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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징어 게임’은 왜

부드러운힘 Kim hern SiK (Heon Sik) 2021. 9. 23. 01:44

-‘오징어 게임’이 만들어 놓은 세계에 들어가고 싶을까.

 

아마도 이 드라마는 세상의 민낯을 드러내고 싶었을 것이다. 보통 상금을 내건 게임에는 겉으로 보기에 목숨을 내걸지는 않아 보인다. 456억의 상금. 그 액수를 볼 때 매혹을 시키기에 충분하다. 이 드라마에서 충격적인 것은 게임인데도 그 잔혹함이다. 게임에서 탈락하는 사람은 바로 총을 맞고 목숨을 잃기 때문이다. 더구나 단순한 게임에 불과한데 사람 목숨을 빼앗을 줄은 아무도 몰랐다. 어린 시절 즐기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와 같은 게임에서 술래에게 걸려도 다시 하면 되지만 드라마 '오징어 게임'에서는 바로 목숨이 끊어지고 화장된다. 어디에서 어떻게 목숨을 잃고 화장된지 가족에게 알려지지도 않고 세상에서 존재가 사라지고 만다. 학교 앞 추억의 달고나 뽑기 놀이에서 정해진 시간 안에 그림 모양 대로 오려내지 못하면 총살을 당한다.

 

참가자들이 처음에는 충격적인 게임에 혼란스럽다. 충격과 공포에 심지어 투표로 게임을 중단도 하게 된다. 하지만 그들은 다시 게임에 참여하게 되고 혹시 모를 상금에 대한 기대감으로 게임에 적응해 간다. 견물생심. 아니 그들에게 선택 사항은 없을 만큼 비참한 지경에 있기 때문에 적응할 수 밖에 없다. 돈이 눈앞에 쌓이는 것을 직접 봐서 그런다지만, 이렇게 위험한 게임 아니 도박에 나서는 것, 즉 목숨을 내놓는 것은 그만큼 사회로 돌아가도 불행과 고통이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게임은 공정하게 기회를 준다고 하지만 결국 한 사람이 상금을 차지하고 455명은 목숨을 잃고 만다.

 

사실 게임은 누군가 그것을 즐기는 용도에 불과하기 때문에 극적 효과를 노린다. 아마도 위기 상황에 빠지게 되면 얼마나 인간이 이기적인지 보여주려 한다. 세상에 아직도 사람이 선한 존재라고 철썩 같이 믿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싶다. 아니 정반대가 아닐까 많은 이들이 그렇게 생각할 듯 싶다. 추억의 달고나 뽑기에서는 자신의 노하우로 다른 이들을 살려내는 성기훈(이정재)의 모습을 보며 따뜻한 정서가 느껴진다. 혼자만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과 같이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개인적인 선한 영향력 만이 아니라 자신이 속한 집단도 현명하게 숙의 협력 할 수 있을 듯 싶다.

 

각 팀 집단이 줄다리기를 하며 생존을 모색하는 게임 라운드는 그래도 훈훈한 공동체성이 묻어난다. 그건 착각이라는 점이 곧 드러난다. 극적 재미를 주는데 사용되는 것에 불과해 그렇다. 구슬 치기 처럼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대결을 벌여야 한다. 그것은 함정의 극적 효과 였다. 앞에서 모두 단합해야 했고 이 때문에 가장 아끼는 사람이나 선호하는 이들을 선택했지만 그것은 죽고 아니면 살기. 즉 가장 좋아하거나 선호한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일이었다.

 

사실 이 게임은 참여자들이 매우 불리하다. 게임 라운드가 어떻게 진행될 지 전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팀을 짜거나 번호를 잘 선택해도 그것이 자신에게 어떻게 좋을 지 알 수 없다. 공정과 기회라는 말은 처음부터 허구에 불과하다. 더구나 게임판을 만든 이가 직접 플레이어가 되고 생존자에 영향을 미치는 것도 그렇다. 어쩌면 그것이 공정룰의 허구인 현실을 보여주는 것일 수 있다.

게임판의 운영자들은 말한다, 너희들은 말이라고. 성기훈(이정재)이 경마장에서 돈을 걸던 그말이 바로 자신이 된 셈이다. 여기에서 두 인물이 극단적으로 대비된다. 고교 졸업후 자동차 제조 회사에서 근무하다가 쫓겨난 성기훈(이정재),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증권 회사에서 잘 나간 투자 팀장 상우(박태수). 어린 시절 같이 오징어 게임을 하고 동네에서 놀던 그들은 학벌이나 육체 노동과 정신 노동, 제조업과 금융업의 차이가 대변된다. 머리보다는 인간미 넘치는 성기훈(이정재)이나 냉철하고 합리적인 상우(박태수)도 결국에는 자본이 많은 이들의 말에 불과하다.

 

사람이 죽을 때마다 투명 돼지 저금통에서는 몇억씩 적립이 되는 것은 나름 상징으로 보인다. 도박이거나 주식은 누군가 다른 이들의 피땀 어린 돈이 쌓여 있는 것들이다. 비단 도박이나 지식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누군가의 희생과 헌신의 대가로 살고 있다. 그것을 모르거나 알아도 모른체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저임금 중노동에 화학 물질에 노출되면서도 제품을 생산하는 이들의 덕분에 생활과 경제를 유지하고 있다. 가족 중에 한 명이 자신의 생명을 태우면서 만든 대가를 누리고 있는데 그것을 인식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다만 직접 총알에 목숨을 빼앗기는 장면이 직접 눈앞에 펼쳐지지 않을 뿐이다. 자발적 동의와 선택이 금융자본주의와 만나게 될 때 얼마나 파격적인 결말을 낳을 수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모든 것이 스스에게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는 듯 싶지만 그것은 그렇게 보일 뿐이다. 자기가 선택한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저항조차 아니 핑계조차 대지 못한다. 원혼이 되어 구천을 떠돌 수도 없다. 어쩌면 오징어 게임을 제일 반대하는 이들은 그들에게서 빚을 받아내야 하는 이들일 것이다. 아마도  빚쟁이들은 지구 끝까지 쫓아갈 이들은 많을 텐데 말이다. 

 

그래도 이 드라마에 묻고 싶은 게 있다.

 

부자들은 이 게임판에서 아무도 다치는 사람이 없다. 결국 을들 아니 병정에 해당하는 사람들만이 서로 아귀다툼을 하다가 생명을 잃고 불태워진다. 그들을 위해 아무도 슬픔을 표하지도 않고 사라진다. 그런데 이같은 일이 어디 드라마로 제작될 만큼 희소한 일이던가. 언제 어디서나 만연해 있기 때문에 애써 일깨워주지 않아도 민초들은몸으로 이미 알고 있다.

충격적인 다크 호스 캐릭터는 부자들과 가난한 사람들 공통점이 사는 게 재미가 없다고 했다. 그래서 재미 없어 하는 가난한 이들을 부자들이 게임의 판에 불러 들이는 것인가. 그들이 잘못의 벌을 받는 것이라면 한번에 일확천금을 가질 수 있다는 말에 흔들렸다는 점일 뿐. 그 때문에 목숨을 잃는다는 것 쉽게 동의는 할 수 없지만 세상의 또다른 메커니즘일 수 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아무리 어려워도 이런 게임에 참여하지는 않을 것이다. 스스로 존엄을 위해 극단적인 선택을 할 지 모른다. 이 게임이 성립하려 한다면 보통 이하의 사람들이 우글 거려야 하니 그 자체가 다양성을 포진 시킨 것 자체가 작위적이다. 게임의 성립 조건과 전제 변수가 틀린 것이다.

 

마지막으로 성기훈이 인간적인모습으로 임한다고 해서 그를 도와주는 존재가 있을리 없다는 것을 능히 알고도 남는다. 수많은 이들이 사라져간 그 자리에 성기훈에 개입한 것은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모를 리 없이 자기 모순에 빠질 수 밖에 없다.

 

글/김헌식(박사, 사회문화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