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크놀로지와 문화 콘텐츠

디지털 콘텐츠를 움직이는 에고 센트릭

부드러운힘 Kim hern SiK (Heon Sik) 2019. 3. 15. 07:42

디지털 콘텐츠를 움직이는 에고 센트릭

-집단지성에서 에고센트릭 공진화로 'SNS vs ENS'


         김헌식(카이스트 미래세대 행복위원회 위원, 문화정보콘텐츠학 박사)

 

 

디지털 콘텐츠를 필두로한 문화콘텐츠의 수용자 심리는 창작의 원리탐구나 적용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단순히 비중이 아니라기본적으로 숙지하거나 파악하고 있어야 하는 원칙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그러한 점은 양적인 분석 방법이나 주관적 비평에 함몰되어 쉽게 간과되는 경향이 있다. 무엇보다 수용자의 심리는 단순히 거대한 담론이나 지향적 가치가 아니라 본능적인 메커니즘에 기반하고 있음을 일단 주지하여야 한다. 여기에서는 우선 소셜과 에고라는 점에서 분석해 보고자 한다. 이는 기존의 인지심리학이나 수용자 심리학에서는 등장하지 않는 비교 분석이기 때문에 낯설고 이질적일 수 있다.


Social VS Ego

 

자아의식은 근대기에 탄생했다. 근대이전에는 자아라는 의식조차 희미했다. 이러한 점은 서양만이 아니라 동양도 마찬가지였다. 서양은 인간보다는 신에 더 귀의했고 동양은 개인보다는 사회 내지 국가를 더 우선하였다. 일찍 근대 자아의식에 눈뜬 것은 서양이었다.


데카르트는 우리가 유일하게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자아의식이라고 믿었는데 이는 코기토 에르고 숨’(Cogito ergo sum)이라는 말이 잘 압축되어 있다.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말에는 근대적 인간의 자아의식이 담겨 있다.


프로테스턴트 혁명은 자아의식의 확장이었다. 사제들의 중보사역만이 아니라 가톨릭교회에 의존하지 않고 하나님과 직접 교통하게 되었다. 종교적 세계관을 벗어나려는 사상가들과 이를 따르는 이들은 정해진 운명보다 스스로 자신의 길을 개척해야 한다는 의식이 강화되었다.

 

과학은 특히 자신의 관찰과 검증으로 진리를 확인하려는 근대인의 의지와 열정 덕분에 크게 발달하기 시작했다. 자본주의는 개인의 능력과 소비를 중심으로 급격하게 발달했다. 민주주의의 발전은 개인의 권리를 통한 인격적 존중을 중심에 두고 성숙한 발전에 이르게 되었다.

 

리처드 타나스(Richard Tarnas) 서구정신의 열정(The Passion of Western Mind)에서 유럽에 근대에 이르러 형성된 현대적 자아는 개인주의, 세속성, 의지의 힘, 다양한 관심과 충동, 창조적 혁신, 인간의 활동을 규제하는 기존 관습에 대한 저항 등의 특성을 띠는 정신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아담 스미스는 개인의 자기의식에 따른 행동들의 이점을 부각하였고, 슘페터는 창조적 파괴와 함께 기업가 정신을 매우 중요하게 언급하였다. 현대의 경제학은 개인의 판단과 의사결정, 선택을 중심에 두고 있다. 21세기를 다품종 소량 생산의 시대라고 말하고 문화부족의 새로운 전성기라 일컫는 것은 이 때문이다.

 

대가족에서 핵가족 이제 다시 1인 가족의 형태로 끊임없이 분화하는 것은 타아보다는 자아를 더 강조하는 것이다. 가족이라는 개념도 자신을 중심으로 한 토대가 우선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이는 자신의 직업적 선택의 대상이었던 기업에서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이름으로 거는 직종만이 아니라 개인들은 1인 창조나 기업에 주목하고 있다. 조직에 묻히기보다는 드러나는 직업군 즉 아나운서나 스타에 대한 대중적 열망은 어느 때보다 폭증했다.

 

기자들조차 자신의 이름을 건 프로그램이나 섹션을 자기 네이밍화하는 경향이 더욱 증가하고 있다. 세계적으로 장기간 자신의 일거수 일투족을 드러내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이나 오디션 프로의 등장은 이러한 측면을 매우 강하게 대변하는 시대적 징후라고 할 수 있다. 집단연희의 공간은 극장의 공간으로 분할되었고, 다시 라디오와 텔레비전으로 가족화되었으며 퍼스널 컴퓨터라 개인화되었고, 모바일은 자아 중심화되었다.

 

퍼스널 컴퓨터는 여러 사람이 돌려쓰기도 하지만, 모바일은 오로지 한 자아만이 투영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바일 기기는 마침내 인간의 통제력을 극단적으로 강화시킨 채 스마트 폰의 등장으로 판도라의 상자를 연 셈이 되었다.

 

SNS(social network service) VS ENS(egocentric network service)

 

모든 것을 인간이 해야 한다는 사실은 한편으로 인간을 불안과 고독의 심리에 빠져들게 했다. 낙관적인 전망의 관점에서 인간 개인은 열정과 의지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면서 스스로 자존을 지킬 수 있었다. 한편으로 부정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인간은 스스로 운명을 열어가야 한다는 불안감과 이에 대한 실패의 우려는 우울증과 스트레스를 불러일으켰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의 자아와 그의 존중, 존재감의 확립을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러한 고군분투는 그야말로 고군분투이기 때문에 고독과 불안에 시달리게 했다. 이러한 점은 다른 사람들과의 네트워크 연결을 욕망하도록 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많은 사적인 모임들을 통해 네트워크를 확대하였다. 이러한 점은 충분히 네트워크 이론의 바탕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결국 사람들에게 전적인 관심 대상은 자기 자신이었다.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것은 자기 자신의 인정과 존중이었다. 수평적이고 연대적이라는 불편부당의 객관적이고 단순한 관계가 아니라 자신을 중심으로 한 관계망의 형성이었다. 이를 통해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자아실현이었다. 자아실현은 단순히 자신에 대한 주목이거나 자신을 세상에 널리 드러내는 것일 수도 있고 사회문화적으로 영향력 있는 존재가 되거나 더 나아가 정치적 권력자의 위치에 오르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디지털기술과 미디어 시스템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었다. 찰스 다윈은 종의 기원의 후속판이라고 할 수 있는 성 선택의 원리라는 저서에서 인간이 진화에서 만물의 영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지적인 능력이 아니라 도덕과 윤리를 통한 공동체의 영위였다고 지적했다. 지적인 능력은 도구의 발명과 쉽게 연결될 수 있다.

 

인간의 언어에서부터 사냥, 경작도구에서부터 산업기계 그리고 정보통신기기까지 모두 인간의 지적인 능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근대 이후 인간 개개인은 스스로 이러한 지적인 능력을 강화하여 신과의 관계에서 벗어나 과학의 힘을 배가하여 테크놀로지를 더욱 발전시켜왔고, 이것이 도덕과 윤리의 공동체보다 더 우선하는 경향성을 가져왔다. 자본주의는 그러한 산물들을 상품과 시장, 자본의 논리의 동력을 활용하면서 팽창했다.

 

즉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테크놀로지가 대신하고 있고 그것이 충분히 공동체를 대체할 수 있을 것으로 간주되었다. 인간을 대체하는 사이버인간(사이보그, 안드로이드)는 정점으로 치닫고 있다. 정보통신 기술을 통해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를 테크놀로지가 대신하고 있으며 인간의 영생을 테크놀로지가 보장하는 것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물론 테크놀로지에는 인간의 진화를 가능하게 했던 도덕과 윤리의 공동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ocial network service)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을 여실히 보여주는 측면이 있다. 사람과 사람이 자유롭게 네트워킹하려는 본능은 이러한 미디어 서비스가 잘 반영하고 있다.

 

사람들이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를 이용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과 친교관계를 맺거나 사람과 어울리기 위함만이 아니다. 내가 단지 살아있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는 것만도 아니고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다른 이들에게 전해주는 욕구만 반영하는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과 이런 콘텐츠를 공유하고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소셜네트워크는 1인 미디어의 속성이 강하다는 사실에 대해 간과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비록 소셜이라는 개념이 부가되어 공동체성이 강화되어도 기본적으로 현대인이 가지고 있는 심리적 특성을 간과하는 것은 큰 정책적 실패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1인 미디어를 만드는 이유는 사람들이 자신의 사이트에 방문을 많이 하게 하는데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미디어에 사람들이 적게 오면 아예 포기하는 현상이 벌어진다. 그러나 자신의 미디어에 사람들이 출입하는 횟수가 증가하면 그것에 매우 집중하고 몰입한다.

 

만약 사람들이 단지 주변의 친구들과 친교하는데 목적이 있다면 그 네트워크 수에 관계없이 집중 몰입해야 할 것이다. 서로에게 방문을 해주는 목적은 상대방에게 도움이 되려는 것도 있지만 피드백의 상호성 원리에 따라 타아에 자아를 강화해 줌으로써 자기 자아 중심성을 네트워크를 통해 강화하려는 것이다.

 

트위터의 경우 이러한 자아집중성이 매우 강하다. 한사람의 자아를 중심으로 무제한으로 사람들이 팔로잉을 할 수 있게 했다. 이로써 양극화 현상이 심해지는데 팔로어들이 이외수 같이 120만 명에 이르는가하면 대부분은 한 자릿수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유명인이거나 영향력 있는 지위에 있는 이들이 이러한 성공 모델에 오르는 이유는 자아집중성이 강한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최대한 팔로잉해주기를 바라는 심리들이 움직이고 있는 것이고 이는 페이스북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강화될수록 자신의 입지와 존재감이 강화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영향력은 곧 권력의 중심에 이르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이 없는 상태에서 자아가 존재하거나 존중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있어야 내가 있을 수 있다. 이는 내가 있기 위해서는 너가 있어야 하며 너가 존립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네가 되고 싶은 것은 아니라 내가 되고 싶어 한다. 그러한 원칙에 위배될 때 즉 나보다는 너를 위하는 것이 더 강화될 때 네트워크에서 이반하게 된다.

 

대의와 명분이 자아위에 우월하게 존립할 때 이러한 자아중심적 네트워크는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사회적 가치만을 강조하면서 자아의 가치를 도외시하는 국가나 공동체, 비즈니스, 사회조직은 모두 붕괴된다.

 

이러한 점은 민족주의 국가나 공산주의 체제보다 자본주의 체제가 더 존립을 길게 할 수 있었던 요인이기도 하다. 자본주의는 자아의 네트워크가 가진 중심성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면서 시장적 서바이벌 요인을 동력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시장적 서바이벌은 공동체적 서바이벌에 대한 갈구와 욕망을 불러일으켜서 소셜이라는 트렌드를 태동시키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사회적 기업은 사회의 공공 가치를 강조하는 기업이지만 수익을 내지 않는 기업을 말하지는 않는다. 봉사단체와 다른 점이다. 수익을 일으키고 그 수익을 발생한 일부분을 구성원들에게 분배하는데 무엇보다 많은 사회적 기업들의 재정이 일하는 사람들이 직접 출자한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즉 강한 참여가 물리적 정신적으로만이 아니라 경제적 재정적으로도 이루어지고 이것의 관계가 끊임없이 피드백의 원리에 따라서 자기중심성과 사회적 구성의 시스템이 시너지 효과를 내는 것이다. 이는 지역의 커뮤니티 비즈니스에서도 마찬가지로 작용하는 점이다.

 

집단지성과 자아지성의 공진화 지능(egocentric co-evolution network Intelligence)

 

2007<위키노믹스>에서 돈 탭스코트와 앤서니 윌리엄스는 위키피디아를 예로 들면서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지혜를 모으는 현상을 강조했다. 2010매크로위키노믹스에서는 경제분야 만이 아니라 일상 영역에서 더 강력하게 집단지성이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집단자아와 집단지성은 공진화한다. 그것은 바로 자아와 지성의 특성 때문에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네이버 지식in이 활성화된 이유는 일반 이용자의 참여를 확대시켰기 때문이 아니라 순위등급제를 부여했기 때문이다. 순위 등급은 이 네트워크 서비스의 관리자가 아니라 이용하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부여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지식in에 기입한 내용을 보고 자체적으로 판단을 하기 때문에 네트워크의 중심성이 자연스럽게 형성된다. 물론 포털안에 갇혀 있기 때문에 자기중심적 네트워크 형성에 곧 한계를 보인다. 이 때문에 지식in은 쇠퇴하며, 블로그에 뒤이은 페이스북이나 트위터에 자리를 내주게 된다.

 

페이스 북의 경우에 사람들이 호응을 자동적으로 보낼 수 있는 기능을 극대화하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과 연결하는 목적은 바로 다만 수평적인 연대가 아니라 자기 중심성을 매우 강화라기 위한 심리적 요인에 부응하는 시스템임을 곧 알게 한다. 결국 자연스러운 네트워크협업은 자신의 생각과 사고를 드러내고 그것을 주목받으려는 자아인정욕구와 투쟁의 결과물로 볼 수도 있다. 일방적으로 뉴스를 전달받던 수용자들의 자기중심성을 채워주기 위해 네이버와 같은 포털 서비스는 위젯과 같은 방식으로 대응하기도 했다.

 

이러한 자아중심성은 단지 각 개인의 자아에만 함몰되거나 이기를 위해서만 작동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또한 개인의 지적인 능력을 위해서 정보가 제공되는 것도 아니다. 이른다 집단 지성의 개념이 더 확장된다고 볼 수 있다. 집단 지성의 개념은 많은 사람들이 모여 지혜를 발현할 때 한 개인보다는 현명할 수 있다는 점을 말하지만 자아 중심적 지능은 자칫 개인의 지성만을 더 낫게 하는데 네트워크가 활용된다는 점을 강조할 수 있게 된다.

 

대체적으로 집단 지성은 각 개인들은 거세되고 집단적 결과물만을 평가하는 경향이 크다. 그러나 집단 지성에서도 여전히 각 개인은 살아 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더 진화한다. 각개인의 진화는 집단의 지능에 영향을 주고 다시 집단 지성의 증가는 각 개인의 지성에 영향을 준다. 하지만 각 개인들이 집단 지성 이벤트에 참여하는 것은 단순히 집단을 위해서만 아니고 자신을 위한 측면에서 기인하는 바가 크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자아통제감과 사회적 자아의 공진 형성

 

전자동 자동차가 실용화가 되지 않거나 자전거의 부활, 그리고 게임의 한류 콘텐츠 1, 스마트 시스템은 모두 개개인의 통제감을 극대화시켜주기 때문에 존립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따라서 앞으로도 이렇게 자아의 통제감을 통해 미디어와 그에 따른 네트워크는 진화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반드시 그러한 메커니즘이 각 자아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과거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오마이뉴스> 같은 콘텐츠는 자아의 영역과 사회적 영역이 같이 혼재되는 듯이 보이는데 모두 자아가 사회에 연장되고 다시 사회가 연장되는 연결메커니즘을 가지고 있다. 그 시작점은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도 흔적이 발견된다, 오 마이 캡틴! 문화유산은 사회적 가치와 존재적 본질성을 가지고 있는 대상으로 장려되고 고평가 되지만 나의 입장이나 견해가 없다면 가치를 잃을 것이고 그것을 찾기 위해 사람들은 노력한다.

 

이점은 정확하게 콘텐츠의 성공을 이끌었다. 뉴스는 대개 개인보다는 사회적 가치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이 나의 관점이나 의식과 맞물릴 때 의미가 발현되고 지속성은 유지가 될 것이다. 이러한 메커니즘에서는 자아는 사회로 연장되고 좀 더 큰 자아가 형성된다. 이른바 사회적 자아를 형성해 가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사회를 형성하는 시민과 국민의 자아중심성이다. 그것은 서로 진화하는, 자아 중심적 공진화 지능(egocentric co-evolution network Intelligence)이 될 것이다.

 

디지털 미디어 네트워크에서는 자아의 중심성이 다른 이의 중심성에 서로 뒷받침될 때 사회적 자아를 형성할 것이고 이는 자연스럽게 거버넌스의 공진지성으로 연결될 것이다.

 

정책적 함의

 

참여의 메커니즘은 단순히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통제감을 통해서 자아 존중감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다.

 

흔히 자아심리학에서 말하는 자아실현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지성을 상승시키면서 자아의 지성도 상승하기를 바란다. 이런 면에서 서로 진화하는 이른바 공진화 현상이 집단지성을 넘어서서 개개인과 집단에게 발현된다. 집단지성의 진화가 개개인의 지성 진화로 연결되고 그것이 자기 통제감-자아 존중감-자기실현으로 이어질 때 다시금 진화의 궤적으로 연결될 것이다.

 

정부가 해야 할 일은 이런 시민과 수용자들이 언제 어디서든 자신들의 자아를 중심으로 한 네트워크를 구축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그것이 집단 지성의 형태로 정부영역에 반영될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또한 이런 것이 집단지성과 공진화의 형성을 이룰수 있도록 유도하는 정책이 필요하다.

 

이것이 플랫폼 정보가 거버넌스 원칙을 실현시키는 기제로 삼아야할 방향성이 될 것이다. 시민은 단지 참여와 소통을 하는 객체적 대상이 아니라 네트워크의 능동적 중심이 되도록 실현시켜주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