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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괴물>, 딜레탕티슴의 시장적 승리

부드러운힘 Kim hern SiK (Heon Sik) 2009. 4. 24. 16:46

-영화 <괴물>, 딜레탕티슴의 시장적 승리

'소문난 잔치'의 빈곤성

괴물이 매일 수 십 만 명의 사람들을 집어 삼키고 있고 사람들은 그 안으로 수없이 자발적으로 들어가고 있다. 괴물의 괴력, 아니 괴물은 한국영화를 집어 삼키는 괴물이 될 수도 있다. 당장에 필요한 것만 흡수하고 뼈만 입으로 배설해 내는 <괴물>처럼 대중 영화로는 성공할 지 모르지만 영화 작품에서 새롭게 진지하게 의미점을 던져주는 창조성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미 수백만의 관객, 천만 관객을 동원하겠다는 의도가 들어갈 때부터 예상된 것이다.




물론 이 영화는 기존의 오락 영화와는 정말 다른 면들을 많이 보여준다. 한국 블록버스터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실감나는 괴물을 넣었고 여기에 개인-가족이 제도, 국가를 넘어 괴물과 대항한다는 사회 의식적인 메시지를 담았다. 또한 장르적인 경계를 허물어 버린 느낌도 있다. 드라마와 코미디, 액션 그리고 스릴러를 겸비하려도 노력했던 터다. 2류 이야기를 1급으로 만들었다는 말도 들린다.

정말 좋은 이야기들이 많지만 그것은 이미 전제에 순응하고 그것을 문제없이 깔고 있을 때 성립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대중 영화는 흥행성을 고려하기 때문에 전 범위를 포괄하려는 생리를 지니고 있다. 이런 대중 영화는 영화적 프런티어라는 정체모를 그러나 존재하는 괴물과 싸워야 한다. 영화 <괴물>은 대중성은 확보했지만, 영화적 프런티어라는 측면에서 봉준호의 천재성에는 흠집을 냈다. 아니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점이 여럿 있다.

사실 영화를 보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특히 꽃(화염병)을 괴물에 꽂는 박남일의 행동을 보면서. 아니, 그전에 선배와 나누는 대화를 들어보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대기업 이동 통신 본사에 다니는 선배를 찾아간 그는 운동만 하는 줄 알았는데 언제 공부해서 이런데 들어갔냐고 한다. 그리고는 연봉이 6-7천은 되지 않느냐고 한다. 그러자 선배는 그래봤자 월급쟁이이고 빚이 6-7천이라고 한다.

소시민 월급쟁이 그리고 그렇게 비판했던 매판자본의 중심에서 소시민으로 월급쟁이를 하고 있는 선배. 그는 현상금을 위해 같이 운동을 했던 후배를 팔아넘긴다. 그런 줄도 모르고 그를 부러워하는 박남일은 인정하고 싶지 않는 386의 정서인지 모른다. 무엇보다 정작 사회의 변혁을 아니 미국 대사관에 던졌을 불꽃을 괴물에게 던진다는 사실은 정말 아니러니 하다.

괴물을 만들어 낸 주한미군에 대해서는 그 외 등장 인물들이나 박남일은 전혀 대응을 하지 않는다. 다만, 무능하고 허술하고 억압적인 웃기는 대한민국의 제도적 시스템과 국가 폭력에 대해서 툴툴거릴 뿐이다. 반미 영화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코미디다. 작위적인 결말을 위한 장치들을 적절하게 배치하면서 오만가지 것들을 다 집어넣다보니 매끄럽지 못하다는 소리를 들을 만도 하다.

예를 들어 삼남매가 흩어졌다가 다시 모이는 장면은 영화의 흐름을 산만하게 만들고 극적 긴장을 끊어버린다. 진지한 인생 성찰에 관한 아버지의 훈계에 대응하는 삼 남매의 잠은 웃음을 유발하려 하지만 부조화를 더 낳는다. 화살로 대미를 장식하는 배두나의 마지막 명중 뒤에 돌아서는 장면은 이러한 차원에서 무심하다. 현실은 양궁이 아니다. 박남일의 화염병, 박강두의 철 파이프, 부랑자의 기름, 박남주의 화살은 왜 괴물에게 절묘하게 타격이 되는지 그 인과관계는 없고 겉돌기만 해서 작위적이다. 상을 받기 위한 정해진 장치들의 교묘한 응집이다.

박강두, 박남주, 박남일은 모두 비정상적인 괴물이라는 지적이 있다. 주류 사회에서 벗어난 인물들이라는 이야기다. 그런데 그들이 괴물을 정작 죽이는 기막힌 알레고리는 영화에서 드러나지 않는다. 즉 그것을 처음부터 염두 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국가와 공권력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라고 한다. 바이러스를 둘러싼 제도와 정치경제학을 짚어낸 것은 좋다. 하지만 저널리스틱할 뿐이다. 영화에 이 말을 쓰는 것은 치명적이다. 이 영화는 단순한 오락 영화에 그치지 않고 묵직한 사회적 메시지를 얹어주고 싶어 했다. 아니 이러한 점은 비평가들을 위한 것이다. 좋은 평가를 듣기 위해서는 이러한 면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 비평가들은 어차피 공인된 얼리 어답터 혹은 얼리 리뷰어 아닌가. 영화 <괴물>은 마케팅 차원에서 비평을 우군으로 만들어 성공했다.

좀더 보자면 영화의 사회적 메시지는 국가와 공권력은 무능하고 시스템은 허점이 많으며 개인을 끊임없이 억압하고 짓누른다는 설정이다. 색다른 것은 없었다. 이미 할리우드 영화에서 할 대로 다 써먹은 것들을 한강 위에 다시 쌓아올린 느낌이다. 그렇다고 뉴 레프트 정신의 소산이라고 볼 수도 없다. 홍콩영화식의 어설픈 블랙 코미디를 정치와 제도에 대한 풍자라는 이유만으로 높은 평가를 하는 것은 괴물스럽다.

제도는 그렇게 만만한 게 아니다. 아니 박강두가 텔레비전을 끄는 일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텔레비전을 끈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냥 도피하고 퇴행으로 보인다. 아주 식상한 장치, 그러나 정치와 제도는 그러하기 때문에 더욱 중요하다. 정치 무관심의 심리에 기대는 것이 저항 정신의 본령은 아니다. 그것은 저항을 빌미로 한 도피이다.

역시 이런 뻔한 이야기를 논외로 할 때 장르적 파괴를 논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어디에서인가 모두 본 내용들이 기시감과 같이 뒤섞여 있다. 크로스오버를 했는지는 모르지만, 그것이 하나의 관점을 짜임새 있게 형상화되었는지 의문이다. 아니, 영화적 관습을 얼마나 벗어났는지 알 수 없다. 우스개는 어딘가 어색하고 맞지 않는 웃음을 끌어내려 하고 음악은 상황과 맞지 않게 정신을 혼란시킨다.

그것은 정작 가족이 가족 일원을 구출하려 하지만, 정작 “가족의 심리”에 대해서는 무지한 탓이다. 가족은 존재하지만 가족간의 심리적 묘사는 개연성 있게 드러나지 않고 박강두의 부족한 행동이 연발시키는 상황 악화의 안타까움이 극 전개를 이끌어가며 맥주와 동전이 전달하는 알레고리가 눈길을 끌 뿐이다.

배우들의 연기는 이미 익숙한 모습들이다. <연애의 목적>의 퉁퉁거리며, 본 마음을 감추고 나대는 박해일을 떠올리고, 송강호의 능청스러운 멍청 연기에 익숙하다면 별 다를 게 없다. 변희봉의 연기야 이미 자타가 공인한 것 아닌가. 그 공인 대상인 연기에 변화는 없다. 익숙한 것에 다시 익숙할 것인가. 그렇다면 문제는 없다.

이제 마지막으로 괴물을 등장시킬 때다. 괴물의 탄생이 주한 미 8군의 포름 알데히드에서 비롯되는 설정이 가능한 지를 논외로 하더라도 원효 대교에 근거하고 있는 알레고리가 없다. 괴물의 탄생과 살상이라는 생태학적 위기는 미군의 부검실에서 나온 독극물에 모두 다 전가한다.

한강의 기적이라는 것은 결국 석유 문명에 깃들이고 맛들여진 것. 한강 고수부지 컨테이너 박스 안에서 석유 문명의 혜택을 누리면서 세상을 원망하는 역설은 드러내지 않는다. 정작 위험한 것, 파괴적 문명에 맛 들여진 삶에서 가족의 의미만을 우선시하는 연성화를 과감하게 드러내도 비난받지 않는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괴물들이다. 괴물을 죽여야 하는 괴물들의 역설은 없었다. 그래서 아귀가 틀어진다.

정작 괴물에 대한 개연성은 거의 방기했다. 돌연변이 '괴물'에 숙주(Host)하는 것은 다름 아닌 영화의 주제 의식과 대중성 집착이다. 더구나 어족의 일종일텐데, 괴물의 움직임은 <쥬라기 공원>의 티라노 사우르스와 벨로시렙터의 움직임을 결합시켰다. 우리만의 괴물을 이야기하는 것이 우습게 된다. 미국을 비판하면서도 미국에 의존해야하는 한국의 비극성이 드러나는 것인지.

인디에서는 정말 식상하게 이미 반복되어 온 국가 제도의 부정성. 괴물(외적 위협, 위험)은 가족들(개인들)이 스스로 지켜야 한다는 강박관념의 소산이 스릴러와 함께 극적 완결로 치달아갈 때 이 영화는 대중적으로는 긍정적이다. 어설픈 인디 민중 영화의 아류라는 점은 볼거리들에 묻혀 버린다.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우의성은 희화화하기에 겉으로는 무리는 없지만 현실 모순과는 관계없이 영화가 끝나면 잊혀질 일이 된다. 박강두가 텔레비전을 끄고 새 가족 구성원이 된 아이와 밥을 먹듯이, 추운 겨울날 따뜻한 자기만의 공간에서 함몰되듯이. 그것은 열정을 잃어버리고 그것을 내뿜었던 자신을 자학하고 냉소하는 박남일의 태도와 같은 맥락에 있다.

웃음과 눈물과 감동, 방학에 12세 관람가, 별다른 경쟁상대도 없는 상태. <한반도>같은 감정적 민족주의 상업영화야 본래 게임도 안 되는 상대고 할리우드 영화 중에도 경쟁자는 없기에 당분간 흥행은 계속할 것이다. 정말 그럼 천만 관객을 위한 대중성이 있는 것일까? 대부분의 스크린을 장악한 상태에서 과연 전세대가 이 영화를 보고 싶어 하는지는 의문이다. 특히 평소에도 영화를 잘 보지 않는 분들을 과연 극장 앞으로 불러올 수 있을지 알 수는 없다. 그 이유는 앞의 점들 때문에 낯설게 느껴질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