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

힐링 열풍 속살, 그 진실

부드러운힘 Kim hern SiK (Heon Sik) 2012. 8. 15. 12:35
힐링 열풍 속살 드러낸 혜민 워킹맘 논란
<김헌식 칼럼>덮고 나면 허허로운 치유 콘텐츠 현상
김헌식 문화평론가 (2012.07.07 10:3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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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혜민스님 TV 강연 인터넷 화면 캡처.
혜민 스님과 워킹맘의 트위터 입씨름은 육아와 노동에 대한 관점의 차이에서 벌어진 일인지 모른다. 새벽에 좀 더 일찍 일어나 아이를 돌보라는 말은 이상적으로 보이지만 또한 여성의 현실을 간과한 것이다. 근본적으로 보면 힐링 열풍 속에서 멘토가 현실의 구체성 위에서 치유를 모색하지 않고 추상적이라는 점에서 이를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는 게 아닌지 생각해보게 만든다.

정말 힐링 열풍이 수년 째 대한민국을 주도하고 있다. 힐링카페가 생기는가하면 출판가에도 힐링과 치유에 관한 책이 범람하다시피 한다. 치유 영화에 힐링 연극도 생겼다. 마음을 치유한다는 노래에서 스토리텔링 콘서트도 유행이다. 지역으로 내려가 치유의 길, 치유의 숲이 생겼다. 사회적 흐름은 문화콘텐츠의 유행을 선도하고 있다. 문제는 세가지다. 상처의 책임문제 귀속 여부와 상처 치유가 근본대안인지 물어야 하며 그 치유의 멘토링이 얼마나 현실적인 적용력이 있는지 따져야 한다.

치유가 있으려면 상처가 있어야 한다. 당연하게도 상처가 많은 이들이 있기에 이런 치유관련 콘텐츠가 부각되고 있는 것이겠다. 현대인들은 모두 정신이 아프기 때문이라고 한다. 자본주의 시스템 자체 때문이라고도 한다. 이 때문에 힐링은 대세이고 당연지사라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함량 미달의 치유 콘텐츠 때문에 오히려 아프다는 지적을 한다. 상처받은 사람들이 치유를 받으려 했다가 상처가 더 곪는 셈이 되겠다.

그렇다면, 치유 자체 담론에는 좀 더 생각해봐야 할 꺼리가 없는 것일까? 이렇게 의문을 던지는 이유는 힐링의 대상 상처가 과연 존재하는 것인지 그리고 힐링 자체가 대안인지 살필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일단 치유는 원래대로 되돌려 놓는 것을 말한다. 상처가 나기 전으로 원상회복하는 게 치유이다. 그렇다면 원래의 상태가 완전했다는 가정에 따른다. 이는 매우 유아적인 퇴행성을 의미할수도 있다. 옛날에는 완전했는데 지금은 엉망이라는 식의 태도이기 때문이다. 과연 과거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최선일까.

인간은 성장하는 존재이다. 분명 과거보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은 경험과 사고를 통해 성숙해간다. 또한 앞으로 더 성숙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전의 상태를 그리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아의 역량을 확장시키는 노력이 필요하다.

마틴 셀리그만 등이 주도하는 긍정심리학정신분석학과 달리 상처 자체의 치유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불확실한 상황은 상처를 크게 하므로 그러한 상황에 대처할 심적 정신적 역량을 배가하는 노력이 필요한 이유가 되는 것이다. 아울러 서로가서로를 상처준 사람으로 자신을 상처받은 사람으로 규정하는 시스템의 개선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자칫 치유의 행태는 이런 자아의 확장이 아니라 예전 상태로 되돌리는 수동적인 차원에 머물고 만다. 이런 수동적인 차원의 행태가 범람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역량이 줄어드는 것을 말한다. 기업가적 정신보다 안정적인 공무원이나 교사직에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에서 알 수 있고 미혼자의 급증과 중년 캥거루족이 늘어나는 것도 이같은 맥락에서 접근할 수 있다. 사람들과 겪으면서 갈등 자체를 피하겠다는 심리는 상처를 받지 않겠다는 의식과 연결되어 있다.

치유와 힐링은 상처받은 사람들을 찾아낸다. 하지만 상처를 주는 사람은 관심이 없다. 다시 말해보면 상처를 받아 치유가 필요한 사람은 많은데 상처를 준 사람은 찾아볼수 없다. 영화의 주인공은 모두 상처를 받은 사람이며 책은 모두 상처받은 사람들을 위안하고 멘토하는 책들이다. 정작 필요한 또다른 것은 상처를 주지 않기, 상처를 발생시키지 않는 방법일 것이다.

절대적으로 단순히 본인이 상처를 받지 않는다고 상처를 해결한다는 것은 될 리 만무하다. 우리는 이순간에도 누군가에 상처를 주고 있다. 자신이 상처를 받았다는 이유로, 그럴 위험성을 방지한다는 명분으로 더 원초적으로 먹고살기 위해서라는 이유로 말이다. 상처를 주는 것도 결국 자신의 상처가 되며 앞으로 진보하기 위한 힘을 앗아간다.

사회경제학적으로 볼 때 천박한 이윤 중심의 논리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있다면 이는 단순히 가벼운 치유콘텐츠를 소비한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미시적으로는 구체적인 문제와 모순을 해결하고 사회국가적으로는 시스템의 진단과 비전의 도출 그리고 공유가 중요하게 된다. 단지 상처만 치유해도 육체의 면역력이 약하다면 매번 상처가 나고 고통에 시달릴 것이다. 더구나 속세를 떠난 치유와 해법은 공허감을 더하게 할 수 있다.

스님들의 말씀이 최고의 베스트셀러가 되는 것은 반갑기도 하면서 그렇게만 여길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런 점이 혜민스님과 워킹맘 논란에 연결되어 있다고 본다. 워킹맘에게 육아는 단순히 위로나 마음가짐만으로 되는 문제가 아니라 사회경제적 요인과 밀접하기 때문이다. 단지 몇분 일찍 일어난다고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오로지 여성에게만 그 책임을 떠넘기는 것은 더 타당하지 않다.

글/김헌식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