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크놀로지와 문화 콘텐츠

불편한 통제감의 쾌락과 웨어러블 테크놀로지

부드러운힘 Kim hern SiK (Heon Sik) 2019. 3. 18. 09:42

´아이언맨´의 로봇과 민주주의

-웨어러블 통제감과 테크놀로지의 참여 심리



                                   김헌식(카이스트 미래세대 행복위원회 위원, 문화콘텐츠학 박사)

 

<아이언맨은>은 캐릭터를 중심으로 한 마블 히어로물 시대의 신호탄이었다. 이 작품이 있었기 때문에 뒤에 다양한 형태의 마블 히어로물이 제작되고 흥행에 성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영화를 통해서 단순히 마블의 영화제작 방식과 그 해당 작품의 히어로물에 관해서 분석을 할 수 있지만 그런 콘텐츠가 성공할 수 있었던 문화 심리적 요인이 있었음을 간과할 수가 없다.이러한 점은 앞으로 테크놀로지를 활용한 많은 서비스나 콘텐츠들이 대중 수용력을 갖기 위해 어떤 점들을 주안점에 두어야 하는 주목해야 함을 내포한다.

 

이 영화의 핵심적인 컨셉은 착용형 로봇 즉 웨어러블(Wearable) 테크놀로지에 기반하고 있다. 이는 현실과 다른 것도 아니다. 착용형 로봇공학은 관련 특허들이 쏟아질 정도로 활발하게 연구되고 있는 분야이다. 본래는 장애인이나 노약자들의 근육 증강을 위해서 발달한 공학이지만, <아이언맨>에서는 영웅의 탄생에 활용되었다. 여기에서 오락적인 요소는 대중의 몰입도 증가와 그에 따른 쾌감의 선사에서 비롯한다.

 

마티아스 호르크스(Matthias Horx)<테크놀로지의 종말>에서 인간의 본능을 외면하는 기술은 도태될 것이라고 말한다. 인간의 본능을 염두에 두는 테크놀로지를 생각하면, 무조건 인간이 편해지려는 본능을 떠올릴 가능성이 높다. 문명의 진화궤적을 본다면, 귀차니즘의 속성이 인간이라고 생각할 만하다. 그러나 마티아스 호르크스가 말하는 인간의 본능은 테크놀로지의 발달을 통해 무조건 편해지려는 경향이 아니다. 예컨대 전자동 자동차 기술은 열광속에 등장했지만, 결국 사라졌다. 전자동 자동차 기술은 인간이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아도 목적지까지 도달하게 만드는 기술이다.

 

그렇다면 이 기술은 왜 사라졌을까? 그것은 바로 인간은 편한 것만 추구하는데 즐거움을 얻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무엇인가를 성취하는 것에서도 강력한 쾌감을 얻기 때문이다. 즉 자신이 조작 혹은 작동시키면 피드백으로 어떤 반응이 전해져 올 때 강력한 즐거움을 얻는 것이다. 예컨대, 자동차의 페달을 자신의 근육으로 밟을 때 자동차가 움직이는 것에서 즐거움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전자동 자동차는 이러한 즐거움을 제공하지 못한다.

 

이는 새삼 자전거가 부활하는 이유와도 맥락이 닿는다. 단순히 건강을 위해서 자전거를 구입한다고 보는 것은 심리적 피드백이 주는 즐거움을 외면하는 것이 된다. 자신의 근육으로 페달을 밟았을때 자신과 자전거가 이동하는 것은 외면할 수 없는 쾌감을 준다. 이는 자신의 근육을 통해서 무엇을 하려는 것이고 좀 더 넓혀서 보면 자기 통제감(self-controlling)의 심리와 맞닿아 있다.

 

워쇼스키 남매의 <스피드레이서>라는 영화에서 마하5의 속도로 달리는 자동차 경주의 영상미학을 시도했다. 이 영화에서도 헬기는 인간의 손으로, 자동차도 역시 손과 발로 운전했다. 마하 5정도의 속도를 내는 자동차는 만들 미래라면 전자동 기술이 주류이어야 함에도 여전히 그들은 손과 발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주인공들인 마하의 속도를 달리는 자동차를 집안에서 자신들의 손과 몸으로 직접 만든다. <아이언맨>에서도 토니 스타크는 동굴속에 갇힌 채 열악한 환경에서 마치 대장장이 처럼 자신의 근육으로 웨어러블 로봇을 만들어 탈출에 성공한다.

 

무엇보다 여기에서 초점은 웨어러블 로봇의 매력이다. 영화 <아바타>에서 지구 지상군의 최대 무기는 전자동 로봇이 아니라 웨어러블 로봇이었다. 인간이 로봇의 몸체에 들어가 조종하는 것이었다. 사실 아바타라는 존재도 웨어러블과 같은 맥락 안에 있다. <아이언맨>에서 웨어러블 로봇은 인간의 몸이 조정하는 대로 엄청난 힘을 발휘한다. 심지어 간단하게 하늘을 날 수 있고 상대를 제압하거나, 폭발을 일으킬 수도 있다. 물론 <아이언맨>의 웨어러블은 전자동이 아니다. 만약 인간의 의식으로 모든 것이 움직이는 자동 로봇은 대중적 인기가 없이 참담한 실패를 할 게 분명하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천공의 성 라퓨타>, <모노노케 히메>, <붉은 돼지> 등도 역시 인간의 자기통제감을 통해 테크놀로지의 활용의 사례가 된다. 악당들은 주로 첨단테크놀로지를 통해 손쉽게 무력을 사용하지만, 주인공들은 자신의 손과 발을 통해 움직이는 무기와 이동 수단 등을 활용해 이에 대항하거나 자신의 목적을 이루어 나가게 된다. 물론 미야자키 하야오는 자연과 인간의 조화, 테크놀로지와 인간의 조화를 통해 새로운 대안을 모색한 측면이 있다. 다만 심리적으로 보았을때 테크놀로지를 조정 혹은 조율하면서 성취감을 느끼는 사람의 심리가 투영되어 있다. 단순히 자연과 인간의 조화, 공학과 인간의 조화정신을 투영했다고 대중적 몰입이 증가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트랜스포머'시리즈도 마찬가지 맥락에서 대중적으로 선호되었다. 사실 엄청난 흥행을 한 '트랜스포머'시리즈는 말도 안 되는 영화다. 실제 우주개발에 참여한 전문가나 정보기관원들이 보면 실소를 금할 수가 없다. 여기에서 말이 안된다는 의미는 진실과 매우 거리가 멀다는 의미다. 그런 점을 일반인들은 알 수가 없다. 그들은 비행사도 아니고 공학박사나 정보요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비행사나 공학박사, 정보요원이라고 해도 얼마든지 모를수 있다. 각 해당 분야는 워낙 세분화되어 있다. 트랜스포머의 정보비대칭 현상은 이렇게 전문가와 비전문가의 경계를 뒤흔들어 놓고 만다.

 

<트랜스포머> 시리즈는 트랜스포머를 할 수 있는 로봇을 통해 대중들이 볼 수 있는 시각적 콘텐츠를 가졌는데 그것은 단지 그 시각적 콘텐츠는 단순히 컴퓨터 그래픽이 선사하는 시각적 효과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점은 그 콘텐츠를 통해 충족시키고자 하는 바가 있다는 것이고 그 때문에 그 점이 테크놀로지의 미래를 의미하기도 한다. 인간보다 앞선 문명을 자랑하는 사이버트론은 철저하게 아날로그, 즉 인간의 육체성에 기반하고 있다.

 

그들은(오토봇) 광선검이 아니라 금속 칼로 상대를 제압, 상대의 목이나 심장을 노린다. 금속육체를 가진 그들은 땅과 건물을 들쑤시고 다닌다. 총알과 미사일은 금속성의 소리와 불꽃을 튀긴다. 디지털 전자기파로 상대방을 교란시킨다면 순식간에 끝날 일들을 그들은 자신들의 몸체 즉, 머신을 이용하는 종결자로 나선다.

 

디지털로 해결할 수 있는 설정을 전면에 내세운다면 영화는 성립할 수 없다. 이러한 점 때문에 인간들이 총과 미사일 등으로 대항도 하고, 그들의 몸체에 칼을 꽂을 수도 있다. 아무리 21세기 나아가 22세기가 되어도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자신들의 오감각으로 느낄 수 있고, 나아가 성취가능 한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게 한다.

 

마티아스 호르크스는 <테크놀로지의 종말>에서 인간은 똑똑한 기계를 원하지 않는다고 했다. 즉 사람들은 전자동으로 움직이는 자동차를 원하지 않는다. 자신의 손과 발로 움직여가는 기계, 머신을 원한다. 이러한 점은 자동차와 항공기의 시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전거가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 이유다. 이렇게 자전거가 전성기를 누릴 것인지 미래학자들은 생각하지 못했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잘못된 판단을 내린 이유 때문이다.

 

인간은 무조건 편리한 것만 찾는다는 것은 틀린 전제이다. 고통과 힘겨움이 있어도 그것을 통해 통제력과 보상, 성취를 얻게 해주는 테크놀로지는 과거이나 미래에 관계없이 지속될 수밖에 없다. 나아가 인간은 자신의 통제 속에서 기계를 놔주는 것에 대한 거부감 그리고 공포감이 있다.

 

인간이 아니라 스스로 자율체계를 갖는 머신은 두려움의 대상이기 때문에 통제권을 상실하는 것에 거부감이 있다. 디셉티콘은 바로 인간이 콘트롤 할수 없는 기계를 말한다. 인간의 무의식에서 볼 때 통제권을 확보할 때 인간과 기계, 로봇의 공존이 가능할 것이다. 영화 <트랜스포머 3>은 허술한 스토리텔링으로 초반부를 잡아 먹지만, 인간의 통제감을 충분히 충족시켜준다.

 

앞선 사례들은 대중들이 자기 통제감을 발휘할 때 몰입과 참여가 늘어나는 것을 말한다. 자기통제감은 인터렉티브에서 비롯한다. 인터렉티브의 경향은 자신들에게 가치적인 우월이 아니라 심리적 성취를 주는 점이 뛰어나기 때문에 선호되고 그것은 각각의 콘텐츠 발달을 움직이는 요인이 된다. 이는 정치 참여와 사회 활동 나아가 마케팅에서 시사하는 바가 있다. 자아의 성장이 다른 어느 세대보다 강해진 현대인들에게 더욱 그렇다.

 

무엇보다 민주주의는 결국 이러한 각 시민의 자기통제감을 반영시킬 때 활성화 된다. '인터렉티브 데모크라시'정도 될 것이다. 자신이 정치를 움직이고 있다는 생각이 강할수록 민주주의 제도는 번창하게 될 것이다. 이는 단순히 게임 오락이나 인터넷 워리어에만 해당되는 아닌 것이다. 마케팅에서도 고객의 인터렉티브를 통해 자기 통제감을 안겨주는 것이 중요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