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왜 천명공주는 죽어야 하는가

부드러운힘 Kim hern SiK (Heon Sik) 2009. 8. 10. 17:09

왜 천명공주는 죽어야 하는가

-제왕의 씨를 타고나지 못하면 악녀가 돼야하는 한국드라마



김헌식 문화평론가

고대를 다룬 드라마들은 고대인들의 사고 체계를 예언이나 주술로 풀이하고, 이를 통해 스토리텔링을 구사한다. 현대인들이 보기에는 무지몽매한 계시와 그에 대한 신봉이 없다면 이야기 자체가 성립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제왕의 씨는 따로 있다는 틀거리를 한국 사람들은 참 좋아하는 모양이다.


드라마 ‘주몽’에서 주몽-추모(송일국)는 삼족오의 기운을 타고, 새로운 나라의 제왕으로 점지 받고 태어난다. 결국 그는 무도한 부여국을 떨치고 새로운 제국 고구려의 왕이 된다. 심상치 않은 기운은 드라마 ‘대조영’에도 등장한다. 대조영(최수종)이 출생할 당시 안시성에 유성이 떨어진다. 제왕지운(帝王之運)이라며 연개소문을 비롯한 일파들이 제왕의 씨인 대조영을 없애려 한다. 대조영은 우여곡절 끝에 살아남아 고구려를 대신하는 발해를 세운다.


‘태왕사신기’에서 담덕(배용준)은 애초부터 쥬신의 제왕인데, 담덕이 출생할 때 쥬신의 별이 떴기 때문이다. 애초에 천족인 환웅은 땅에 내려와 쥬신의 나라를 건설하는 데 실패하고 하늘로 돌아간다. 돌아가면서 환웅은 후대에 다시 쥬신의 제왕을 보내겠다고 약속한다.


그 쥬신의 제왕이 담덕-호태왕(광개토대왕)이다. 그 징표가 ‘쥬신의 별’이다. 고구려 계통의 드라마는 주로 하늘과 관련이 있다. 삼족오와 별이 이를 상징한다.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그 계시를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모든 행동과 사고체계를 맞춘다.


신라를 다룬 드라마 ‘선덕여왕’에도 이러한 계시는 등장한다. '어출쌍생(御出雙生) 성골남진(聖骨男盡)'이라는 말을 통해 이를 알 수 있다. 이는 왕비가 쌍둥이를 낳으면 성골 남자의 씨가 마른다는 말이다. 그래서 덕만을 없애거나 피신시키려는 노력들이 있게 되고, 미실은 덕만을 살려 성골남진을 증명하려 한다. 천명공주가 죽음에 이르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 있다. 미실이 두려워하는 것은 자신을 대적할 존재(덕만)다. 그 두려움은 바로 북두칠성의 계시 때문이다.


그러나 두 명의 공주가 살아있다면, 미실에게 대적할 수 없다. 한명의 공주가 죽어야 다른 공주가 살 뿐만 아니라 미실과 대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천명의 죽음으로 덕만은 마지막 남은 여성 성골로 여왕에 등극한다. 결국 저주받은 존재는 덕만이 아니라 천명 공주인 셈이다.


연어가 회귀하는 것처럼 덕만은 갖은 고생을 통해 리더로 성장하고, 천명은 궁에서 갖은 고민을 다하지만 결국 스러져갈 운명이었던 것이다. 모든 등장인물들이 말도 안 되는 주술을 철썩 같이 믿는다. 심지어 하늘이 내린 말은 없다고 큰소리치는 미실조차 말이다.


어떻게 보면 드라마 ‘선덕여왕’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주인공의 성공 이야기다. 반대로 신분 계급 사회를 넘어보려는 이들의 실패이야기다. 미실은 능력이 뛰어남에도 여왕이 될 수 없다. 그 능력은 결국 기존의 기득권 세력에게는 위협이 될 뿐이다. 능력 있는 여성은 결국 악녀가 된다. 더구나 성골이 아닌 진골들은 아무리 뛰어난 능력이 있어도 왕이 될 수 없다.


‘성골남진’이라는 현상이 있었기 때문에 선덕여왕이 탄생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선덕여왕이 여왕의 자리에 오른 것은 그 시대적 배경으로 보았을 때 능력을 구비했기 때문이다. 드라마에서 보이는 '한 명의 공주만이 살아남아야 한다'는 밑도 끝도 없는 예언적 서사구조는 너무 단순한 주술적 합리화다. 그것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미실을 끌어들이고, ‘어출쌍생’이라는 컨셉을 덧붙인 것은 자칫 능력보다는 이미 예정된 자질이나 운명이 중요하다는 편견을 강화시킬 가능성이 크다.


‘태왕사신기’의 연호개(윤태영), ‘주몽’의 대소(김승수), ‘대조영’의 이해고(정보석)는 모두 능력이 뛰어났음에도 불구하고, 하늘의 계시를 받지 못해 제왕이 되지 못한다. 그들은 악당으로 전락해버렸다. 처음부터 제왕의 씨는 따로 있기 때문에 그것을 벗어날 수는 없는 것이었다. 드라마 ‘선덕여왕’도 이러한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왜 한국의 고대 드라마들은 이렇게 ‘왕의 씨’가 따로 정해져 있다고 그리는 것일까.


자칫 대중들이 영웅은 날 때부터 다른 징조가 있다는 그러한 편견에 빠져있기 때문에 시청률을 겨냥한 드라마 구조들이 복제품처럼 쏟아져 나오는 것인지 모른다. 하지만 이순신처럼 한국의 영웅은 씨가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둔(屯)의 철학에 따라 만들어져왔다.


물론 그러한 점들을 그린 작품이 더 훌륭하다. 그것이 어렵기 때문에 한국의 드라마들은 주술의 합리화를 통해 고대로 퇴행하는 것인지 모른다. 판타지 소설과 영화, 만화가 범람하는 21세기 한국은 새로운 주술의 세기인지 모른다. 그만큼 현실이 팍팍하다는 증거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