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

‘뿌레땅뿌르국’과 ‘마더’ 그리고 국가제도 수준

부드러운힘 Kim hern SiK (Heon Sik) 2009. 5. 6. 21:44

‘뿌레땅뿌르국’과 ‘마더’ 그리고 국가제도 수준

 

KBS <개그콘서트>에서 새로 선보이고 있는 ‘뿌레땅뿌르국’ 정치와 제도, 국가에 대한 생각을 하도록 만든다. 표류하던 한 사람이 무인도에 도착한다. 대개 무인도에는 아름다운 풍광의 낙원으로 묘사된다. 따라서 외롭기는 하지만 낭만적인 나만의 공간, 이상향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이에 표착자도 매우 기뻐한다.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기 통제감과 일탈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엄연하게도 이 섬에는 사람이 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섬은 하나의 국가다. 이른바 그 나라의 이름은 ‘뿌레땅뿌르국’이다. 현실에서 살만한 공간이면서 국가 체제가 없는 곳은 없다는 점을 일깨운다. 현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낭만적 무인도의 개념을 걷어내고 정치와 제도, 국가의 현실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러한 딱딱하고 거시적인 단어들을 넘어서서 ‘뿌레땅뿌르국’은 유쾌하다.

우선 ‘뿌레땅뿌르국’의 인구는 3명이다. 대통령도 있고, 경찰청장에 문화부 장관, 통일부장관도 있다. 여기에 교장, 일반 교사도 있다. 교사가 있으니 학생(주번)도 있고, 학부모도 있다. 이렇게 되면 말이 되지 않는다. 3명인데 정작 많은 직업군이 있으니 말이다. 결국 해법은 한사람이 여러 직업이나 지위를 겸하게 된다.

특히 웃음을 주는 것은 ´그 사람들이 그 지위에 적합한가´라는 물음을 던져주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중국집에 주문할 때 자장면으로 통일했기 때문에 통일부장관이 되었고, 다른 이는 전화로 주문을 해서 정보통신부장관이 되었다. 그들은 시민도 되고 통치자도 된다.

그런데 새롭게 유입한 표류자를 자기의 통치 체제와 제도적 영향력에 복속시키려 한다. 하지만 그 논리들은 말이 엉터리이기 때문에 새로운 유입자는 비웃고 만다. 예컨대, 처벌이 남자간의 키스다. 또한 친한 표시로 따귀를 날리는데 정작 국민은 대통령에게 따귀를 날리려하자, 국민과 대통령은 친하면 안된다고 거부한다. 이렇게 그들은 모순적이고, 자기중심적이다. 더구나 그들은 자신들의 권력욕을 채우기 위해 배신을 밥 먹듯이 하는데 상대의 옆구리에 칼을 꽂는다. 그런데 그들은 통일부장관이며, 학부모이고 학생이기도 하면서 대통령이자 경찰청장이고 선생님이다.

결국 모순적이고 불합리한 정치권력과 제도 그것을 움직이는 자들의 등장은 비단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려준다. 그것은 그동안 정치개혁을 부르짖으면서 새 인물들이 수없이 정치권에 갔지만 구태가 여전한 것과 같다. 그것은 사회적 성격의 문제일 수도 있고, 사회적 문화수준에 기인하는 것일 수도 있다. 종국에는 그것은 한 사회의 대중적 욕망에서 비롯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러한 대중적 욕망은 거창하거나 과잉인 것이 아닐 수 있겠다. 영화 ´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에서 마이클의 연인이었던 한나는 SS친위대에서 가드로 활동했는데, 그녀가 그곳에서 일한 이유는 단지 먹고 살기 위해서라고 했다. 글을 알지 못했던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렇게 몸을 사용하는 일이었다.

더구나 처음부터 친위대가 유태인 학살을 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영화는 주인공 한나를 선한 인간을 보여주기 보다는 개체를 유지하기 위한 개인으로 보여주는데 치중하게 되고 모순적인 정치권력의 등장과 팽창은 일상에서 출발하며 다시 되돌아온다는 점을 15살 소년과 36살의 여인 이야기를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결국 ‘뿌레땅뿌르국’과 같이 모순적이고 비합리적인 정치권력과 제도는 일상과 분리되어 있지 않다. 영화 ‘핸콕’에서 수퍼 히어로 핸콕은 대인관계 장애, 정서장애를 가지고 있다. 그는 그러한 장애를 통해 결국 이길 수 없는 것이 있음을 알게 된다. 그것은 외로움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욕망은 결국 다른 사람, 대중의 인정을 받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그는 적극적으로 국가 제도와 연대한다. 하지만 얼마 전까지 그 국가 제도는 자신을 위협했던 것이다. 이제 핸콕이 행사하는 폭력은 합법이 된다.

영화 ‘괴물’에 이어 ‘마더’는 국가 제도와 정치권력에 대한 이분법적인 태도를 유지한다. 결국 제도나 권력은 개인을 보호해주지 못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그 이면에는 국가와 제도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과 냉소주의가 있는데, 그것은 창작자의 도덕적 우월성을 바탕을 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담론은 이미 낡았고, 식상하다. 87년 체제의 산물로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개인은 훌륭한데, 무도한 제도와 시스템은 엉터리다?" 그것은 일부 강자, 힘있는 자들의 문제다. 중요한 것은 개인들은 훌륭한데 왜 그들이 모여 만들었거나 운용하는 제도와 시스템이 엉뚱하게 움직이는가다.

물론 대중영화이기 때문에 한 번 더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개인과 제도, 시민과 권력은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불가분의 관계라는 점을 영상화하면 진보적이지 않다는 영화적 철학은 의미 있는 영화 콘텐츠를 추구하는 이들에게는 더 이상 의미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