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블시네마 리뷰

혈연의 엄마인가, 같이 자란 의형제인가.

부드러운힘 Kim hern SiK (Heon Sik) 2019. 5. 9. 22:47

혈연의 엄마인가, 같이 자란 의형제인가.

-영화 나의 특별한 형제

 

김헌식(평론가, 박사)

 

 

낳은 부모냐 아니면 키운 부모냐 이런 질문은 많다. 다른 질문도 가능하다. 낳은 부모냐 아니면 같이 지내고 성장한 의형제냐? 당연히 혈연이 섞인 부모라고 할 수 있을까. 부보님이 아니라 보육원에서 자란 지적 장애인 청년을 뒤늦게 부모님이 찾는다면 그 청년은 부모님을 선뜻 따라갈까. 더구나 보육원에서 함께 동거동락을 한 비혈연의 형이 있다면 어떨까. 같이 생활을 하는데 이미 너무나 친숙한 청년으로 성장했다면 달라질 것이다. 어린 아이상태로 있는 경우보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아직 아이는 부모의 보호가 필요한 때와 다 성장한 청년일때는 다를 수밖에 없다.

 

이렇게 질문을 던질 수도 있다. 부모님과 함께 산다고 반드시 행복할까. 이미 독립을 해야 할 나이인지 모른다. 요즘에는 캥거루족들이 많기는 하지만 말이다. 아이에게는 정말 부모가 필요한 시기가 있다. 그 시기를 넘긴다면 오히려 아이에게는 짐이 될 수 있다. 이미 자신의 삶과 생활이 있는 청년으로 거듭났다고 하면 반드시 가족 구성원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을까.

 

어머니가 아이를 찾는다는 건 참 부담스런 일일 수 있다. 어머니는 자신이 아이를 버린 잘못을 속죄하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이 못다한 역할을 뒤늦게라도 만회 하려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머니는 이중 삼중으로 더 어려움 속에서 그 역할을 해야 한다. 지적 장애인아들은 그동안 많이 달라져 있지만 엄마는 옛날 기억에만 의존해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청년이 된 아이가 엄마에 대한 상처 나아가 원한이 있다면 더 힘들게 할지도 모른다.

 

과거에 머물러 있다면 아이를 함께 데리고 살고 싶은 가족의 모습을 지금 구현하려는 것은 맞는 것인지 모른다. 하지만 시간은 흘러갔고 각자의 삶은 성장하거나 최소한 어떤 형태로든 형성되어 왔다. 과거로 되돌아가려 하는 모습은 당연한 것이지만 그 어떤 것도 미래로 와 있는 상황에 적절한 지는 알 수가 없다.

 

지적 장애인 동구와 엄마 사이의 문제라면 단순할 수도 있고 너무 평이한 스토리가 되는데 그칠 수 있었다. 엄마가 아이를 찾아가는데 강력한 방해자로 등장하는 것이 같이 오래 산 새하(신하균)이다. 그런데 이채롭다. 영화는 착한 척하지 않는다. 새하는 그렇게 고분구분하게 말하지도 않는다. 어떻게 보면 못된 사람으로 보이기도 한다. 말을 함부로 하기도 하고 자신의 욕망을 가감 없이 드러내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남을 착취하거나 부당한 요구를 하지 않는다.

 

이런 캐릭터가 등장한 것은 평가 작업들의 성과가 아닐까 싶다. 장애인이 항상 착하게만 등장한 필요는 없다는 지적은 많았다. 장애인도 비장애인과 다를 바 없이 각자 성격과 스타일이 있다. 또한 상처를 많이 받을수록 그것에 상응해 독해질 수도 있는 것이다. 새하게 말했듯이 강하게 요구하지 않으면 들어주지 않기 때문에 강한 성격으로 변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는 영화에서 동구의 입장을 대변하는 캐릭터이기도 하다. 장애인의 자립 생활을 다룬 인사이드 아임댄싱’(Inside I'm Dancing, 2004)의 로리(제임스 맥어보이)를 떠올리게 한다.

 

지적 장애인이라고 할 수 있는 동구를 수영장에 버려두고 떠난 엄마에게 강하게 질타하는 모습은 단지 새하의 성격 탓만은 아닌 것이다. 지적 장애인 동구가 자신의 의사표현을 논리적이면서도 강하게 할 수는 없다.

 

새하의 역할은 동구에게 그런 판단과 표현의 대리인이자 아바타였다. 동구에게 없는 지적 능력이 새하에게는 너무 충만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게 둘은 서로 없는 부분을 상호 채워주면서 살아왔다. 잘 보살펴준 신부님이 돌아가셨는데도 다른 아이들이 타 시설로 가는 중에도 자립 생활을 할 수 있는 힘이 되었다. 새하는 지체(척수) 장애인이기 때문에 동구가 필요했다. 이용한 것 아닌가 할 수도 있지만 목조차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중증 장애인이기 때문에 그러한 단어를 적절하게 사용하는 것도 의문일 수 있다. 아무런 보호자가 없는 상황에서 동구가 그나마 청년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새하덕분이었고, 새하도 동구의 도움으로 삶을 영위할 수 있었다.

 

혈연이 우선인가 같이 지낸 가족이 우선인가 하는 단순한 설정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현실에서 이렇게 살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싶기도 하다.

 

가족은 정말 혈연에 기초해서 구성되고 영위되는 것인지 21세기에 가족은 점점 느슨한 연대로 변화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익숙하게 살아온 세월이 가족의 재구성을 이루는 환경은 얼마든지 가능할 수 있다. 그것을 혈연이라는 이유 때문에 깰수 만은 없다. 혈연자가 해줄 수 없는 가족의 역할과 입지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살아가는데 실제 도움이 되는 것들은 피가 섞인 이들이 해줄 수 없는 경우도 오히려 증가하고 있는 사회구조이기도 하다. 정말 가족이라면 가족 구성원이 잘 살 수 있는 행복한 삶의 방식을 선택하게 만드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겉으로 드러난 현상으로 볼 때 악과 선이 있어 보이지만 그것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의 선택과 행동에는 절대 악이 있지 않는 경우가 더 많다. 나름의 선한 의식을 갖고 있지만 상황이 그렇게 유발하고 있음을 간과한다면 불행한 결과를 만들어내는 인과관계를 강화하게 될 수도 있다.

 

영화는 마지막에 대안 가족적 결론을 내기도 한다. 동구와 새하가 같이 어울릴 수 있도록 만들어준 것이다. 새하도 입으로 조정하는 전동 휠체어를 사용할 줄 알게 되어 동구가 반드시 밀어주지 않아도 된다. 새하는 이렇게 말했다. “약한 사람들끼리 서로 돕고 사는 거라고 신부님이 말씀하셨다.” 부족할 것 없는데 왜 동구를 찾아오냐고. 부족함이라는 것은 반드시 물질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것. 우리가 모두 부족해하는 것은 그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