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19금 경쟁, '방송이 관능적 납뜩이가 되고 있다'

부드러운힘 Kim hern SiK (Heon Sik) 2014. 2. 19. 19:16

19금 경쟁 '방송이 관능적 납뜩이가 되고 있다'


-텔레비전이 연애상담하는 사회 


영화 '건축학 개론'에서 서현(수지)을 좋아하게 된 승민(이제훈)은 연애 고민을 납뜩이(조정석)에게 털어 놓는다. 하지만 승민이는 엄마에게는 한 마디 말도 하지 않는다. 어머니 눈에는 승민은 좋아하는 여자 하나 없는 아들로 보일 것이다. 어디 이런 모습이 예전에만 머물까. 지금도 다를 바는 없을 것이다. 승민과 서현 같은 커플은 얼마든지 있으며 뒤늦게 소중함을 인식하게 되지만 늦었음만 한탄해야 한다.

초중고등학교에서 전통적으로 잘 안되어 확립하려한 교육 내용 가운데 하나가 성교육이다. 이는 가치나 실제 면에서 바람직한 일일 수 있겠다. 그러나 이는 사실상 임신과 출산으로 일어날 수 있는 불미스런 일을 방지하기 위한 수단에 그친다. 남녀의 성적 관계에만 해당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녀의 관계는 성적 관계 이전에 인간관계이며, 심리적 관계위에 있다. 여기에는 생물학적인 것만이 아니라 뇌과학, 진화 심리학, 커뮤니케이션 이론 등 다양한 분석이 있어왔고 부족한 감 마저 있다.

또한 그런 관계 속에서 태도와 매너 그리고 자신의 매력을 통해 관계를 증진할 수 있는 코칭이 이루어져야 한다. 남녀 관계는 단지 몇가지 테크닉으로 이뤄지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가족은 물론 제도교육에서도 자기에게 어울릴만한 패션과 화장, 미용법에 대한 교육은 받을 수 없다. 남녀 관계가 노력을 들이지 않고 이뤄지는 것이라는 생각은 난데 없는 운명적인 사랑을 기대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런 운명적인 사랑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런 운명적인 사랑을 만났다고 생각해도 오래가지 못함을 곧 깨닫게 된다. 물론 그런 내용들을 반드시 학교에서 교육 받아야 하는가라고 물을 수 있다. 교육의 최고 목표가 입시교육일 때는 더욱 그렇다.

성적과 진학, 취업, 연봉에 얽매여 있을 때 이를 깨닫는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리며 상처로 고통스러워 한다. 이 때문인지 한국 영화에는 짝사랑이나 실연에 관한 내용이 많고 그것을 통해 관객은 눈물을 흘리는데 그친다. 적극적인 성취와 고통의 해소는 덜하다. 이른바 못이룬 사랑의 합리화가 있다. 예컨대 아리랑의 정한적 연애관이 강한 것이다.

이는 세계적으로 보편성을 획득하는데 실패하는 이유가 된다. 결국 영화 '건축학 개론'에서 승민은 서현이후에 연애를 잘 했을 지 의문이다. 영화 '수상한 그녀'의 오두리가 연애를 잘 했을지 의구심이 드는 대목이기도 하다. 에리히 프롬의 말대로 연애는 끊임없는 관계에 대한 노력과 학습에 있으니 말이다.


운좋게 결혼에 성공해도 이를 인식하지 못하기도 한다. 비록 청춘 시기에 그 중요성을 깨달아도 자신의 연애와 사랑에 대한 모든 것들은 학생들 개개인이 해야 한다. 그야말로 상처투성이 피투성이가 된다. 영화 '피끓는 청춘'에서 학생들은 연애와 사랑의 교육에서도 아웃사이더였다.

학교뿐만 아니라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인지 우리는 납뜩이를 찾는다. 그러나 서로 그만그만하니 발전이 없다. 연애 상담자 납뜩이의 역할을 방송 미디어가 수행하고 있고 최근에는 좀 다른 특징을 보이고 있다.

이전에도 10대들은 라디오 상담 프로 진행자에게 자신의 연애 고민을 털어놓았다. 하지만 그 연애 고민들은 피상적인 것들이었다. 미풍양속을 고려하여 육체적인 관점은 더욱 억제의 대상이기도 했다. 텔레비전 방송 프로그램의 모습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19금 내용이 간혹 포함되기는 했지만 그것은 말그대로 간혹 이었다. 근래 '마녀 사냥'이 이러한 한계를 돌파하면서 비슷한 연애 코칭 프로그램들이 생겨나고 있다. 지상파 방송의 한계를 뚫어 틈새 시장 확보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금기의 영역으로 여겼던 점들을 과감하게 드러낸 점이 관심거리였다. 특히 성적 관계에 대한 고민을 좀 더 실제적으로 부각해 냈다.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일반 참여자들의 적극적인 태도들이었다. 자신의 성적 욕망이나 취향을 그대로 드러내는 모습은 우리사회의 성에 관한 문화적 인식이 달라졌음을 인식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런 프로그램들은 기본적으로 한계가 예정되어 있다. 수많은 사람들의 개별적인 사례를 특정 몇 사례가 커버 해줄 수 없으니 말이다. 무엇보다 이런 프로그램이 새삼 관심을 받는 것은 성적인 내용이 과감하게 삽입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일종의 충격 요법이 작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선정적인 감각의 자극은 그 강도를 높이지 않는 이상 곧 사그라들고 만다.

19금에 숟가락을 얹어서는 시청자의 시선을 오래 잡을 수는 없다. 더욱 출연자들의 리얼버라이어티에 의존해야 한다. 즉 연애와 사랑의 오락화로 흐를 수 밖에 없다. 체계적이고 학술적인 분석이 아니라 경험적 주관이 합리적 객관화되는 상황은 더욱 혼란 스럽게 할 수 밖에 없다.

텔레비전이 연애 상담을 하는 사회가 바람직한가 물을 수 있다. 그것은 한편으로 우리 사회가 그만큼 척박하다는 의미도 된다. 인간관계에 대한 고민을 일상에서 쉽게 소통할 수 있도록 만들필요가 있을 것이다. 예컨대, 학교에서나 조직에서나 상담소나 정신과가 정신장애가 있는 이들만 드나드는 곳이라는 인식이 있는 한 방송은 여전히 납뜩이가 되어야 한다. 물론 스스로 선택해야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해법을 외부에 의존하는 것은 항상 물음표를 낳는다. 납뜩이가 승민의 연애를 성공시켰던가. 열렬한 시청자에게 방송은 승민과 서현과 같은 운명에 처하게 할 수 있다.

글/김헌식 대중문화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