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전통속의 하이테크놀로지

묘지명

부드러운힘 Kim hern SiK (Heon Sik) 2014. 5. 8. 10:41
“『예기(禮記)』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묘지명은 조상의 이름을 알리는 것이다. 조상에게 아름다운 행적이 없으면서 칭찬하면 거짓(*誣)이다. 조상이 선한 일을 했는데 알리지 않는다면 밝지 못한 것(*不明)이다. 그것을 알고도 전하지 않으면 어질지 못한 것(*不仁)이다. 이 세 가지는 군자의 부끄러움이다. ‘부인은 행실이 아름답고, 여러 아들이 밝고 어질다. 이 세 가지 부끄러움과는 거리가 먼 것은 의심할 나위 없다. 그러므로 부인의 공과 행실을 모두 적어 무덤에 넣는다.”<김변(金賆) 처 허씨(許氏) 묘지명>

묘지명(墓誌銘)은 한 인물이 숨진 뒤 망자의 이름과 나이, 가계와 행적, 가족 및 장지(葬地) 등을 돌에 새겨 무덤 속에 시신과 함께 매장한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 유일하게 고려 때에만 성행한 기록문화 유산의 하나다.

묘지명(墓誌銘)의 ‘지(誌)’는 기록한다는 뜻이고 ‘명(銘)’은 이름(名)이라는 뜻이다. 즉, 덕(德)과 공(功)이 있어 세상에 이름을 남길 만한 사람이 숨지면 후손들이 그의 기록을 후대에 전하기 위해 만든 것이 묘지명이다. 고려청자와 고려지·대장경이 고려 장인(匠人)들의 혼이 담긴 명품이라면, 묘지명은 인간의 아름다운 혼을 기록으로 남기려는 고려 기록문화의 정수다. 명품 반열에 올려도 부족하지 않다.

중국서 받아들인 풍습 … 고려 때만 성행

묘지명은 망자(亡者)의 시신과 함께 지하에 매장됐다는 점에서 무덤 앞 지상에 세운 묘비명(墓碑銘)과 다르다. 또 묘비명이 조선 왕조 이후에 성행했다면, 묘지명은 고려 때에만 성행했던 기록문화인 점도 다르다. 그러나 망자의 일대기를 산문 형식으로 정리한 지문(誌文)과 그것을 주로 사언(四言) 형식의 운문(韻文:시)으로 압축한 명문(銘文)으로 구성된 점은 같다. 원류를 따지자면 묘지명은 묘비명에서 유래한 것이다.

묘비명은 중국 한나라 때 크게 발달했다. 그러나 205년 위나라의 조조(曹操)가 많은 인력과 비용이 소요되는 후장(厚葬*호화장례)의 폐단을 없애기 위해 지상에 비석을 세우는 것을 금지한다. 그 대신 소형 비석을 만들어 관과 함께 매장하는 풍습이 성행하면서 묘지명 문화가 발달하게 된다. 우리나라도 고려 시대엔 묘비명 제작을 엄격하게 제한했다. 고려에선 지상의 묘비명은 국왕의 허가를 받아야만 세울 수 있었다. 고려 때 제작된 것으로 현재까지 남아 있는 67점의 묘비명은 모두 왕명으로 제작됐다. 왕사와 국사를 역임했거나 그에 준하는 고승(高僧)들의 것이다. 일반인의 묘비명은 고려 말 권문세족인 염제신(廉悌臣:1304~1382년)과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李自春:1315~1361년)의 것만 남아 있다. 그 정도로 일반인의 묘비명 제작은 엄격한 규제를 받았던 것이다. 조선도 초기엔 2품 이상 관직을 지낸 인사에게만 묘비명 제작이 허용되었다. 그러나 조선 중기 이후 유교문화의 확산으로 조상 숭배 의식이 발달하고 가문의 위세를 과시하려는 욕구가 커지면서 화려하고 거대한 묘비명 제작이 보편화된다. 묘비명 금지 원칙이 무너진 것이다.

고려 중기의 문신 최루백의 부인 염경애(1100~1146)의 묘지명. 남편 최루백이 부인의 생애를 시와 산문으로 압축해 기록했다. [중앙포토]

고려 왕조 내내 묘지명 문화가 이어진 사실은 대단히 흥미롭다. 왜 고려 때 묘지명 문화가 발달했을까? 중국에서 묘지명 규격이 정형화되고, 제작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는 북위[선비족의 탁발부(拓跋部)가 중국 화북지역에 세운 왕조:386∼534] 때였다. 이후 수나라(581~618)와 당나라(618~907)에 이르기까지 약 600년간 묘지명 문화가 발달했다. 이는 당시 중국에서 성행한 귀족 문화의 영향과 관련이 있다. 고려 왕조는 건국 직후부터 당나라 제도를 모델로 정치·과거·군사제도를 개혁해 왕조의 격을 높이려고 노력했다. 묘지명 문화의 발달은 고려 왕조의 이런 개방정책과 맞물려 있다. 고려 묘지명은 중국 북위의 묘지명 형식과 매우 유사하다. 당나라와 송나라의 형식도 북위의 것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고려 묘지명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1024년(현종15)에 제작된 귀화인 채인범(蔡仁範:934~998년)의 묘지명이다.

“(채인범은) 송나라 천주(泉州) 사람이다. (중략) 970년(광종21) 고려에 와서 국왕을 뵈었다. (광종은 채인범을) 예빈성낭중(*5품)에 임명하고, 주택 한 채와 노비·토지를 하사했다. 또 그에게 필요한 물품을 모두 국가에서 공급하라고 명령했다. 공은 경전과 역사에 널리 통달하고, 문장을 잘 지어 임금을 보좌한 큰 재주를 품은 대학자였다.”(채인범 묘지명)

송나라 사람으로 경전과 역사에 달통했던 채인범이 광종의 발탁으로 관리가 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두 번째로 오래된 묘지명은 1045년(정종11)에 제작된 유지성(劉志誠:972~1039)의 것이다. 유지성 역시 송나라 양주(楊州) 출신으로, 성종 대에 고려에 귀화해 재상을 역임했다. 고려엔 이들보다 앞서 쌍기 등 많은 중국인들이 귀화해 관료로 활동했다. 이들이 고려에서 활동하다 숨지면서 묘지명을 만드는 장례풍습이 고려에 도입된 것이다. 대체로 11세기 무렵 묘지명 문화가 고려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다.

왕족·관료 부인 등 여성 묘지명 유독 많아

묘지명 문화가 고려에서 발달한 또 하나의 원인은 당시 지배층의 장례 풍습인 화장(火葬)과 관련이 있다. 화장 뒤 망자의 뼈를 수습해 작은 크기의 석관에 담아 지하에 매장했는데, 묘지명은 이런 작은 공간에 석관과 함께 매장하기에 적합한 소재였다. 조상 숭배와 가문의 위세를 드러내기 위해 망자의 생애를 화려하고 장황하게 서술한 묘비명과 달리 망자의 생애를 간략하게 서술한 묘지명이 화장식 장례에 더 적합했던 것이다.

“무덤에 지석(誌石:묘지명)이 있는 것은 오래되었다. 세대가 멀어지면 간혹 (무덤이) 허물어질 수 있지만, 그 지석을 살펴보면 그것이 누구의 무덤인가를 알게 되어 차마 덮어주지 않을 수 없다. 이에 사대부 군자가 그 어버이를 장례 지낼 때 지석을 만드는 것을 뒤로 미루지 않은 것이다.”(고려 후기 문신 이조년의 묘지명)

고려 초 세워진 홍법국사 실상탑비. [사진 문화재청]

뒷날 무덤이 훼손되더라도 매장된 지석으로 인해 주인을 찾을 수 있다는 데 묘지명의 효용성이 있다. 다만 묘지명은 지하에 묻히는 만큼 지상의 묘비명처럼 쉽게 수습할 수 없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지금까지 전해지는 묘지명은 많지 않다. 현재 확보된 고려시대 묘지명은 대부분 개발 혹은 자연재해로 인해 무덤이 훼손된 결과 드러난 것이다. 묘지명 문화가 가장 발달했던 중국 북위도 현재 400점 정도만이 전해지고 있다. 고려의 경우엔 현재 약 320점 정도 전해지고 있다. 이 수치는 중국에 비해 적지 않은 것으로 고려 때 묘지명 문화가 매우 성행했다는 증거다. 이 중 실물로 전해지는 묘지명은 200점이고, 나머지 120점은 묘지명을 작성한 사람의 문집 등에 기록으로 전해지는 것이다.

현존하는 고려 묘지명 가운데 승려의 것이 20점, 왕족의 것이 3점, 부인의 것이 34점이다. 나머지는 모두 일반 관료층의 묘지명이다. 반면에 일반 주민이나 지방 세력의 묘지명은 전무하다. 이 점에서 묘지명은 고려시대 관료층이나 중앙 지배층의 문화를 대변하는 유물이다. 특히 왕족과 관료의 부인 등 여성 묘지명이 많은 점도 또 다른 특징이다.

“을축년(1125년) 봄 나는 우정언 지제고(*임금의 잘못을 깨우치는 간관)가 되었다. (중략) 아내는 내게, ‘당신이 궁전에서 천자와 옳고 그른 것을 따지게 된다면, 비록 가시나무 비녀를 꽂고 무명치마를 입고, 삼태기를 이고 살게 되더라도 달게 여길 거예요’라고 말했다. 평범한 부녀자의 말 같지 않다. 병이 위독하여 세상을 떠났으니, 그 아쉬움은 말로 할 수 없다. (중략) 명(銘)하기를, ‘믿음으로 맹세하건대 당신을 결코 잊을 수 없으리라. 함께 묻히지 못함이 매우 애통하도다. 기러기 떼와 같은 아들딸들이 있어 부귀가 대대로 창성하리라’라고 했다.”(염경애(廉瓊愛) 의 묘지명)

남편 최루백(崔婁伯)이 사별한 아내 염경애(1100~1146년)의 내조와 희생을 기리며 직접 작성한 묘지명이다. 마지막 명문(銘文)에서 아내의 생애를 시로 압축하고 있다. 사별의 슬픔을 시의 형식을 빌려 문학적으로 승화시킨 명문은 죽음과 이별을 ‘여유와 관조의 미학’으로 받아들이는 고려 사람들의 생각이 담겨 있다.

인물사·가족사·사회사 연구에 귀한 자료

묘지명에 여성의 실명(實名)이 기록된 경우는 이 묘지명이 유일하다. 고려의 여성 묘지명에는 이 밖에도 출가한 딸이 홀어머니를 모시거나, 재혼한 여인이 전 남편의 자식을 교육시킨 모습 등이 기록돼 있다. 남자와 균등하게 재산을 상속받고, 호주도 될 수 있었던 고려 여성의 당당한 모습이 잘 담겨 있다. 조선 시대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묘지명은 인간의 출생과 사망, 가계와 출신, 관원의 이력, 가족 관계, 장례 관련자료 등이 기록되어 있어 고려 시대 인물사와 가족사·사회사 연구 자료로 학술적 가치를 지닌다.

묘지명 작성엔 일정한 양식이 있다. 북위의 묘지명에서 정착된 이 양식은 당나라와 송나라로 이어져, 명나라 때 이름 자, 성씨, 출신지(*鄕邑), 세계(世系:대대로 내려오는 계통이란 뜻으로 ‘族出’의 의미), 관력(官歷:관리로서의 경력이란 뜻으로 ‘行治’의 의미), 이력(履歷:학업·직업·경험 등의 내력), 사망일(*卒日), 나이(*壽年), 처(妻), 자식(子), 장일(葬日), 장지(葬地) 등 13항목으로 확정된다. (王行의 『묘명거례(墓銘擧例)』) 고려 문신들은 다가올 죽음 앞에서 지나온 삶을 뒤돌아보기 위해 스스로 묘지명(*自撰 묘지명)을 작성하기도 했다. 이를 통해 세속의 욕망을 절제하고 삶에서 ‘여유와 관조’를 맛보려 했다. 현대인들도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새로운 삶을 추구한다는 의미에서 ‘자찬 묘지명’을 작성해 보는 일도 나쁘진 않을 것이다.

박종기 국민대 교수 j9922@kookmi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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