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리뷰

오타쿠 문화가 시작되는 공간에서

부드러운힘 Kim hern SiK (Heon Sik) 2020. 5. 8. 07:11

오타쿠 문화가 시작되는 공간에서

-오쓰카 에이지의 그 시절 2층에서 우리는리뷰

 

1980년대 초반, 도쿄 신바시의 어느 빌딩 2층 편집부, 즉 도쿠마쇼텐 2층에는 수많은 청춘들이 들락날락 했다. 흥미롭게도 그 곳을 들락날락했던 많은 젊은이들이 그 뒤 오타쿠 문화를 선도하거나 중심축을 이루었다. 많은 젊은이들이 했던 일은 만화와 애니메이션의 편집자 업무였지만 그들의 신분은 안정되어 있지 않았고 오늘날의 기준으로 비정규직 혹은 임시직들이었다. 저자도 시급 450, 우리 돈으로 4천원을 받고 일했던 알바생이었다. 딱히 시급이라는 생각도 없고 경비 계산정도로 생각할 수 있는 임금에 월 378시간이나 일을 했다고 한다. 더구나 토요일 일요일에도 일을 했으니 한 달 30일을 기준으로 하루 12-13시간씩, 밖에서 업무를 보지 않는 이상 사무실 한켠에서 항상 쪽잠을 자며 일을 했다. 지금 인권 의식으로 보면 당장에 노동 착취로 고소 고발이 이뤄질지 모른다.

 

저자도 그들은 정말 부당한 대접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라고 인정하고 있다. 그런데 저자는 도쿠마쇼텐 2층 사람들이 그래도 행복했던 이유가 있다고 한다. 즉 자신과 같은 사람들이 그곳에 있고 자신만이 몰두하고 있다고 생각한 가치를 공유할 수 있는 사람들과 만나 미디어와 상품을 만드는 현장에 참여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마도 그 참여가 보람된 결과를 낳았기 때문에 이런 행복을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때문인지 저자는 스스로 2층 주민들이라고 부른 그들이 애니메이션, 특촬, 만화에서 일방적으로 발견해낸 가치들이 잡지와 출판물 기획으로 이어지게 되고 여기에서 금전이 만들어지고 광대한 시장이 만들어진 것이라고 했다.

 

저자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 그곳에 머물렀던 이유에 대해서 좀 더 솔직하게 말을 한다. 돈 때문만은 아니었다는 미사여구를 늘어놓을 생각은 없으나 도쿠마쇼텐 2층이 그들에게 제공해주었던 것은 바로 있을 곳이었다고 했다. 있을 곳, 공간이 문화예술과 미디어 콘텐츠에서 얼마나 중요할 수 있는 지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물론 그 공간에서 주목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오리지널 작품을 만드는 창작자이기 때문은 아니었지만 역시 편집자가 얼마나 중요할 수 있는지 여실히 생각하게 만든다. 당시 그 알바생 편집자들은 서브 컬쳐에 머물고 있던 만화/애니메이션의 새로운 문화 기류를 포착하고 이를 수면위로 띄우는 역할을 했다. 이는 매스 컬쳐 시대의 일방적 소비자가 아니라 상호 인터렉션 시대의 마니아 컬쳐의 시작이었고, 그것을 나중에 사람들은 오타쿠 문화로 일컬었다.

 

기존의 만화와 애니메이션 제작세대들이 새로운 문화 흐름을 놓치고 있을 때 오가타 히데오는 야마토 극장판을 보기 위해 길게 늘어선 관객 행렬을 보고 <애니메쥬>의 창간을 결심하게 된다. 이유는 당시 1세대 오타쿠 젊은이들은 애니메이션을 자신들의 시선에서 다뤄주는 매체 굶주려 있었다는 것. 따라서 도쿠마쇼텐 2층을 오갔던 주민들도 스스로 팬진(Fanzine)을 직접 만들어 본 경험이 있는 이들이었다. 그들은 기존의 미디어에서 다뤄주는 만화/애니메이션 콘텐츠에 만족할 수 없었다. 역시 애정이 많았기 때문일까. 우선 그들은 만화나 애니메이션을 다룬다고 해서 가벼운 잡지가 아니라 품격과 교양이 있어서 스마트한 독자들이 보는 매체로 만든다는 편집 원칙을 세웠다. 그렇다고 해서 일방적으로 독자들에게 지적인 허영을 주입하는 매체는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2층 주민들이 참여를 했지만 이들은 끊임없이 독자들의 의견을 들으려 했고, 심지어 2층을 견학 방문하고자하는 이들을 마다하지 않았다. 기존의 만화와 애니메이션 제작세대들은 이런 과정에 둔감했다. 심지어 2<애니메쥬>의 주민들은 정기적으로 학생독자들과 함께 상영회를 개최하고 리스트 정리에 열정을 올렸다. 여기에서 리스트 정리는 오타쿠 문화의 핵심적인 특징이다. 리스트 정리의 열정이야말로 정말 얼마나 그 작품을 좋아하는지 알 수가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텔레비전 애니메이션이라고 하면 회별 소제목은 물론 매회 등장인물, 성우, 주제가 가사, 작곡가나 작사가는 물론이고 가수도 기록하고 심지어 광고의 기업 이름도 넣는다. 엔딩 크레딧도 샅샅이 훑어내는데 그래픽이나 음향, 특수 효과를 담당한 이들의 이름까지도 적는다. 그들은 이를 거대한 데이터로 축적하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출판사 입장에서 보면 시사회 초대장이나 팸플릿, 굿즈 샘플은 아무런 가치가 없지만 그것이 마니아들에게는 얼마나 소중한지 의식하기 시작했고, 사소한 원화 하나, 컷 하나를 팬 관점에서 열혈 알바 편집자들이 반영하던 시기였다. 이런 행태들을 보면 기성세대를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이렇게까지 선호할 좋은 작품이라면 사회적 의미 나아가 정치적 현실을 반영해야 하지 않겠는가 싶다. 더구나 가벼운 만화/애니메이션에 불과한데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아예 의식이 없이 맹목적인 추종을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다. 여기에서 중요하게 부각되는 개념이 세계관(Universe)이다. 세계관의 부각과 의미부여가 팬들에게는 중요하다는 것도 인식의 공감대를 얻기 시작했고 때문에 이전에 나왔던 애니메이션 야마토건담이 새롭게 부각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예컨대, 건감을 프라 모델로 만들고 피규어로 만들게 되는 것은 단지 그 모습이 마음이 들기 때문이 아니라 이런 세계관의 몰입에 있었다. 저자도 밝히고 있지만 단지 미디어 믹스’(Media Mix) 즉 원소스 멀티유스(One Source Multi Use)라는 개념처럼 하나의 콘텐츠를 무조건 영화, 연극, 드라마, 각종 굿즈로 상품화한다고 파생 효과를 낳을 수 없는 이유다. 이는 아이돌 문화에서 등골브레이커로 악명이 붙여지기도 하지만 중요한 것은 마니아 컬쳐에 토대를 두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그들의 가치관을 핵심적으로 담아주는 무엇, 그 유니버스가 존재해야 미디어 믹스나 원소스 멀티유스가 가능하다는 점을 문화 마케터들은 쉽게 간과하고는 한다. 더구나 공감의 세계관이 우선되지 않는다면 상호작용성이 없는 산업시대의 대량생/ 대량 소비의 매스 컬쳐 모델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정작 도쿠마쇼텐 2층을 불안한 신분에도 오간 그 청춘들이야말로 유니버스를 공유한 이들이었다. 이제 그 세계관을 공유하는 이들이 있을 공간은 물리적 공간 너머 스마트모바일 환경에서 주어지고 있는데 이 책은 우리는 주류문화가 보지 못하는 어떤 마니아 문화에 주목할 수 있을지 자문하게 한다. /김헌식(평론가, 박사)

 

*2020년 5월 기획회의에 실린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