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

조영남 사례, 강자의 약자 지배가 문제다

부드러운힘 Kim hern SiK (Heon Sik) 2016. 5. 19. 09:38

가수 조영남이 지난 2015년 7월 10일 서울 강남구 청담동 자택에서 연합뉴스와 인터뷰를 하기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연합뉴스
조영남 대작 논란 여부 논란은 여러 프레임을 갖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조영남 개인에게만 초점을 맞춰 비난하는 것은 본질을 놓치는 것에 불과할 수 있다. 어떤 이들은 사기와 관행의 프레임으로 보기도 한다. 조영남 본인이 그리지 않았는데, 본인이 그린 것처럼 말하고 그것을 판매했다면 형법상 사기죄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관건은 그 그림을 사간 사람에게 있다는 것이다. 만약 구매를 한 사람이 조영남 본인이 온전히 그린 것으로 여겨 소장 가치 때문에 샀다면 사기에 해당한다는 것이 검찰의 입장이다.

이에 반박하는 이들은 관행이기 때문에 문제가 될 수 없다는 입장을 말한다. 이들은 미술계에서는 오래전부터 조수를 두고 그림을 분업하는 일이 많다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아이디어나 컨셉을 주고 나머지 부분은 다른 이들에게 대리 수행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따져봐야할 문제가 한둘이 아니다. 조영남 본인이 조수의 개념으로 화가에게 대가를 주었는지 여부다. 

현재 폭로 화가의 진술로 볼 때 조수의 개념으로 생각할 수 없어 보인다. 대개 조수는 도제식 시스템으로 운영을 하거나 공방에서 같은 협업 시스템에서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조영남 사례의 경우에는 이런 측면에서 바라 볼 수가 없어 보인다. 또한 외부에 아웃소싱하듯이 할 경우에는 장르적 특성도 생각해야 한다. 컨셉 예술 즉 개념 예술에서는 이렇게 컨셉이나 아이디어의 제공과 작품의 수행이 가능할 지 모른다. 

앤디 워홀의 경우에도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실제적인 실크스크린 작업은 다른 사람을 시키기도 했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기계적인 작업이다. 백남준의 작품들도 이러한 맥락에서 볼 수 있다. 아이디어에 따라서 텔레비전등을 연결하는 작업은 맡길 수 있다. 또한 설치미술같은 경우와 회화의 경우 다르게 봐야 한다. 일반 회화의 경우, 붓터치나 곡선 필치 그리고 농담까지도 그 작가의 작품을 분석하는데 중요할 수 있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다 예컨대 문학에서도 작가가 부르는 대로 적을 수는 있다. 그러는 한에서는 도움을 줄 수 있다. 아니면 그 이상을 넘어갈 때, 이름을 밝혀야 한다. 하지만 거의 대부분 이런 일은 하지 않는다. 유명한 작가가 다한 것처럼 나간다. 그것이 바로 업계 관행이라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런 관행이라는 말로 모든 것이 정당화되거나 합리화 될 수 없다. 만약 무조건 다른 이들에게 붓터치나 색칠을 시킨다면 궁극에는 자신의 작품인지 알아보지 못할 가능성도 많다. 

자신의 작품이 아닌데도 자신의 작품이라고 하는 것은 거꾸로 아이디어만 제공했을 뿐 그 다른 작업은 신경을 안썼기 때문일 수 있다. 조영남 사례에서는 당연히 어느정도 감독이나 지시를 했는 지가 중요하다. 영화에서도 감독이 모든 것을 다 하지는 않지만 감독 작품이라고 하듯이 말이다. 하지만 그림을 이렇게 볼 수 있을 지 여전히 의문인 것도 사실이다.

어떤 이들은 앤디 워홀도 자신의 작업실을 팩토리-공장이라고 했으며, 자신의 작품은 스스로 만들지 않는다고 말했던 점을 들어 조영남이나 업계의 관행을 옹호하기도 한다. 그러나 앤디워홀은 처음 부터 자신이 만들지 않았음을 공개했다. 하지만 조영남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많은 매체를 통해서 스스로 그린 것으로만 밝혔다. 또한 많은 미술 대가들이 그렇게 하지 않아왔다. 적어도 미술대가들이 그러한 방송 기회를 잡지 못한 것이 다른 점일 수 있겠다.

검찰이 예술계의 관행에 대해서 수사를 하는 것이 문화예술에 대한 개입이나 탄압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공권력이 판단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들이 가능한 것은 이번 사례가 창작의 영역이 어디까지냐를 두고 프레임을 형성했기 때문이다. 또한 관행이라는 점을 들어 미술계의 특성을 옹호하는 것이다. 미안하게도 이번 사례는 창작의 영역에 관한 것이 아니라 강자와 약자의 프레임으로 보는 것이 일정하게 필요하다. 그렇게 보지 않으면 미술계는 옹호할 수 있을 지 모르지만, 창작 내부의 음습한 모순은 그대로 온존하게 된다. 

애초에 폭로를 한 당사자가 그렇게 결심한 것은 부당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자신도 모름지기 화가인데 10만원을 받고, 그려준 그림이 조영남 그림으로 수백 수천으로 판매된다는 사실을 인지했을 때 분노를 했을지 모른다. 그렇게 된 까닭은 유명인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역학구조 때문에 발생한다. 더구나 조영남은 미술인이 아니라는 점을생각할 때 더욱 부당하게 생각했을지 모른다. 최근 많은 연예인 스타들이 그림에 도전하고 있는데, 이는 도전이 아니라 시작과 함께 주목을 받고 있기 때문에 부당하게 느낄 미술인들이 많아왔던 것이 사실이다. 

미술계는 몇몇 문화 권력자들이 좌지 우지한다. 그런 가운데 평생 그림을 그려도 주목한 번 받기 힘든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 가운데 생계를 위해 남의 작품을 뒷받침하는데 평생을 보내는 이들도 부지기수이다. 무명의 작가를 활용하는 것은 비단 조영남에게만 해당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조영남 사례와 달리 도제식 미술을 내걸고 자신이 하지 않은 결과물을 편취하는 일이 많다. 학생들을 시켜 작품을 만들고 그것을 자기 것으로 삼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공공미술관련 법에 따른 조형물의 의무설치는 그리 수많은 돈을 안겨주지만 정당하게 배분되지 않는다. 심지어 참여한 이들이 누구인지도 모른다.

만화계에서도 문하생이 돌리는 만화공장의 존재는 오래전 이야기가 아니다. 스토리 작가의 존재가 알려진 것도 얼마되지 않았다. 시나리오나 드라마 대본의 창작 공간에서도 많은 이들이 기여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때 이름없이 기여하고 존재감 조차 드러나지 않는 이들의 대부분은 청년들이다. 단지 육체적인 노동만이 아니라 참신한 기획과 아이디어, 컨셉을 제공하고도 그에 상응하는 인정조차 받지 못하는일이 너무 많다. 그야말로 열정페이 공화국인 셈이다. 그것이 바로 관행이라는 것이다. 이름있고 사회적 지위가 있는 강자가 무명의 지위가 없는 청년들의 열정을 페이 삼아 자산의 소유물로 삼는 사회가 정상일 리 없다.

조영남 사례는 비단 그 개인이 돈을 주고 그림을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삼아 판매 수익금을 남긴 것에만 그치지 않는다. 단지 그를 활용해 잘 이용했던 매체들을 질타하는 것만도 아니다. 연예인들 조차 그림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경매 시장의 활성화로 아트재테크가 버블을 일으켰기 때문인 것도 맞다. 미술이 먼저 존재해야 하는데 돈이 먼저 존재했다. 작품이 먼저인데 유명세가 먼저였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바라봐야하는 것은 작품 창작에 참여한 이들은 모두 공개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단지 업계 관행이라며 은폐해서 될 일이 아니다. 마치 영화의 마지막에 엔딩크레딧을 통해 스텝의 이름이 모두 올라가듯이 말이다. 작품에는 참여한 이들의 이름이 전부 기재되어야 한다. 그것이 저작권을 강조하는 창조경제시대의 흐름에 맞으며 문화예술 창작의 토대를 위해서도 바람직하다. 예술가들이 바라는 것은 돈 이전에 이름이라는 점을 생각하여야 한다. 강자가 약자의 착취를 통해 강자의 이익만을 챙기는 구조에서는 절대 창조경제도, 문화예술의 발전도 있을 수 없다. 

글/김헌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