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전통속의 하이테크놀로지

고려자기

부드러운힘 Kim hern SiK (Heon Sik) 2014. 3. 4. 15:43

고려자기




“도기의 빛깔이 푸른 것을 고려인은 비색(翡色)이라고 한다. 근래에 만드는 솜씨와 빛깔이 더욱 좋아졌다. 술그릇의 형상은 참외 같은데, 위에 작은 뚜껑이 있고 그 위에 연꽃에 엎드린 오리 모양이 있다.”(『고려도경』(1123년) 권32 도존(陶尊)편)

12세기 전반 고려를 찾았던 송나라 사신 서긍이 묘사한 고려청자의 모습이다. 박물관에 진열된 술병 형상의 고려청자 모습이 쉽게 연상될 만큼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청자의 종주국인 중국인의 눈에도 중국의 것과는 다른 독자적 제품으로 비칠 만큼 고려의 청자 제조술이 발달했음을 알려주는 기록이다. 서긍이 주목한 고려 독자의 제품은 비색 청자였다.

“건주(建州)의 차, 촉(蜀)의 비단, 정요(定窯)의 백자, 절강(浙江)의 차 등과 함께 고려비색(高麗翡色*비색청자)은 모두 천하제일이다. 다른 곳에서는 따라 하고자 해도 도저히 할 수 없는 것들이다.”(『수중금(袖中錦)』)

비색청자는 서긍뿐 아니라 송나라 사람들 대부분이 인정한, 고려의 높은 기술 수준이 반영된 제품이었다. 청자는 섭씨 1200도 이상의 고온에서 제작된다. 이 정도의 온도를 낼 수 있는 가마 시설에다 흙과 유약이 고온에서 융합돼 비취색이 감도는 특유의 색깔을 창출하는 제작 기술이 필요하다. 그 점에서 비색청자는 지금의 신소재 첨단제품이나 다름없었다. 서양에선 17세기에야 제작이 가능했다. 중국은 이미 9세기 무렵 청자를 생산했는데, 고려는 10세기 초 중국에서 기술을 수입해 만들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11세기 후반~12세기 초에 독자의 제작기술을 개발해 탄생한 게 비색 청자다.

서긍은 “(고려의) 그릇은 대부분 금으로 도금한 것을 썼고 혹은 은으로 된 것도 있으나 청도기(靑陶器)를 귀하게 여겼다”고 했다.(『고려도경』 권26 연례(燕禮)조)

고려청자를 대표하는 작품인 국보 제68호 청자상감운학문매병. 당당한 어깨와 유연한 곡선미가 특징이다. [사진 간송미술관]

12세기 초만 해도 고려 궁중의 연회에서 청자가 많이 사용되지는 않았던 것이다. 이보다 또 한 단계 도약된 기술로 제작된 것이 상감(象嵌)청자다. 12세기 중반부터 만들어졌는데, 이때부터 각종 형식의 고려청자가 대량으로 생산되기 시작한다. 서긍이 상감청자를 언급하지 않은 것은 12세기 전반까지 상감청자가 생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왕실의 정자 지붕까지 뒤덮은 청자

상감청자는 상감 기법으로 만들어진 청자다. 상감은 원하는 형태로 물건을 만든 뒤 표면에 무늬를 새기고, 흰색과 붉은 색 흙을 발라 굽는 기법이다. 단조로운 푸른색 대신 흰색과 검은색이 어우러져, 화려하고 장식적인 멋이 두드러진 고려청자의 백미다. 중국 기술을 모방하고 그 영향을 받아 생산된 ‘고려초기 청자’와 달리 고려의 독자 기술로 생산된 청자를 ‘고려중기(11세기 후반~13세기 중반) 청자’라 한다(장남원, 『고려중기 청자 연구』, 2006).

“(고려 18대 국왕 의종은) 민가 50여 구(區)를 헐어서 대평정(大平亭)을 짓고, 태자에게 명해 현판을 짓게 했다. 주위에 이름난 꽃과 특이한 과실수를 심은 뒤 진기하고 아름다운 물건들을 좌우에 진열했다. 정자 남쪽에는 못을 파고 관란정(觀瀾亭)을 지었다. 그 북쪽엔 양이정(養怡亭)을 지어 청자로 지붕을 이고, 남쪽엔 양화정(養和亭)을 지어 종려나무로 지붕을 이었다.”(『고려사』 권18 의종 11년(1157) 4월)

12세기 중엽 고려왕실이 지은 정자의 지붕을 청자로 덮었다는 기록이다. 정자인 ‘양이정’의 지붕을 인 청자기와는 현재 전남 강진과 전북 부안에서 많이 출토되고 있는데, 이 무렵 본격 생산된 것이다. 고려청자는 항아리·주전자· 대접·접시·잔·병 등의 식생활 용구, 촛대·향로 등의 제의(祭儀) 용구, 베개·상자·의자·벽돌·기와 등의 주거 용구, 연적·벼루·붓꽂이 등의 문방 용구에 이르기까지 의식주 전반에 걸쳐 다양하게 사용됐다. 특히 청자가 대량 생산돼 소비된 건 고려의 독자 기술로 상감청자가 제작된 12세기 중반 이후다. 하지만 고려청자가 실제로 어떻게 생산·유통·소비됐는지 알려주는 기록은 찾을 수 없다. 중국인 서긍이 비색 청자에 관한 기록을 남겼지만, 최고의 기술수준을 보여준 상감청자에 관한 기록을 찾을 수 없어 아쉬움이 더 크다.

그런데 지난 6월 26~30일 중국 항저우 저장대학에서 개최된 ‘고려청자 국제학술회의’(한국고등교육재단 지원)는 그런 아쉬움을 풀어준 기회였다. 한국·중국·일본의 고려청자 전공 학자들이 함께 모인 첫 학술회의인데, 제출된 논문만 무려 40여 편이나 됐다. 고려청자가 학술적으로 국제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준 회의였다. 세계적으로 고려사 일반을 전공하는 외국인 학자는 10명이 채 안 되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번 학술회의의 규모와 수준은 필자에게 놀라움과 부러움을 안겨주었다.

1 송 황실의 제기(제사 용기)로 사용된 청자 파편. 2 중국 닝보(寧波)에서 발굴된 청자 파편. 박종기

이번 자리에서 주목을 받은 것은 상감청자였다. 그 제작 기술과 유통이 주된 의제였다. 한국을 포함해 중국·일본 학자 대부분은 상감청자 제작 기술이 중국에서 유입됐다고 봤다. 초기 청자 제작 기술은 중국에서 수용된 게 맞다. 하지만 상감청자 제작 기술까지 그렇게 본 것에는 재고의 여지가 있다. 독자적인 기술은 스스로 나오지 않는다. 외부로부터 수용(모방)되고 변용(응용)과 창조의 단계를 거쳐야만 독자의 기술로 발전한다. 기술이 지닌 국제적 속성이다. 고려왕조 시절 국제 질서는 고려와 송나라·거란·금나라(여진)·일본 등이 다양하게 교류한 다원적인 사회였다. 고려는 송나라 외에 여러 국가의 교류했던 것이다. 더욱이 거란과의 전쟁이 끝난 1021년부터 50년간 고려는 송나라와 국교를 단절한다. 민간교류는 계속됐지만 국교 단절은 아무래도 새로운 기술의 수용과 교류에 제한을 주기 마련이다. 송과의 국교 단절 이후 고려의 공예기술은 거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고려에 항복한 거란 포로 수만 명 가운데 10명 중 1명은 기술자인데, 그 가운데 기술이 정교한 자를 뽑아 고려에 머물게 했다. 이들로 인해 고려의 그릇과 옷 제조 기술이 더욱 정교하게 되었다.”(『고려도경』 권19 ‘民庶 工技’ 조)

고려가 거란으로부터 도자기 등 그릇 제조 기술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려주는 기록이다. 상감 기술은 금속 제품과 나전칠기를 만들 때 금이나 은을 잘게 실 모양으로 꼬아 문양 주변에 테두리로 두르고, 그 속에 조개껍질 등을 박아 넣는 기술인 ‘입사(入絲)’에서 유래된 것이다. 입사는 거란의 전통적인 공예기법이다. 이처럼 상감기술은 고려가 처한 국제질서 속에서 거란의 기술과 관계를 맺고 있다. 송나라로부터 상감 기술이 일방적으로 수용됐다는 주장은 온당치 않다.

청자 종주국이 고려청자 역수입

고려청자 국제학술회의에서 또 하나 주목받은 것은 상감청자의 유통 문제였다. 송나라가 금나라에 쫓겨 수도를 항저우로 옮기면서 남송시대(1127~1279)가 시작된다. 상감청자는 남송시대인 12세기 중반 이후 제작되는데, 남송 이후 송과의 교류는 고려사 기록에 거의 나타나지 않아, 학계는 두 나라의 교류가 사실상 단절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런데 남송의 수도였던 항저우를 중심으로 상감청자를 비롯한 상당히 많은 고려청자가 발굴된 사실이 이번 회의에서 보고되었다. 상감청자의 완제품이 현재 베이징과 상하이는 물론 티베트 지역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주요 박물관에 전시돼 있다는 것이다. 또 일본에선 고려 초기부터 말기까지 생산된 청자가 나라 전역에서 발굴됐고, 상감청자를 포함한 많은 고려청자가 멀리 베트남·필리핀 등지에서도 발굴됐다는 사실도 보고됐다. 어떤 중국인 학자는 “중국은 남송 때 고려의 상감청자를 역수입하는 국가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이번 회의에 때맞춰 항저우에 있는 ‘중국 관요(官窯) 박물관’에서 고려청자 특별전이 열렸다. 남송 때 항저우 인근에서 발굴된 고려 상감청자편(*파편)이 대량으로 전시됐다. 특히 상감청자로 제작된 황실의 제의(祭儀)용 물품과 황제의 비(부인) 및 궁전의 명칭이 표면에 새겨진 상감청자편도 있었다. 상감청자가 송나라 황실에서 수입돼 사용된 사실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12세기 중반부터 제작된 상감청자가 남송은 물론 동아시아 일대에까지 대량으로 유통·소비된 사실은 기록상 나타나지 않은 고려의 활발했던 대외교류 실상을 확인시켜 준다. 고려의 명품 청자는 『고려사』 『고려도경』 등 몇 편에 불과한 빈약한 문헌기록의 공백을 메워주고 고려의 가려진 역사를 새로운 모습으로 복원하는 역할을 한 고려 문화의 아이콘인 셈이다.

박종기 국민대 교수 j9922@kookmi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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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우리 옛 도자기의 아름다움(2007)2,아름다운 우리 찻그릇(2011)
세계 정상의 화랑 혼치 오브 베니슨(런던)에서 최근 개인전을 연 작가 신미경은 비누로 전통 도자기를 재현한다. 비누로 만든 그녀의 달항아리는 대영박물관에 전시가 되기도 했다. 브뤼셀의 알민 레쉬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연 이수경은 깨진 도자기 파편을 금으로 이어붙인 작품으로 유럽에서 이름을 알렸다. 극사실주의 작가 고영훈은 창백한 석고 위에 조선조 청화백자를 담담히 그려냈다. 사진작가 구본창은 백자의 고운 결과 선을 에로틱하고 탐미적인 시선으로 찍어냈다. 

세계에서 주목받는 우리 현대미술 작가들의 든든한 배후에 우리 옛 도자기들이 있다. 오랫동안 우리 고미술을 아껴온 컬렉터 김명성 선생은 “음식을 먹을 때 1단계는 배고파서 먹고, 다음에는 맛있는 것 찾고, 그러나 마지막에는 원래 먹던 음식으로 돌아가는 법이다”라고 말한다. 그의 주장대로 현대미술 한다고 고미술을 몰라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며,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절대미감은 서로 통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한국인 미감의 원천인 고미술 중에서도 도자기는 “선사시대부터 한국인들이 살았던 삶의 현장 어디에서도 발견”된다. 이것들은 한낱 그릇이 아니라 “선사시대부터 오늘까지 한결같이 흐르는 큰 강물 같은 한국미의 흐름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명지대 윤용이 교수는 말한다. 한국 도자기를 꾸준히 연구해온 그의 저서 『우리 옛 도자기의 아름다움』(2007, 돌베개, 1만8000원)은 질그릇부터 시작해서 청자, 분청자, 백자로 이어지는 우리 도자기 전체를 다루고 있다. 최근 발간한 『아름다운 우리 찻그릇』(2011, 이른아침, 1만8000원)은 찻그릇을 중심으로 청자부터 백자까지 더욱 세분화된 영역을 다룬다. 

두 권의 책이 공통으로 다루는 고려청자, 분청자, 백자의 역사를 살펴보면 도자기는 중세 최고의 벤처사업이자 중요 국책 사업이었다. 전쟁으로까지 치달은 도자기 기술을 둘러싼 한·중·일의 갈등과 역사는 지금의 산업전쟁을 방불케 한다. 10세기 후반 고려 광종은 청자기술로 유명한 오월국의 장인들을 적극적으로 영입해 도자기 기술을 이 땅에 정착시키고자 노력한다. 고려의 왕들은 강진에 왕실용 가마를 설치하는 등 전폭적인 지원을 한다. 그 결과 12~13세기에 이르러 천하제일의 비색 청자와 세계 어떤 민족도 흉내 내지 못한 상감청자가 등장하며 청자의 황금기를 맞게 된다. 

고려청자의 완벽함과 이지적 세련미는 완숙한 고려 귀족사회의 미감을 배경으로 한다. 저자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고려 문장가 이규보의 ‘혁상인능파정기’를 인용한다. “실로 그들 고려인들의 상하에 일색으로 물들인 사상 감정은 바로 무상의 감이요, 허무의 감이다.” ‘살어리 살어리랏다 청산에 살어리랏다’로 시작되는 청산별곡을 부르며 세속의 혼란을 멀리하던 고려 귀족들의 세계에서 “청자는 그들의 파란 꽃”이었다. 고려청자와 불화는 고려가 세계 어떤 문화도 쉽게 도달하기 힘든 최고의 지점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세련되고 아름다운 문화를 가진 나라, 고려는 우리에게 ‘Korea’라는 이름을 주었다.

청자와 백자 사이에 존재하는 분청자는 정권의 변화, 취향의 변화를 보여준다. 고려 말 유학으로 무장한 신흥사대부들은 질박하고 검소한 실용품을 선호했다. 빠른 물레질의 흔적이나 유약의 자연스러운 흔적을 보여주는 분청자들은 과정을 작품화한다는 측면에서 매우 현대적이다. 수더분한 형태와 박진감 넘치는 문양에서 보여주는 “구애받을 것 없는 듯한 자유분방함과 숭늉 맛 같은 구수함과 익살스러움”이 매력이다. 그러나 고려청자보다 굳이 분청자를 한국미의 으뜸으로 꼽는 것은 일본학자 야나기 무네요시의 관점을 무비판적으로 따르는 것은 아니냐는 최근의 반론에도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겠다. 

3 ‘청자상감연화문주자 및 승반’고려 13세기 전반,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주자 높이 17㎝, 밑지름 7.8㎝, 승반 높이 6.8㎝, 밑지름 17.5㎝

15~16세기 전라도·경상도 지방에서 제작된 분청자는 일본에 전해져 사랑받았다. 그중 하나인 정호다완은 일본의 국보로 지정됐다. 한국 도자기에 대한 일본인들의 지나친 욕구가 초래한 것이 임진왜란이다. 일본인들이 ‘도자기 전쟁’이라 부르는 임진왜란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에 따라 남원, 김해, 웅천의 사기장들이 납치되고 수십 년간 쓸 백자토까지 약탈된다. 이 도자기들은 도자토와 기술, 기술자 등이 모두 조선의 것이고 불만 일본의 것이었기 때문에 ‘불뿐만’이란 뜻의 히바카리란 이름이 붙여진다.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일본의 도자사는 비약적으로 발전한다. 도자기 사업은 수출 일선에서 최고의 부가가치를 낳는 사업이었다. 명·청 교체기의 혼란으로 중국 도자기의 유럽 수출이 불가능해지자 일본 도자기가 각광을 받았다. 유럽에는 지금 100만 점이 넘는 일본 자기가 존재한다고 보고된다. 일본이 도자기 수출로 벌어들인 부가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의 도자는 내외적 혼란 속에도 자신만의 미감을 찾아냈다. 백자가 탄생한 것이다. 조선 초부터 왕실은 도자사업을 적극적으로 관리했으며 백자도 강력한 정부 지원을 통해 발전한다. 실학자 이규경의 말대로 흰색의 “청렴하고 결백함을 사랑”한 조선은 더욱 아름다운 흰색을 추구한다. 회백색 백자에 이어 17세기 말에는 유백색 백자가, 이어서 18세기 전반에는 마침내 고전적인 설백색을 띠는 백자가 등장한다. 설백색과 유백색 백자 달항아리의 등장으로 우리의 미감은 또 한번 세계적인 경지에 도달한다. 

완숙한 백자의 등장은 영·정조간의 부흥과 실학의 번성기와 맞물린다. “청자와 백자라는 우수한 문화의 발전은 민족의 자기 발견, 자주성의 확립과 관련 있다”고 저자는 힘주어 말한다.

일제강점기 우리 미술품 수집은 문화보국의 차원에서 행해진 애국운동의 하나였다. 한국미술사에서 잊지 못할 한 장면은 수수한 차림새로 도자기를 손으로 보듬으며 기뻐하는 간송 전형필의 사진이다. 이 사진은 도자기 감상법의 팁을 준다. 도자기란 다른 예술품과 달리 실용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옛 장인들은 손으로 만지는 촉각적인 감상을 충분히 고려해서 도자기를 만들었을 것이다. 그 결을 한 번이라도 만져봐야 완전히 이해할 테지만 유감스럽게도 우리에게 가능한 것은 책에 실린 도판이나 박물관 유리상자 속의 작품들을 눈으로 쓰다듬는 것뿐이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짜릿한 전율을 느낄 수 있다. 이 글을 읽은 독자들이 당장 윤용이의 책을 들고 박물관으로 달려가 도자기들을 눈으로 쓰다듬으며 우리 옛 미술의 아름다움에 취해보시길, 그리고 한국 미술의 아름다움을 현대적 언어로 번역하는 우리 작가들을 더 많이 아껴주시길. 

kmedichi@hanmail.net

이진숙 kmedichi@hanmail.net

<학술> "삼국시대, 혼전 성관계 관대히 용인"

(서울=연합) "삼국시대 性풍속은 자유분방했다. 결혼前의 남녀교제는 자유로웠고 특히 축제의 장은 청춘 남녀들에게 성적 교섭의 기회를 제공했다"

강봉룡 목포대 역사문화부 교수는 한국역사연구회 주최로 13-22일 서울 대우재단빌딩 3층 강연실에서 열리는 `삼국시대 생활 엿보기' 특강의 첫번째로 13일 <결혼과 性의 풍속>에 대해 강연한다.

강교수는 미리 배포한 강연요지에서 "삼국시대의 경우 `혼전섹스'는 사회적으로 관대하게 받아들여졌고 당사자들이 원한다면 결혼은 성사되는게 원칙이었다"라면서 "그러나 일단 결혼이 이뤄지면 `혼외정사'는 비교적 철저하게 규제받았다"고 전했다.

당시의 결혼형태에 대해서는 "남자가 여자집에 장가를 가서 사는 서옥제,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와 결혼하는 취수혼, 가까운 친척끼리도 결합하는 근친혼 등이 있었다"고 밝혔다.

강교수는 "남자가 장가를 가서 처가살이를 하는 것이나 결혼전에 성관계를 관대하게 용인했던 문화적 배경에는 多産에 대한 간절한 염원이 깔려 있다"고 분석했다.

한편 윤선태 서울대 강사는 21일 예정돼 있는 `신라의 유명 수출 브랜드'라는 주제로 강연을 한다.

배포된 강연요지에서 그는 "현재 우리나라는 심각한 對일본 무역역조를 보이고 있으나 1천2백년전 신라의 기술과 상품은 일본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면서 "당시 양국 관계는 좋지 않았지만 신라의 상품만은 일본인에게 `최고'로 통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신라의 수출품 가운데 가장 유명했던 鍮器(유기)는 일본에서 `신라'로 불리웠다"면서 "이는 중국 도자기에 흠뻑 빠진 영국인들이 도자기를 `차이나'로 호칭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신라제품의 우수함을 나타낸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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