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황진이>는 기녀 영화가 아니다

부드러운힘 Kim hern SiK (Heon Sik) 2009. 4. 24. 16:36

-대중의 기대를 저버린 <황진이>의 몇 가지 아쉬움

어떤 이들은 영화 <황진이>를 실패로 규정했다. 기녀에 관한 시장이 없는데 기녀 영화를 만든 죄(?)라고 했다. 기녀문화의 문화 콘텐츠로서 지니는 가능성을 진단했던 이들까지 도매급으로 죄인이 되었다. 물론 이런 규정에는 두 가지 오류가 다분하다.

먼저 대중문화에 시장 유무를 묻는 것은 우문이다. <왕의 남자>, 아니 연산군 시장을 천만이라고 본 사람은 없었다. 더구나 <왕의 남자> 이전에 연산에 대한 작품들은 나올 대로 이미 나왔다. 한국형 괴수 영화의 시장이 있다고 본 사람도 거의 없었다. 영화 <괴물>은 천만 관객을 넘었다. <쉬리> 이전에 분단 영화도 마찬가지였다.

< JSA >, <태극기 휘날리며>, <웰컴투동막골>은 이러한 단견을 모두 불식시켰다. 그러나 분단 영화라고 모두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국경의 남쪽>이나 <태풍>이 대표적이다. 포커스는 시장이 있는가가 아니라 어떤 작품을 만드는가이다. 예컨대 뮤지컬 <명성황후> 이전에 명성황후 시장이 있다고 본 사람도 없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영화 <황진이>가 탄생한 게 원죄는 아니다.

두 번째, 다행인지 불행인지 영화 <황진이>는 기녀 영화가 아니다. 기녀의 일상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이러한 점은 드라마 <황진이>와 비교하면 단번에 드러나는 점이다. 그렇다고 영화 <황진이>에서 명월이가 당대의 양반과 지식인을 후려잡는 모습이 중심도 아니다. 작품의 핵심은 놈이와 명월의 사랑이야기다.

적어도 영화 <황진이>는 몇 가지 점에서 대중들의 기대를 저버렸다. 황진이가 당대의 가부장적 남성들을 발아래에 두고 자유롭게 살겠다던 다짐은 실현시키지 못했다. 지식의 허위를 드러내는 주체적인 여성성을 기대한 관객들을 심하게 실망시켰다.

물론 영화가 여지식인과의 정신적 세계의 겨룸에 어설프게 초점을 맞추었다면 더욱 엉망이 되었을지 모른다. 한시의 운 맞추기의 묘미조차 제대로 호응을 받지 못하는 21세기 인문학 풍토에서 그런 장면들을 그려내기란 쉽지 않다.

영상을 통해서 그러한 성찰들을 그려내는 데는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기도 하다. 더구나 지금은 몸 철학의 시대다. 그러한 만큼 화려한 몸 사위, 아니 춤사위나 음악 등 황진이의 현란한 기예를 기대한 관객들도 실망하고 돌아갔다.

여기에 21세기 퓨전 컬쳐가 트렌드 코드인 때에 장신구나 복색도 고증에 충실하거나 리얼리즘에 충실하다. 영화 <황진이>는 담백하다. 그러나 대중문화 기호는 담백한 한식보다 각종 소스에 버터와 마가린 버무린 것들을 원한다.

근래 역사 소설의 변화를 그대로 담아내고 있는 것 같지도 않다. <남한산성>, <불멸의 이순신>, <칼의 노래>, <천년의 왕국>, <리진>은 역사 골방으로 되돌아가기보다 현재의 광장으로 역사를 불러낸다.

인물들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의 캐릭터다. 단순히 역사적 인물이나 사건에 대한 작가적 상상력의 개입이 아니라 현실적 문제를 대입시킨다. 따라서 우리의 고민을 그대로 현실의 마당에 불러낸다. 신분제에 갇힌 명월과 놈이, 그들의 사랑-신분제적 질곡 속에 갇힌 그들은 지금 우리의 고민일까?

그런데 영화는 관객의 고민이나 시선과는 별개로 너무 진지하고 일관된다. 황진이의 절개와 놈이의 우직한 일편단심의 사랑과 닮았다. 더구나 희소성에서도 밀린다. 그러한 내용은 다른 드라마와 영화에서 너무나 많이 등장했다.

애써 황진이와 놈이의 구도가 아니어도 익숙하기만 하다. 더구나 현재적 고민으로 생생한 현재의 광장으로 나온 것인지 물음표다. 드라마 <황진이>같이 영상적 트릭을 통해 볼거리를 제공하지도 않았다. 아니 섹시한 황진이 혹은 팜므파탈로서 등장하지도 않았다.

기녀가 지닌 신분적 한계를 넘어 자아실현과 사회적 성공이라는 관점도 없었다. 각종 처세술과 판타지, 부자 신드롬, 당당녀의 코드가 흐르는 대중문화 트렌드에서 영화 <황진이>는 우직했다.

김소영은 어느 칼럼에서 가난한 날을 추억하는 영화들은 모두 망하는 시대라고 했다. 우직하고 순수한 사랑도 실패하는 시대인가. 좌절한 영웅과 이루지 못한 비극적 사랑이 도덕적 우월성을 갖지는 못했다. 그것이 낭만적이거나 문화적 아우라를 더 이상 주지는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황진이를 기생의 질곡에서는 해방시켰다.

영화 <황진이>는 진지하고 우직한 리얼리즘을 표방하는 이들이 언제인가 한 번쯤 만들고 싶어 한 영화다. 그러므로 한국 영화사에서 나름대로의 위치는 차지하게 될 것이다. 더구나 북한의 문화 코드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이는 남한의 대중적 성공과는 별개의 문제다.

이러한 차원에서 홍석중의 <황진이>에 대한 호응은 우직 담백한 민중 리얼리즘의 안타까운 잔영이었다. 그러나 장르적 특징이나 표현 방식이 문제는 아니다. 적어도 상업영화를 지향했다면, 얼핏 시장에 대한 착오라고 보이는 것에는 작품의 코드에 대한 상업화의 착오만 있을 뿐이다. 영화 <황진이>가 그 중심에 있다.

07.06.26 13: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