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출생의 비밀은 막장 드라마를 대표하는 코드다. 어느덧 출생의 비밀만 등장하면 매체에서는 비판의 화살이 쏟아진다. 사람들이 많이 보는 드라마에는 흔히 출생의 비밀이 등장하지만 출생의 비밀 때문에 사람들이 드라마를 보는 것인지는 대체로 알 수 없다. 그런데 만약 출생의 비밀이 이렇게 많이 등장한다면 이유가 있을 것이다. 단지 욕하면서도 보는 길티 플레저(guilty pleasure)라는 관점으로만 볼 수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고고하고 품격 있는 문화적 기호를 강조하며 출생의 비밀이 들어 있는 콘텐츠에 눈길을 주는 시청자나 관객을 비난할 때, 그것은 누군가의 상처와 트라우마에 침을 뱉는 것인지도 모른다. 특히 40-60대 여성들이 즐겨 보는 주말, 일일, 아침드라마에는 이런 출생의 비밀이 여전하며 그런 행태에는 심리적 상처와 트라우마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선 출생의 비밀의 유형을 살펴보면,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것은 ‘왕자와 거지형’ 이다. 왕자와 거지 같이 신분이 뒤바뀌는 현상을 가리킨다. <오자룡이 간다>에서 주인공 오자룡은 서민집안의 자녀가 아니라 대기업 회장의 아들이었다. 열심히 살던 가난한 청년 오자룡은 대기업 후계자가 된다. 드라마에 등장하는 출생의 비밀 … 유형도 다양 <출생의 비밀>에서 기억을 잃은 채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평범하게 살던 이현(성유리)은 예가 그룹의 후계자이다. 이 드라마의 서사전개는 이현이 실질적인 후계자가 될 수 있을지에 초점이 맞춰진다. 이렇게 왕자 내지 공주가 거지가 되는 것은 입양의 유형으로 등장한다. <이순신이 간다>에서 이순신(아이유)은 입양되었고 원래 친어머니는 대스타 송미령(이미숙)이었다. 송미령은 미혼모였다. 미혼모인 경우에는 자신이 키울 수 없어 입양으로 시키거나 버리는 유형이 등장한다. | | | SBS '출생의 비밀' 화면캡처 | |
<남자가 사랑할 때>에서 이재희(연우진)는 아시아 스타의 회장 아들로 밝혀진다. 부잣집 여성이 미혼 중에 낳은 아들이라 다른 일반 가정집에 보내졌다. <원더풀 마마>에서 복희(배종옥)는 은옥(김청)에게 미혼상태에서 낳은 아이를 빼앗긴다. 복희는 아들을 그리워하며 자신의 재산을 오로지 단 한 명 그 아들 민수에게 증여한다는 유언을 남긴다. 또 출생의 비밀에는 미아형이 있다. 어떤 사건을 계기로 아이를 잃어버리는 유형이다. 재벌 집에서 아이를 잃어버렸는데 그 아이가 서민의 집에서 자란다. 출생의 비밀이 탄생하게 되는 또 하나의 유형은 씨앗 도둑질형이다. 이 말은 <백년의 유산>에서 박원숙(방영자 분)이 차화연(백설주 분)에게 한 말이다. 이는 아이가 없는 여성이 다른 집 아이를 훔쳐오는 유형이다. 백설주는 죽은 아이 대신 춘희의 아이와 바꿔친다. 그것은 산부인과에서만이 가능한 일이다. <넝쿨째 굴러온 당신>에서는 방귀남의 고모가 귀남이를 고아원에 버린다. 자신이 애를 낳지 못하는 것에 대한 억눌린 감정이 폭발한 것이다. 생존위협에서 떠나야 했던 유리왕과 같은 패턴은 없다. 이런 출생의 비밀은 극적인 긴장감이나 반전을 통해서 시청자의 몰입을 이끌어내기 위한 장치로 활용된다. 하지만 이는 식상한 소재로 평가 받은 지 오래다. 하지만 과연 이는 저급이나 고급의 문화적 품격과 관련이 있는 것일까? 즉 출생의 비밀이 등장하게 되면 무조건 막장이기 때문에 그런 출생의 비밀 코드가 없어야 좋은 드라마일까. | | | MBC '백년의 유산' 화면캡처 | |
영화 <스타워즈>에서 다스 베이더(Darth Vader)는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제다이 기사(루크 스카이워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가 너의 아버지다.’ 바로 출생의 비밀이다. 하지만 이 영화를 막장 영화라고 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출생의 비밀이라는 설정이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적용되고 있는가이다. 더 중요한 것은 왜 이러한 출생의 비밀에 사람들이 눈길을 주는가이다. 단지 극적인 긴장감이나 반전 효과 때문이거나 아니면 시청률을 높이기 위한 관습적인 설정이기 때문일까? 그것은 표면적인 양상이라고 밖에 생각이 들지 않는다. 왜냐하면 출생의 비밀에는 우리 한국인들의 무의식이 작용하게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출생의 비밀이 많은 이유 … 가문의 유지가 혈통을 통해 이뤄졌기 때문 한국에 출생의 비밀이 많은 것은 옛적부터 가문의 유지가 혈통을 통해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가문의 혈통 승계는 단순히 가문의 계승자가 되는 것, 즉 추상적인 명예직 소유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과 재산의 상속을 의미한다. 한편으로 계승자가 아닌 경우 권력과 재산의 상속에서 밀려나게 된다. 출생의 비밀 코드에는 이런 불합리함과 불안함의 의식이 반영되어 있다. 어떻게든 적통의 계승자가 되어야 한다. 요즘 드라마에서 출생의 비밀의 주인공은 가문이 아니라 재벌이나 대기업의 후계자이다. 이는 결국 자본주의 체제 속성을 말해주고 있다. 가문의 계승자이기를 원하던 욕망은 이제 대기업의 계승자이기를 원하는 욕망으로 변했다. 현재의 가난한 부모는 가짜다. 어딘가 진짜 부자 부모가 있겠다. 이런 설정에 오래 노출되는 경우, 우리 부모는 진짜 부모가 아니며 어딘가 진짜 부모가 있기를 바라는 인식을 만든다. 출생의 비밀이 나쁜 것은 바로 이런 의식을 확장시키기 때문이다. 부모에 대한 불만을 이런 금력과 지배 권력에 가치에 따라 만들어낸다. 여기에서 근본적으로 따져보아야 할 것은 한순간에 신분이 뒤바뀌는 현상이다. 신분이 바뀌는 것은 단지 서민층에서 대기업 가정 소속으로 단지 이동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서민 자녀로는 상상할 수 없는 경영권은 물론 많은 재산을 갖는 것을 의미한다. 경영권과 재산은 같이 묶여있기 마련이다. 만약 경영권은 물론 이고 재산상속이 혈통을 중심으로 승계되지 않는다면 이러한 출생의 비밀은 발을 들이지 못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경영권과 재산의 상속이 여전히 혈통승계로 이루어진다면 세속 출생의 비밀은 드라마나 영화에 단골로 등장할 것이다. 비교적 영화에서는 다양한 가족의 유형이 등장하고 있는 점은 시대적 변화를 암시하고 있다. 비혈연 가족이 늘어나고, 경영이나 재산상속이 비혈연적으로 이루어지는 사회일수록 이런 출생의 비밀은 설자리를 잃게 된다. | | | KBS '최고다 이순신' 화면캡처 | |
무엇보다 출생의 비밀이 많은 이유 가운데 하나는 결혼한 여성은 반드시 아이를 출산해야한다는 문화의식 때문이다. 만약 아이를 낳지 못하면, 여성이 아니라는 의식 때문에 아이를 훔쳐오거나 뒤바꾸는 사례가 일어난다. 여기에 남아선호사상도 한 몫 한다. 이는 비록 출산을 했거나 남아가 있는 여성들에게도 불안의식으로 작용한다. 즉, 아이를 잃어버리거나 뒤바뀔 수 있는 상황에 대한 불안의식이 작용하는 것이다. 만약 자식을 못 낳거나 자식이 있어도 그 자식이 진짜 자식이 아니라면 여성의 입지가 파괴되는 사회기제가 있을수록 또한 그러한 사회기제에 대한 직간접적인 경험이 있을수록 출생의 비밀 코드는 여전히 존립하게 된다. 물론 여성이 아이가 없을 수도 있는 것이며, 입양과 같은 다양한 가족 구성 방식이 용인되는 가족문화라면, 출생의 비밀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결혼한 여성은 반드시 아이를 출산해야 한다? 여전히 강력한 ‘남아선호’ 사상 결국 출생의 비밀코드가 통한다는 것은 아직도 우리 사회가 이런 혈통중심의 사고가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혈통중심의 사고가 존재하기 때문에 그러한 드라마를 보는 이들이 많다고 간주하는 것보다 그러한 의식 때문에 불안과 트라우마를 갖고 있는 이들이 많다고도 보아야 한다. 이들을 어떻게 위무해야 될까도 여전히 화두이다. 인위적으로 출생의 비밀 코드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좋은 드라마라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스타워즈의 다스 베이더(Darth Vader)와 같이 어떻게 어떤 내용으로 적용하는가가 중요하겠다. 대중문화 저널리즘은 출생의 비밀이 단지 막장 드라마 관점에서 무조건 비판하기 보다는 출생의 비밀이 우리 사회가 극복하거나 해결해야 할 화두와 관련이 있음을 강조해야 한다. 단적으로 대기업 부모가 등장하는 드라마가 많은 것은 자수성가할 수 없는 사회구조로 가고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양극화가 심해지고 지배층이 자기 혈연 안에서 그 축적된 자원을 승계하는 일이 지속될 경우 역설적으로 출생의 비밀을 다루는 드라마는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더 많아질 것이다. 그것은 대중욕망에 영합하는 것일 텐데, 과도기적으로는 출생의 비밀이 등장해도 오히려 부의 사회적 분배를 다루는 방향의 작품이 미디어에 자주 노출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나아가 출생의 비밀을 욕하기보다 혈연가족을 중심으로 자본을 소진(이른바 다 해먹음)시키는 사회문화제도 자체에 대한 비판이 더 나을 것이다. 40-60대가 그런 드라마를 많이 본다면 그들에게 가장 큰 고민이 가족과 혈통, 자녀의 계승 문제일 것이다. 이는 그 세대의 문제만이 아니라 앞으로 새로운 세대가 나이 들어감에 따라 여전히 그러한 고민을 하고 있는 의미일 수 있다. 여전히 계통은 혈연을 중심으로 이어지고 증여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재벌을 보라. 만약 재산을 사회에 기부하는 문화가 많고 전문경영인 문화가 자리 잡힌다면 출생의 비밀이 현재와 같지는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부모의 재산이나 지위에 관계없이 누구나 스스로 자수성가할 수 있는 사회경제구조를 만들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대기업의 지배력이 혈통을 중심으로 일반 상권까지 장악하는 상황에서는 불가능하다. 비판적 담론이 겨냥 할 곳은 단지 미디어 콘텐츠 속의 출생의 비밀이 아니라 이런 경제적 모순구조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