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

백호 신드롬과 호랑이 심리

부드러운힘 Kim hern SiK (Heon Sik) 2010. 1. 6. 08:06



하얀색의 옷은 때가 잘 탄다. 자주 빨래를 해야 한다. 노동과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 고대시기일수록 세탁시설이나 세탁도구가 발달하지 않았으므로 빨래를 자주 하는 것은 골칫거리다. 따라서 경제적 효용 관점에서 하얀색 옷은 배제되어야 한다. 차라리 염료를 개발해 빨래에 들어가는 노동과 시간, 비용을 절약하는 게 낫다.

하지만 거꾸로 하얀색은 때가 잘 타기 때문에 하얀색을 유지하는 것이 대단한 일이 된다. 계급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하얀색을 유지할 수 있는 시간과 노동, 사람을 부리는 지위와 부를 소유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선 민족이 하얀색을 숭상한 것은 단순히 염료 기술이나 옷감의 미발전에 따른 것은 아니다.

백사(白蛇)나 백호(白虎)가 선호되는 것도 이러한 하얀색의 의미 때문이다. 잡스럽고 더러움에 물들지 않은 고귀함 그 자체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사실 자연계에 하얀색 자체로 존재하는 사물은 그렇게 흔하지 않다. 오히려 하얀색은 각고의 노력 끝에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월하고 영험한 능력을 상징한다.

경인년 백호 신드롬은 하얀색은 물론 호랑이 자체에 대한 한국인들의 심리가 강화된 측면이 있겠다. 백호신드롬의 요체는 황금 돼지띠 같은 부자가 아니라 제도적 성공이다. 역술에서 이야기 하는 바는 경인년 태생의 아이가 한마디로 경제적 사회적 성공(권력자, 요직, 유망직 진출)을 할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한국인들이 호랑이라는 우월한 능력의 동물을 생각하면 이는 충분히 가늠도 되겠다. 호랑이는 힘-권능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중원의 사서들은 우리 민족이 호랑이를 가축 다루듯이 한다고 전한다. ´산신령과 호랑이´ 라는 민화가 조선 청화백자는 미국경매에서 60억원에 팔리기도 했는데, 산신령이 엉덩이를 만지고 있는 모습이 약간은 익살스럽기도 했다. 전통 설화속의 호랑이는 효를 실현하거나 보은을 하는 존재, 초능력을 가진 우월한 모습을 보이거나 선한 일을 베풀기도 한다. 때로는 매우 용맹하기도 하지만, 그 힘만 믿고 우둔하게 굴기도 하다가 사람에게 당하기도 한다.

왜 이런 이중적인 문화심리가 나타나는 것일까? 인간의 심리는 경외의 대상에 대한 선망의 심리도 있지만 그것을 조롱하고 비하면서 별것 아닌 존재로 만들어 정복하고 싶은 심리가 있다. 특히 인간을 해칠 수 있는 존재를 희화화 하는 것은 인간과 호랑이의 싸움이 극대화되어 인간에게 유리한 쪽으로 흐른 조선 후기에 이를수록 강화된다.

호랑이 캐릭터는 크게 선한 호랑이 유형과 악한 호랑이로 나누어볼 수 있을 것이다. 설화 속에서 호랑이는 변신을 자주 하는데, 그 변신을 통해 인간을 도와주었다. 호랑이가 자주 변신하는 사람은 승려였다. 여기에서 승려는 신비한 능력을 지니는 존재로 등장한다. 승려와 호랑이는 같은 점이 있다. 인가나 근처 야산에 살지 않는다. 속세에서 벗어나 깊은 산중에서 살기 때문에 둘은 모두 신비로운 존재로 여겨진다. 여인이나 산신령으로도 변신하는데 이는 모두 신비로움을 간직한 것존재들로 그 신비한 존재가 인간에게 우호적이라는 나르시시즘의 경향성도 담겨 있다.

산악지역이 많은 지역에서는 산을 숭상하고 그 속에 존재하는 동물도 같은 반열에 오르게 된다. 신비로운 산을 다스리는 존재가 있으며 인간보다 우월한 동물은 그러한 신 같은 존재가 되었다. 거친 산악지방에서 백수의 왕으로 군림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능력이 있어야 하니 호랑이는 자연스럽게 초월적인 능력을 지닌 존재로 승격된다. 우월한 동물은 신앙의 대상이 되고 그래서 호랑이를 산신, 산군, 산군자 산령이라고 불렀다. <동이전> ‘예(濊)조’에 범에게 제사를 지내고, 신으로 섬긴다는 대목이 있다. <오주연문장산고>에도 호랑이를 산군으로 모시고 도당제를 올렸다고 했다.

들과 늪, 강이 많은 한족의 중원과 달리 동이족의 요하 동쪽은 산악지역이 많다. 중원의 사람들이 용(龍)을 신앙으로 삼았지만, 동이족들은 산악의 제왕인 호랑이(虎)를 신앙으로 삼았다.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불교와 도교 때문에 호랑이는 그 나름의 영역을 확보 받았다.

하지만 조선에 들어서서 불교는 천대되었고, 조광조가 소격서 폐지한 이후 도교의 수난으로 조선은 하늘을 잃어버렸다. 하늘아래 인간만이 우월한 존재였다. 성리학적 세계관의 공고화는 인간과 하늘의 직접적인 관계만 중요하게 여기게 했다. 여기에 조선은 선비(士)에 이어 농업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고, 자연 개간을 통해 호랑이의 영역을 침범했다.

이러한 와중에 호랑이가 인간을 공격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많은 호환이 등장하는데, 이는 호랑이에 대한 대응법 때문에 빚어진 일이다. 이전시기에는 되도록 호랑이를 살생하지 않으려 했지만 조선시대에는 적극적으로 포획했고, 이 때문에 호랑이와 인간이 전쟁을 벌이는 양상이 되었다. 인간의 영역에 침범한 호랑이를 쫓는 차원이 아니라 호랑이 영역에 인간에 침범해 들어갔다. 더구나 조공에서 호랑이가 품목에 오른 것은 뼈아픈 일이었다. 잡고 싶지 않아도 잡아야 했다. 한국인은 민족주의 심리를 생각하지 않을수 없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장수하기 위해 위해 조선의 호랑이를 잡아오라고 했다. 1920년대 한반도에서 호랑이가 멸종한 것은 그간 인간의 집단 살육과 일제시기의 집중적 포획(100여 마리)이었다. 남한의 마지막 호랑이는 일본 왕족에게 헌상되었다는 사실은 많이 알려졌다. 만약 일제가 없었다면 멸종에 이르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 <한국 호랑이는 왜 사라졌는가?>의 저자 엔도 기미오의 주장이다. 적어도 호랑이를 존중하는 것이 한국인들이기 때문이다.

최근 강원도 지역에 호랑이가 출몰한다는 소식이 들리고 있고, 한국인들은 한반도 호랑이를 살려내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 그럼, 호랑이는 현대인에게 어떤 매력과 함의가 있을까?

사자와 달리 호랑이는 평소에는 혼자 지내는데, 고양이과 동물의 대체적인 특징이기도 하지만 호랑이는 유독 심하다. 묘심(猫心)은 혼자만의 독자적인 생활을 영위하면서도 고독과 고통을 견딘다. 혼자 올곧게 지내는 존재는 경외의 대상이 된다. 무리를 지어 살아야 하는 인간에게 호랑이는 우월한 힘으로 고독과 어려움을 감내하며 백수를 지배하는 경외의 대상이었다.

호랑이는 자신이 먹을 만큼만 사냥한다. 그리고 썩은 음식은 먹지 않는다. 즉 자신이 직접 사냥한 것만 먹는다. 스스로 노동하고 그 결과물만을 취하며 다른 이들에게 의존해서 자신의 생존을 모색하지 않는다. 인간과 같이 한없는 탐욕을 부리지 않으며, 프리 라이더로 존재하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호랑이는 혼자 모든 것을 해결하려 하는 1인자형 리더십 때문에 멸종의 단계에 이르렀는지 모른다. 그것이 백호 신드롬에 주는 호랑이 멸종의 교훈이 아닐까.

아나키스트였던 표토르 크로포트킨조차 그의 책 <상호부조>(mutural Aid)에서 "서로 돕는 습성을 가진 동물들이 적자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라고 했다. 그는 시베리아 오지를 탐험하면서 동물들이 상호 협조적이고, 사회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것은 생존을 위한 적응노력의 결과라고 했다. 리처드 윌킨슨 교수가<평등해야 건강하다>(The Impact of Inequality)에서 보노보(Pygmy chimpanzee/bonobo)가 개코 원숭이나 침팬지와 달리 협력과 상생을 추구하는 동물로 정리해 최근 화제가 되기도 했다. 호랑이도 서로 협렸했더라면 인간의 총에 무참히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행태경제학의 ‘최후 통첩게임’도 결국 인간은 자신만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이타주의를 통해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드러내주었다. 존 내쉬도 각 개인이 전체를 염두해야 게임 상황에서 이긴다고 한 바 있다. 협력과 상생의 윤리적 정서는 구석기 이래 인간에게 항상 공정함과 형평성을 통해 상호 협력의 원리로 작용해왔다. 인간이 약한 몸체에도 불구하고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은 협력을 통해 생존을 모색하는 법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자신들만의 카르텔을 만들어 생존을 모색하는 것은 다른 이들의 생존이나 삶을 위협한다.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은 국부가 모든 국민의 것이어야 한다고 보았다. <국부론>은 마이클 셔머(Michael Shermer)의 말대로 보호무역주의가 만들어준 특권에 의지하고 있는 중상주의체제에 대한 긴 논박의 글이었다. 아담 스미스는 모든 중상주의 관행은 생산자, 독점 기업가, 정당 당국자들에게 이익을 가져다주지만 국부의 진정한 원천인 국민들은 빈곤상태에 방치하게 된다고 했다. <국부론>에서 아담 스미스는 일관되게 유착 집단들을 비판했다. 결탁한 사업가와 은행가, 무역업자, 공장주들로서 정부에 자신들의 이익과 요구를 관철시키려는 자들이다. 이런 유착 집단들은 권력 블럭을 낳으며 소비자 일반의 이익이 아니라 생산자들의 특수 이익만을 대변했다. 그의 자유시장경제는 도덕적 상생의 철학이 바탕을 둔 것이다.

한 개인이 아무리 능력 있고 사회적 성공을 이루거나 웰빙과 템플 스테이, 유기농 제품을 먹는 위치에 간다고 해도 승자만을 우선하는 사회구조에서는 언제나 벼랑 끝으로 누구라도 떨어질 수 있다. 그것이 여전히 ‘백호 신드롬’을 맞아 생각해보아야 할 점이겠다. 백호도 전체를 위해 연대해야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