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리뷰

조용히 성장하는 기업의 비결은 무엇인가?

부드러운힘 Kim hern SiK (Heon Sik) 2015. 7. 20. 15:30


-소설 박승직상점



소설 ‘박승직상점’은 박승직이라는 상인을 통해서 구한말에서 1960년대 초반까지 한국의 상계(商界)를 보여주고 있다. 이 소설은 한국 근현대사를 지나며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변화 속에서 한국의 상계가 어떻게 적응 성장해왔는지 한눈에 가늠해 볼 수 있게 한다. 이는 구한말부터 이어져 온 한국 기업의 성장사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이 책은 상인 나아가 기업의 철학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짐작하게 한다. 오늘날에도 기업인들이 견지해야할 철학적 원칙들을 주인공 박승직과 쌀녀와의 로맨스, 주변 인물들의 역동적인 상업 활동을 통해서 일깨운다.  




가난과 착취의 소작농을 벗어나 상인의 길을 꿈꾸던 박승직은 가출을 감행, 육의전 석유전 일자리를 간신히 얻어 일하다가 결국 끌려오는 등 절치부심한다. 우여곡절 끝에 박승직은 해남 관아에서 3년간 일하며 모은 종자돈 300냥을 바탕으로 본격적인 상인의 길에 나선다. 그러나 박승직에게 필요한 것은 상인의 철학이었다. 박승직에게는 경험과 지혜가 많은 스승의 가르침 같은 게 필요했다. 육의전 석유전 일을 잠깐 할 때, 모셨던 사대부 출신의 행수 어른을 찾아가 무릎을 꿇고 가르침을 청한다. 

“행수 어리신 세상만사가 사람의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십중팔구다 들었습니다. 하다못해 몸을 한번 움직이려 하여도 온갖 얽히고 가로막힘이 마치 고슴도치의 가시처럼 일어나는 것이 세상사가 아니겠습니까? 허나 사리에 맞고 이치에 따라 잘만 운용한다면 비록 고슴도치의 가시처럼 온갖 얽히고 가로 막힘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자신의 화기(和氣)를 손상 받지 않는 채 자연스럽게 움직일 수가 있을 것입니다. 저는 오로지 그 사리에 맞고 이치에 따라 얽히고 가로막힌 것을 잘 운용할 수 있는 지혜를 구하거자 함일 따름입니다.”

이 같은 청에도 쉽게 입을 열지 않던 행수, 여러 차례 간곡한 박승직의 간청에 단단히 이른다. 승직이 기대하는 것처럼 어떤 신통한 재능, 지혜, 비책이 아니라 순전히 자신의 경험에서 얻은 일임을 전제하면서 마침내 입을 뗀다. 

“저 산비둘기 같이 하찮은 미물도 제 어미가 앉아 있는 나무 가지 세 가지 아래에 앉는다하여 삼고지례(三高之禮)라 말하고 국경 멀리 전장으로 끌려간 말들도 잠시 쉬어 갈 때면 고향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향해 선다는 것을 하물며 만물의 영장이라고 일컫는 사람이 하는 일에서 또한 그것이 비록 상품을 사고파는 미천한 상업일지언정 어찌 정신이 없다 말할 수  있겠는가?”

행수는 자신이 가장 주목해온 상인으로 개성상단을 들었다. 이유는 종로 육의전 상인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태생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1392년 조선 왕조가 출범하면서 협력하지 않는 고려왕조의 유신들은 죽임에 처해졌다. 그 죽음의 불길 속에서 살아남은 유신들이 생존의 수단으로 삼은 것이 바로 상인의 길이었다. 물론 그 상인의 길은 극심한 천대와 통제의 대상이 되었으며 무뢰배들의 약탈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그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나름의 철학과 원칙이 있었기 때문에 육의전에 맞서는 당당한 전국상권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고 했다.

행수는 그들이 절개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천대받는 상인으로 나름의 길을 열어 나가되 공맹(孔孟)의 유풍을 지켜온 마음가짐과 함께 대체 그 어떠한 공력이 더해졌기에 그것이 가능했는지 궁금해 오랜 동안 주목해왔다는 것이다. 그들의 상술(商術)은 대략 20가지로 압축되었다.

1)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2)고집이 세고 배짱이 두둑하다. 3)끈질기게 매달린다. 4)부지런하고 짜다. 5) 분수를 알며 검소하다. 6)무조건 절약하여 모은다. 7)정직과 친절로 승부한다. 8)목에 칼이 들어와도 약속은 지킨다. 9)신뢰와 믿음으로 차별화한다. 10)어려울 땐 서로 뭉친다. 11)어려운 이웃을 보면 모른 체하지 않는다. 12)돈을 추렴하여 선행에 쓴다. 13)외부의 힘을 빌리지 않는다. 14)불순한 자본과 결합하는 매판자본이 없다. 15)앞일을 내다볼 줄 안다. 16)기회는 결코 놓치는 법이 없다. 17)경쟁자와 절대로 타협하지 않는다. 18)시대의 흐름과 상황 판단에 유의한다. 19)권력에 밀착하거나 결탁하지 않는다. 20)권력과는 가깝지도 멀리 하지도 않는다.

이런 20가지의 상술을 행수는 다시 다섯 가지 상략(商略)으로 묶었다. 1)도전정신과 근검절약, 2)정직과 믿음, 3)협력과 동료 우선, 4)기회의 포착과 발굴, 5)권력과의 거리 유지 등이었다. 이 가운데 그는 제일 중요한 것은 도전을 하되 근검절약해야 하는 것이 가장 으뜸이라고 했다. 사마천이 사기(史記)에서 ‘고개를 숙이면 무엇이든 줍고 고개를 쳐들면 무엇이든 따야 한다.’는 말은 상인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장사는 물건만을 다루지는 않는다. 상품을 만들고 다루고 파는 일은 결국 사람이 한다. 

행수가 강조한 것은 바로 사람을 보는 법이었다. 

“이제 자네는 지금까지 내가 열거한 개성상인의 스무 가지 상술과 다섯 가지로 묶은 상략을 본보기로 삼아 곧바로 상인의 길로 나설 수 있을 것일세. 그러나 생각해 보게나 농사가 하늘과의 동업이라면 상업은 곧 사람과의 동업일진대, 그렇다고 한다면 상인이 되고자 하는 자네는 무엇보다 자네와 동업할 수밖에 없는 사람부터  판별하여 옥석을 가릴 줄 알아야 하질 않겠는가.”

개성상인이 사람 됨됨이를 알아보는 방법은 여덟 가지 였다. 1)묻는 말에 얼마나 꾸밈이 있는가(詳), 2)묻는 말에 얼마나 임기응변이 있는지(變), 3)사람을 사이에 넣었을 때 얼마나 성실한가(誠), 4)마음에 품은 생각이나 감정을 스스럼없이 얘기해 볼 때 솔직한 덕행을 지녔는가(德), 5)재물을 맡겼을 때 얼마나 청렴한가(廉), 6)여색 사이에서 얼마나 바른지(貞), 7)위급한 상황에서 용기 있게 대처하는가(勇), 8)서로 만취한 이후에도 몸가짐이 흐트러지지 않는가(態)였다.    

무엇보다 세상의 변화를 알아야 상인의 길을 갈수 있다며 그 세상의 변화를 알 수 있는 것은 바로 책을 읽어야 한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유가의 책보다는 노장의 책을 읽으라고 권한다. 유가(儒家)의 책은 나라를 통치하기 위한 책이지만 노장(老莊) 도가(道家)의 책은 백성들의 실제 삶을 위한 책이라고 말한다. 노자의 도덕경에 언급된 ‘상선약수’(上善若水)와 같은 말은 바로 부드러운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 즉 약자가 강한 것을 마침내 이긴다는 점을 말한다. 유가의 사상이 지배자의 철학이라면, 노장 사상은 피지배자 약자의 철학인 셈이다. 상인이 강자의 위치에서 군림하는 순간 망하게 되는 것은 불을 보듯 빤한 이치가 된다. 그래서 행수는 박승직에게 항상 겸손의 예를 갖추며, 부쟁(不爭)의 도를 실현하도록 한다.

가장 행수가 강조한 것은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었다. 자신의 생지(生知)야말로 천지가 두 쪽이 나도 가장 확실한 자신의 자산이며 역량임을 잊지 말라고 한다. 생지를 비유하자면 거미가 태어날 때부터 거미줄을 치는 방법을 아는 것처럼 태어날 때 사람이 가지고 태어나는 재주와 역량을 말한다.

하지만 이러한 행수의 가르침은 기본적인 것이니 상인의 길은 스스로 찾아나서야 했다. 소설이 중점적으로 다루는 것은 이런 개성상인과 행수의 가르침을 몸소 실현하는 박승직과 그렇지 않은 친구들의 이야기다. 이야기는 파란만장한 한국근현대사이면서 우리 기업의 성장 역사이기도 하다.

15년 동안 박승직은 직접 자신이 짐을 짊어지고, 전국을 떠돌아다닌다. 많은 이익이 남지 않아도 부지런히 그리고 조금씩 자신의 자본을 모아간다. 그것은 콩을 한 알 두 알 모아 마침내 거대한 산을 이루어가는 것과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가 모은 것은 바로 신뢰하고 믿을만한 전국 각지의 거래처였다. 이러한 신뢰의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박승직상점을 베오개(종로 4가)에 세운다. 그러한 신뢰가 있었기에 더 이상 운송을 해주는 상점이 아니라 방문을 받는 근대적인 상점이 되었다.

어린 시절 연인 쌀녀가 인생의 선물로 준 말 늧의 첫번째는 박가분 즉 화장품이었다. 그녀가 준 찻잔 속 글자 무난지도(無難之道)와 생지(生知)의 원칙에 따라 화장품은 어려운 시기 박승직상점을 살린다. 그것은 박승직이 살린 쌀녀라는 존재 자체가 박승직을 살린 것과 같았다. 두 번째 말 늧은 동양척식을 공격한 나석주 의사를 통해 얻게 된 역사에 대한 깨달음, 그리고 세 번째는 묵묵히 얻은 신망은 사업을 저절로 영글게 한다는 것이었다. 겸손과 절제의 태도는 결국에는 어려운 시기를 견디고 튼실한 사업을 가능하게 한다. 결코 무리한 사업 확장을 하지 않는 그가 벼락부자는 되지 못해 크게 부각을 받지는 못해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신뢰와 재부가 불어났다. 특히 그는 정치적 세력과 가깝지도 않고, 그렇다고 적을 만들지도 않았다. 자신의 능력을 벗어나서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하지도 않는다. 동양맥주의 전신인 기린 맥주도 사업을 확장한 것이 아니라 자치위 등 많은 사람들이 원해서 맡게 된 것이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잃지 않고 자기를 벗어나 무리한 일을 하지 않으며 조끔식 신뢰를 통해 역량을 축적해나간다.

박승직과 비교되는 인물은 박승직의 친구 김만봉과 장대경이었다. 우선 김만봉은 평안북도 박천의 튼실한 기반을 중심으로 한양의 상권에 진입한 인물, 그는 최고의 상인이 되기를 꿈꾸지만 그의 목표는 1등이다. 그래서 장대경을 이겨보이리라 다짐한다. ‘조선의 상점왕’이 목표였던 그는 종이 장사에서 시작하여 백화점업, 무역업, 수산업, 인조견업에 이르기까지 장사영역을 크게 확장한다. 장대경은 조선왕조 5백 년 동안 조선 상계를 유지해온 육의전 대상인의 자제 출신이다. 그는 조선 육의전의 몰락을 보며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지 하리라 다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첩, 쌀녀 마저 헌병대장에게 바치고 만주의 밀수입 무역권을 따내기도 한다. 즉 그는 항상 정치권력에 줄 대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정치권력을 통해서라도 자신의 상권을 적극적으로 확장한다. 심지어 그는 바다 밑에 잠자고 있는 일본잠수함들도 꺼내 팔았다. 일제가 지배할 때는 일제 실력자들에게 로비하고, 미군정하에서는 미군들과 친하게 지냈다. 또한 이승만 정부가 들어섰을 때는 그쪽에 줄을 섰다. 하지만, 정치와 가까울 경우 언제인가는 다른 정치적 세력에게 당하게 되어 있다. 장대경의 대청방적은 5.16군사쿠데타가 일어나자 부정축재 환수조치에 따라 몰수된다. 조선왕조 6백년에 걸친 육의전 상계의 후예가 끊겨버렸다. 김만봉은 반민특위에 친일파로 몰려 쇠락을 가속화 한다. 북한의 공산화는 그의 무역선을 억류하여 막대한 타격을 주었고 그는 수산업, 인조견 사업을 통해 부활을 꿈꾸었지만 무리한 사세 확장의 후유증은 쉽게 회복되지 못하고 만다. 결국 그는 모든 것을 읽고 만다. 그는 자신의 역량과 생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 책에서 많은 분량이 김만복과 장대경에 할애한 것은 그들이 개성상인들의 상술이나 상략 등에서 얼마나 벗어난 행동들을 했는가를 보여주는데 있었다. 물론 그들의 상업 활동의 결과는 좋았고, 초반부에 그들은 매우 잘 나갔다. 항상 조선에서 그들은 최고였고 주목을 받았다. 상대적으로 박승직 상점은 크게 주목을 받지 못하고 어려움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결국 끝내 살아남은 것은 박승직상점이었고 그의 후예들이었다. 한때 조선을 들썩이게 했던 김만복과 장대경의 후예들은 흔적조차 없다. 그렇게 손쉬운 방법으로 당장에는 영화를 누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상략의 철학을 지키는 이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점을 이 소설은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