언치도 나전으로 장식
서긍은 앞에서 본 것처럼 “고려의 나전 기술은 세밀하여 귀하다”고 극찬했다. 현재 남아 있는 고려 나전 제품은 모두 목재제품을 이용한 것인데, 서긍이 극찬한 나전은 다른 제품이었다. 즉 그는 ‘기병이 사용하는 안장과 언치(안장 깔개)는 매우 정교하며 나전으로 장식하였다(騎兵所乘鞍韉極精巧 螺鈿爲鞍)’(『고려도경』 권15 기병마(騎兵馬)조)라고 말해 말 안장에 새겨진 나전 기술을 높이 평가했다.
1080년(문종34) 7월 고려는 송나라에 나전으로 장식한 수레(螺鈿裝車) 1대를 조공했다(『고려사』 권9, 1243년(고종32). 무신정권의 권력자 최이는 왕실 사람과 재추(*고위관료)에게 잔치를 베풀었는데, 커다란 그릇을 나전으로 장식했다고 한다(『고려사』 권129 최이 열전). 즉 나전 기술은 목재 제품뿐 아니라 가죽 수레와 그릇 등 다양한 제품에도 적용되었던 것이다. 나전은 선물용으로 주로 사용되었다. 예종 때 문신 문공인(文公仁·?∼1137)은 거란에 사신으로 가서 나전 그릇을 선물로 많이 주었는데, 이후 거란의 사신이 고려에 오면 항상 나전 그릇을 요구하는 폐단을 낳았다고 한다(『고려사』 권125 문공인 열전). 고려에서 나전 제품이 많이 유통되고 외국에까지 널리 이름을 떨쳤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나전 기술 역시 칠공예 기술과 함께 발달된 것이다.
나전칠기는 이같이 칠공예 기술과 나전 기술이 함께 발달해야 생산될 수 있다. 어느 한쪽 기술만 발달하면 명품이 나올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제작된 제품이 송·거란·원나라 등으로부터 호평을 받았던 것은 당시 공예 기술이 높은 수준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술은 다른 분야에도 영향을 끼쳐 상감청자·고려지(高麗紙)·대장경을 명품의 반열에 올려놓게 했다. 이 점에서 고려왕조는 진정한 문화·기술의 강국이었다. 이외에도 고려선(高麗船)·금속활자·불화(佛畵) 등 수준 높은 명품 문화재를 낳게 했다.
깎고 다듬고 칠하고, 이게 바로 채화칠기
기사입력 2010-03-05 19:05
[오마이뉴스 김범태 기자]
영롱한 옥빛 바탕에 수십 마리 나비떼가 하늘하늘 춤추며 유영하고, 현기증이 날 정도로 화려한 꽃잎은 수줍은 미소를 한껏 머금은 채 장롱에 내려앉았다.깊이 있는 푸르스름한 청색 배경에 어디서 날아왔는지 여러 마리의 학이 유유히 날갯짓하며, 흰 구름 사이를 노닌다. 손잡이만 없었더라면 마치 한 폭의 벽화를 보는 듯한 착각에서 한동안 헤어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채화칠기(彩畵漆器) 장인 이석구씨의 작품 '화접도'와 '운학도'를 마주하고 받은 느낌이다. 모두 가로 4.2m, 세로 2m의 14자가 넘는 대형 장롱이다. 문갑에 그려진 선홍빛 매화는 금방이라도 꽃망울을 터트릴 듯 생생하다. 이내 카메라에 담아보지만 그 고유의 색감이 디테일하게 살지 않아 안타깝다. 이렇듯 오색찬란하면서도 단아한 채화칠기는 이석구씨가 우리 고유 전통공예작품의 '잃어버린' 빛깔을 찾으려는 평생의 노력이 결실을 맺으면서 재현되었다.채화칠기는 목기에 옻칠을 수십 번 한 후에 옻에 여러 가지 안료를 배합하여 다양한 색과 문양을 그려 넣는 우리 민족의 전통공예기법.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나전칠기의 제작기법을 토대로 하되 작업 과정이 다르다. 특히 옻칠에 천연안료를 써 색을 내는 과정이 힘들다.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옻 산지인 우리나라는 삼국시대부터 옻칠과 채색 안료를 이용한 칠기 공예품을 사용해왔다. 특히 신라칠기는 중국과 아라비아의 인기 수출품이었고, 조선시대에도 채화칠기는 우리 생활과 밀접한 관련을 맺으면서 다양하게 제작되어 왔다고 한다.하지만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검은색 일변도의 나전칠기가 우리 칠기공예를 대표하게 되었다. 일제치하에서 많은 나전칠기 장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고, 국내에 있던 장인들도 조선총독부 산하 이왕직미술품제작소에 소속되어 일본식 나전칠기 기법만을 전수받게 된 것. 때문에 한동안 우리 주변에서 전통 채화칠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어느 누구로부터 고유의 기법을 배울 수도 없었다. 그사이 천편일률적인 나전기법은 화려한 디자인과 색상을 앞세운 수입가구에 밀려 쇠락하고 말았다.
그러던 중 나전칠기 장인이었던 이씨가 삼국시대부터 옻칠에 다양한 색을 넣은 품격 있는 채화칠기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했다. 그는 30여 년간 여러 문헌과 자료를 섭렵하며 채화칠기의 재창조를 위해 구슬땀을 흘렸다.하지만 단절된 역사와 문화를 복원하는 작업은 결코 쉽지 않았다. 맥이 끊긴 채화칠기를 복원하기 위해 수천 번의 실패를 거듭해야 했고, 아무도 시도하지 않는 길을 걸어야 했기에 주변으로부터 오해의 눈총도 받아야했다.그러던 중 각고의 노력 끝에 지난 1996년 '낙랑시대 전통 채화칠기 복원 계승 성공 발표회'를 통해 오방색을 기본으로 은은하면서도 자연스러운 우리 민족 고유의 색을 재현한 채화칠기를 세상에 내놓게 되었다.정양모 전 국립박물관장은 그의 작품을 보고 "혁신적"이라고 감탄하며 "마치 꽃밭에 들어가 있는 듯하다"고 놀라워했다. 생전의 김수환 추기경은 그가 만든 보석함을 로마 교황청에 부활절 선물로 보내기도 했다. 그의 작품은 지금도 몽골과 이란, 러시아 대통령 관저에 소장되어 있을 정도로 뛰어난 예술성을 인정받고 있다.이씨는 이와 함께 대한민국 현대미술대전 대상수상 작가전과 한·일 평화미술교류전시회, 한·중 상호교류전 등 국내외 많은 전시회를 통해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독특하고 아름다운 우리의 칠기문화를 소개했다.특히 프랑스 파리의 가람아트홀에서 열린 초대전과 미국 뉴욕에서 가진 부리지포드대학 초청전에서는 '파란눈'의 외국인들에게 영롱한 자개빛의 아름다움을 과시하기도 했다. 현지 언론은 "현대의 그 어떤 도료로도 따라올 수 없는 옻칠의 무한한 장점과 천연염료로 얻는 그의 채화 옻빛은 세월이 지날수록 은은함과 심오함을 더하여 한국을 대표하는 전통예술작품으로 손색이 없다"고 호평했다.그는 "채화칠기야말로 우리 민족의 미적 감각을 보여주는 최고의 전통이자 한국을 대표할 수 있는 문화작품"이라고 자신한다."인공색소나 안료가 아닌 천연안료와 옻으로만 색을 낸 가구는 채화칠기가 세계에서 유일합니다. 모든 것을 손으로 깎고, 다듬고, 칠하니 만드는 데만 수개월이 걸리죠. 특히 채화칠기의 신비로운 색은 작품을 완성한 바로 그 순간에 나타나지 않고, 최소 2~3년 정도가 걸립니다. 겉으로 색이 점점 우러나오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씨는 단지 전통의 복원에만 심혈을 기울이지 않는다. 오히려 전통(과거)과 창작(현대)의 미감이 조화를 이루고, 함께 호흡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또 현대인의 감성에 맞는 새롭고 독창적인 디자인을 창안하고, 과감하게 도전하는 것이 장인의 정신이라 생각한다.이 때문인지 그의 주변에는 장롱, 문갑, 화초장, 보석함 등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현대의 생활양식에 맞도록 재창조한 작품이 눈에 많이 띈다. 그러고 보니 화려하면서도 은은한 채화칠기의 멋스러움이 현대의 생활패턴에도 잘 어울릴 듯하다.그러나 근래 들어 이씨에게는 남모르는 걱정이 있다. 바로 채화칠기의 산업화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 일반화된 옹기나 도자기와는 상반된 모습이다. 일부에서는 이에 대해 "도자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남겨진 유물이 적은 까닭에, 한편으로는 칠공예 발전에 소홀한 탓에 칠기는 가장 낙후된 전통유산이 되었다"고 말한다.실상 칠공예는 가구뿐 아니라, 그릇, 의류, 목제품, 피혁물, 철기물, 제사, 장례, 건축 등 두루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실제로 일본의 경우 칠기그릇이 식생활용기 등으로 일반 가정집이나 음식점에서 상용화되어 있으며, 백화점에도 최고급 상품 중 하나로 판매되고 있다.이처럼 상업성은 추락되고 단순히 전통문화나 예술작품으로만 국한되어 인식되다보니 이를 배우겠다고 나서는 후계자도 없는 상황이다. 이러한 부실한 현실에서 가까스로 복원한 채화칠기의 역사가 또다시 단절되는 것 아닌지 걱정하는 것이 이씨의 또 다른 염려다.자국의 칠공예 발전을 방치하고 있는 정부의 무관심도 그에겐 서운한 대목이다. 전통을 이어가려는 젊은 세대의 도전이 지속될 수 있도록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게 그의 마음이다. 칠기에 입문한 지 올해로 46년째. 그는 오늘도 신비로운 색상이 돋보이는 옥색 배경에 섬세하면서도 화려한 꽃밭을 만들고, 십장생을 그리고, 나비를 춤추게 한다. 혼신을 다한 그의 모습에서 어떤 숭고한 역사의식과 사명감도 전해져 온다.하지만 우리의 고급문화가 어느새 천덕꾸러기가 되어 외면당하고 있는 현실에서 채화칠기 기법이 후손들에게 계속 이어지기를 바라는 장인의 주름은 더욱 깊게만 패어간다. 우리 민족의 색을 되살리려는 한 장인의 열정과 인내의 예술혼이 황혼에 다다른 그의 인생길에서 언제쯤 값진 열매로 맺힐 수 있을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