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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물 형사가 도시 질주를 하는 이유

부드러운힘 Kim hern SiK (Heon Sik) 2009. 4. 25. 02:50

퇴물 형사가 도시 질주를 하는 이유

06.04.25 14:27



영화 <식스틴 블럭>은 단순 명쾌하다. 처음부터 관객은 단순명쾌한 것을 예상하고 스크린을 맞는다.

리차드 도너감독의 스타일을 아는 이들이라면 영화가 어느쪽으로 흐를 지 쉽게 예상할 수 있다. 악당과 정의의 주인공! 전형적인 버디 영화라는 점은 영화의 진행 방향을 명확하게 예상토록 한다.

죄인을 호송하는 경찰관. 10시까지라는 시간, 16 블럭이라는 공간의 제약도 확연하게 만든다. 단순 명쾌 속에 전복을 깔아두는 것을 잊지 않는다. 자신이 보호해야 할 증인이 자신을 결코 보호해주지 못함을 아는 순간, 모든 것이 뒤바뀐다.

경찰이 경찰을 상대로 싸워야 하며 자신은 경찰이 아니라 경찰을 쏜 흉악한 범죄자가 된다. 이러한 역설 자체가 삶이라는 사실에 무료한 일상에 지쳐 있던 술주정뱅이 경찰 잭(브루스 윌리스 분)은 순순히 받아들인다. 자신의 목숨을 내걸고 수감중인 증인 에디(모스 데프 분)를 법원으로 죽자 사자 데리고 가려 한다.

자신이 증인을 무사하게 법원에 데려다 주는 순간 자신의 안전을 보장해주지는 못하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부패 경찰안에 자신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감옥에 갇히는 것이 뻔한데 증인을 법원에 데리고 가는 주인공 잭은 20년 지기 친구이자, 악당 경찰도 배신한다.

왜 그는 목숨을 내놓으면서도 도시를 질주해 에디를 법원에 데리고 가려는 것일까? 양심의 가책 때문일까? 아니면 정의감에 갑자기 개과천선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기 때문일까?

이 역설적인 상황에서도 증인을 법원에 데려가는 이유는 아마도 에디가 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이들에게 케익을 만들어주는 제과점을 열겠다는 에디. 빼곡하게 다양한 케익 만드는 법이 적혀있는 그의 노트는 인생의 끝에 있는 퇴물 형사의 꿈을 잃어버린 감수성을 자극한다. 잭에게 꿈은 있었던가.

랩퍼이자 배우인 모스 데프의 연기는 소박한 꿈을 지닌 흑인의 이미지를 한껏 고조시켰으며 카리스마 넘치는 데이비드 모스의 역할은 이러한 꿈을 해치는 부패경찰의 이미지로 충분했다. 그리고 잭은 꿈을 지켜주려는 수호자로 보인다. 퇴락해가는 공권력의 상징인 그가 흑인의 꿈을 보호해 준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인가.

캐릭터라는 차원에서도 부패한 경찰이지만 선한 주인공이라는 설정에 동감한다면 어려울 것 없이 영화는 더 단순 명확해진다. 퇴물 형사를 연기하기 위해 절름발이 연습을 치열하게 하고 살을 찌워 배불뚝이가 되었다고 그의 캐릭터가 크게 바뀌지는 않는다. 수염에 10㎏ 이상 몸무게를 몸무게를 늘리고, 신발에 작은 돌멩이를 넣어서 걸어다녀 절뚝이는 잭을 연기해도 여전히 그는 뭔가 주류에 삐딱하게 걸쳐 기대어 있는 인물이기에 <다이하드>의 맥클레인과 닮았다.

더구나 맥클레인과 같이 자신의 뜻과는 관계없이 아주 곤혹스러운 일에 더럽게 엮여버린다. 비록 그렇게 엮이더라도 살신성인의 자세로 성공해내고야 만다. 다만, 지나간 삶의 역정에 찌들어 버릴대로 버린 잭은 <다이하드>와 같은 날렵하고도 팔팔한 액션 경찰의 모습을 보이지는 않는다. 맥클레인이 오히려 나이 들어 인생과 삶을 반성하고 성찰하고 그것을 통해 에디와 하나씩 짚어가는 과정을 그리는 듯하다.

그렇지만, 버스 질주의 최종 장면이라든지, 지하철에서 우연히 에디를 찾는 장면은 명쾌하지만은 않다. 아파트와 앰뷸런스 바꿔치기나 법원의 반전은 단순 명쾌하다. 그것은 어디선가 많이도 본 장면이기 때문이다. 이것말고도 빈번하게 액션 영화에서 많이도 본 장면들을 이 영화는 단순 명쾌하게 연결지어 놓은 것이 장점이자, 새로울 것 없는 한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