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천만관객 <괴물>, 반생태학적 영화 표상?

부드러운힘 Kim hern SiK (Heon Sik) 2009. 4. 24. 16:43


웬만한 사람들이면 예견했듯이 영화 <괴물>이 최단기간 천만 관객 동원에 성공하면서 영화가 한국사회에 미친 암울한 점은 희석되고 있다. 때마침 영국 신문의 호평은 다시금 천만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강화하고 있다. 하지만 분명 영화가 미친 부정적인 면은 다시금 정리할 필요가 있겠다.

첫 번째 논의 점은 <괴물>이 영화계에 미친 파급이다.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스크린쿼터제도를 둘러싸고 영화계는 정말 단결이 잘되는 모양새였다. 막상 146일에서 73일로 줄어들고 영화 <괴물>이 등장하면서 구도는 급격하게 다른 양상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상영일수를 줄게 만든 미국과 한국 정부에 대한 비판은 차치하고, 이 73일을 두고 대형 영화와 소형 영화가 내분, 양극화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괴물>과 같은 영화가 627개의 스크린을 차지하고 롱런 해버리면 다른 영화들이 극장 잡기는 정말 어려울 수밖에 없다.

더구나 초반부에 몰이 혹은 쏠림을 유도해버리면 이미 떠버린 영화는 감당할 수 없는 흥행을 보이는 것이 집단주의 문화 속 한국이다. 1년 동안 제작되는 120편의 영화 중 극장을 잡지 못하는 영화도 대거 발생할 수밖에 없다.

정말 무섭게도 보인다. 이러한 급격한 쏠림은 문화적 다양성이 보장 된 나라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는 프랑스인들의 비판이 있어왔다. 이 때문에 한국은 문화적 다양성이 없는 획일화된 사회라는 지적이 타당하게 들린다. 더구나 영화를 보는 사람들이 진정으로 보고 싶어 한 것이 아니라 뒤쳐지지 않거나 이야기에 끼기 위해 영화를 보는 일도 대부분이다.

이런 때 진정으로 괴물을 감동적으로 보았다는 사람들은 급격히 줄어든다. 처음부터 대형 흥행 영화가 극장을 장악한다면 다른 영화들이 소외되는 일 때문에 일각에선 마이너 쿼터제 혹은 스크린 수나 프린트 벌 수 제한을 주장해왔다. 물론 상업영화에 마이너쿼터제를 한다는 것도 모순이다.

이러한 논의들은 사실 영화 자체에 대한 논의라기보다는 영화 상영과 관객의 접근성, 소수 작품에 대한 보호 차원에서 논의되는 것이다. 그것이 영화계의 내실을 다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영화 자체에 대해서는 논의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을 이해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해외 영화계, 해외 언론, 국내 비평가와 언론이 호평하고 천만관객이 보았으니 비판하면 큰일이다. 어쨌든 흥행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용서가 되고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바보가 된다.

두 번째는 이러한 점 때문에 영화 자체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처음부터 <괴물>은 치밀한 전략으로 해외 호평에 이어 국내 비평가들을 잠재웠다. 오락영화에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평론가들이 좋아하는 환경 문제에 대한 경각심, 개인에 대한 국가의 폭력성, 제도의 역설적인 비합리성, 그리고 대안적 가족애가 코미디와 스릴러, 휴먼드라마를 오가며 드러난다. 물론 이러한 메시지들은 그간 오락 영화에만 접합 되지 않았을 뿐이었다. 영화에 새로운 영화적 프런티어는 없었다. 오락 영화에 블랙 코미디 그리고 80년대 운동권 리얼리즘 영화의 기형적 잔영이 노골적으로 보인다.

<괴물>은 많은 문제점을 지니고 있지만 여기에서는 한 가지만 지적하려 한다. 대개 괴물을 환경문제에 대한 고발성 짙은 영화라고 한다. 적어도 겉으로 보면 그렇게 보인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반생태학적인 영화의 전형이 <괴물>이다. 과연 화염병과 쇠파이프, 그리고 양궁, 휘발유를 통해 괴물을 죽인 것이 타당한가를 따지면 더욱 그러하다.

물론 타당성이라는 것을 영화에서 따지는 것 자체가 우매한 일이지만, 서구적 생태관에서는 전형적으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의 짝퉁이다. 아니 서양식 이분법적인 자연관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단지 괴물이 어종의 변형이 아니라 벨로시렙터와 티렉스의 합성이라는 아이러니한 면을 뛰어넘는 문제점이다. 아니 그것은 정말 지엽적이다. <태극기 휘날리며>가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에 버금가는 치명성이다.


“우리는 땅의 한 부분이고 땅은 우리의 한 부분이다. 향기로운 꽃은 우리의 자매이다. 사슴, 말, 큰 독수리, 이들은 우리의 형제들이다. 바위산 꼭대기, 풀의 수액, 조랑말과 인간의 체온 모두가 한 가족이다.”

이 말은 1854년 인디언 시애틀 추장이 땅을 달라는 백인들에게 전한 편지에 있다. 모든 생명체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어 소중하기 때문에 어느 하나를 떼어 낼 수 없다는 말이다. 사실 이러한 사고는 동양적 사고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서양의 국가들은 아주 좋아하는 세계관이다. 그러니 호평이 쏟아질 법도 하다.

한 요구르트 광고에서 노스님이 유산균도 살생하면 안 된다는 말을 한 적이 있지만 불교에서도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거나 우위에 서는 특권적인 존재가 아니라고 했다. 모든 존재는 같은 본성을 같기 때문에 소중하다.

장재(張載) 는 서명(西銘)에서 이렇게 말했다. "하늘을 아버지라 하고 땅을 어머니라고 라고 한다. 여기에 있는 나는 매우 작은 존재에 불과하지만 천지와 하나가 되고 그 품속에 산다. 그러므로 천지에 가득차있는 기는 나의 몸이고 천지를 이끌어 가는 원리는 나의 본성이다. 사람들은 나의 형제이며 만물은 나의 벗이다."

장자의 “호접몽”은 인간이 ‘나비꿈’을 꾸고 나비도 인간의 꿈을 꿀 수 있는 인간과 나비는 동일한 본성을 지는 존재라는 점을 말한다. <주역>은 "천지의 본질은 생성과 생명이고 하늘과 땅 그리고 그사이에 있는 만물은 우주로 보며 하늘과 땅의 상호작용에 따라 만물이 생겨나고 자란다"고 했다. 이렇게 구구하게 아는 척한 것은 생태학적 사고의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서다.

서양의 경우 자연은 극복의 대상이었다. 철저하게 자연과 인간은 이분법적으로 구분되었고, 인간은 이성의 존재로 자연을 통제하고 군림할 수 있다는데 초점을 맞추었다. 자연은 끊임없는 극복과 투쟁의 대상이었고 신대륙 침략이나 제국주의 전쟁, 그리고 미국의 아메리카 침략은 모두 이러한 자연과 벌이는 숙명적인 싸움이었다.

서구 공포 스릴러 오락 영화의 대부분에 자연생물체, 혹은 괴물체가 등장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언제나 그러한 미지의 혹은 괴물체와 싸우는 인간의 능동성, 주체성을 이분법적으로 강조한다. 물론 인간이 잘못해서 만든 기형적인 생물체도 언제나 타도의 대상이다. 이는 할리우드 영화의 단골 소재였다. 물론 동양의 생태학적 세계관과는 정반대로 배치되는 점이다.

영화 <괴물>은 미군부대에서 무단 방류한 포름알데히드 때문에 기형적 괴물체를 멋있게 감동적으로 죽이는 영화다. 여기에 국가와 개인이니 환경, 제도, 공권력의 부패, 정부의 무능력, 인간 소외, 의학 자본 산업의 문제를 소시민적 안일주의에 버무려 집어넣은 것이다.

괴물을 죽이는데 화염병을 사용하는 박해일의 모습에서 오히려 기형적인 괴물의 모습들 보게도 된다. 환경오염을 일으킨 당사자들, 혹은 그것을 방기한 국가, 권력, 제도, 책임자에게는 제대로 항의 조차하지 못하고, 오로지 가족 구성원을 위해 "괴물"을 죽이는 데만 함몰한다.

괴물은 오히려 희생자다. 그 괴물이면에 대한 연민의 감정조차 메마른 것에서 볼 때 영화는 만물은 모두 하나라는 상식적인 메시지조차 담지 않는다. 인간 중심주의 혹은 도피적 안일주의가 더 도드라진다. 이를 가족주의로 포장해냈다.

그것은 단적으로 정치적 무관심과 사회에 대한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송강호의 모습에서 드러난다. 이렇게 편안하게 안주할 때 우리의 현대 문명 자체 아니 가족이 건재 하는 것은 반생태학적 석유 문명에 근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게 한다. 눈 오는 밤 따뜻한 온도의 유지는 바로 반생태학적 문명에 기반하고 있다. 환경 문제를 미군 부대에 전가하면서. 정말이지 괴물은 바로 우리가 만들었다고 해야 한다.

영화가 이렇게 된 이유는 성찰 없이 한국적 현실에 할리우드 대작 버금가는 영화를 만들자는 욕망에서 비롯되었다. 여기에 적절한 사회적 메시지라는 것을 섞어 넣으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영화는 결국 인간의 근원적인 잘못을 가볍게 하고 기형이 되어버린 괴물에게는 죽음으로 되갚음을 했다.

이것은 도덕적 우위에서 폭력적 정당화에 쓰이는 화염병만큼이나 불미스럽다. 이러니 생태학적 성찰 없는 할리우드 오락 영화의 아류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는 것이다. 장르의 파괴나 알레고리의 삽입, 사회적 메시지 여부가 아니라 영화 <괴물>에게는 자연과 인간, 세계에 대한 근원적인 성찰이 부족한 게 치명적이다.

이것이 스크린 독점보다 <괴물>이 영화계나 한국 사회에 주는 암울한 점들 중 한 가지다. 세상 미물 앞에 겸손하지 못한 인간의 오만이 빚어낸 또 하나의 '괴물'이다.
06.08.21 08: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