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왜 어머니를 악녀로 만드는가

부드러운힘 Kim hern SiK (Heon Sik) 2011. 2. 9. 18:15

<김헌식 칼럼>왜 어머니를 악녀로 만드는가

2010.05.27 10:32

 




[김헌식 문화평론가]프로이트 심리학은 청년세대들이 부모를 부정하는 학문적 논거로 활용되었다. 이 맥락에서는 만약 정신적으로 흠결이 있다면 그것은 부모가 어린 시절 잘못된 말과 행동으로 외상을 주었기 때문이다. 이는 부모에게 책임을 전가하면서 자신의 행태들을 정당화나 합리화 하는데 활용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부모가 조심을 한들 받아들이는 대상-자녀가 외상을 입을 가능성은 언제나 농후하다. 부모에게만 책임을 물을 수는 없으며 반드시 인과관계가 대응적이지도 않다. 부모의 행동과 말에 대한 이해는 관심이 없다. 그런면에서 프로이트 심리학은 기존 체제와 사회 문화를 거부하고 정체성을 형성하려는 젊은 세대 겨냥의 문화콘텐츠에 많이 적용되었다. 

수많은 소설과 영화, 그리고 드라마에서는 이렇게 부모에게 외상을 전가하면서 자신을 정당화하는 내용들이 포함되었다. 이러한 맥락의 드라마는 우선 부모세대의 행동에 모든 책임을 전가하기 때문에 부모세대들을 부정하게 만든다. 특히 여성-어머니들을 악녀로 만들기 쉽다. 또한 자신이 불행한 것은 자신 스스로가 아니라 환경적 조건이 불우했기 때문이라는 합리화의 기제를 정당화하게 만든다. 

인정옥의 드라마 < 네 멋대로 해라 > 에서 고복수(양동근)는 정유순(윤여정)에게 충고한다. "제대로 된 놈을 만나란 말이야" 참고로 여기에서 고복수는 정유순의 아들이고, 정유순은 고복수의 어머니다. 어머니 고복수는 많은 남자들을 교체하면서 살아간다. 고복수의 눈에 제대로 된 남자는 하나도 없으며 자신이 아버지라고 불러야 할 법한 이들에게 반말과 행패를 부린다. 아버지라 부를만한 사람이 없는 것이겠다. 고복수는 그러한 환경에서 소매치기를 전전하며, 드라마는 소매치기를 합리화 한다. 

< 신데렐라 언니 > 에서 송강숙(이미숙)은 여러 남자를 전전한다. 이러한 어머니에 대해서 송은조는 불만이다. < 네 멋대로 해라 > 와 달리 어머니의 이러한 점에 신물을 내는 것은 딸이다. 은조는 사실상 건전한 성격을 갖지 못하는데 이러한 점은 어머니에게서 비롯한다. 그렇기 때문에 신경증적인 은조의 행동과 말은 정당화 된다. 어머니는 101번째 남자를 만나 마침내 크게 한몫 챙긴 셈이 되었다. 악녀가 되는 것이고 딸인 은조는 이에 반항해야 정상이다. 딸의 행동은 이해시키지만, 어머니의 행동은 이해시키지 않는다. 

< 네 멋대로 하라 > 의 정유순과는 달리 송강숙은 악녀의 본색을 드러내게 된다. 두 작품의 공통점은 정상적인 어머니 상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고복수(양동근)나 송은조는 신경증에 걸린다. 어머니를 부정하고 싶지만 부정할 수가 없다. 더구나 자신이 존재하는 것은 어머니가 그렇게 다른 남자들을 통해서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만약 어머니를 부정한다면 자신을 부정하는 셈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둘은 히스테리를 부리고는 한다. 

청년기의 심리학으로 보았을 때 당연히 새로운 세대들은 기존의 세대와 구분을 하면서 자신의 정체감을 형성시킨다. 부모의 삶은 부정의 삶이 되며 그들을 부정하는 자식은 올바른 삶을 살아가는 주체가 된다. 하지만 그 주체들은 다시 그들의 자식에게서 부정의 대상이 된다. 문제는 주체성의 확립이다. 

< 선덕여왕 > 에서 미실은 수많은 남자들의 연인이자, 아내가 된다. 그러한 어머니는 긍정의 존재도 부정의 존재도 아니다. 미실은 남자들에게 종속의 존재가 아니라 주체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현대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미실은 악녀같으면서도 그것 조차도 확실하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덕만이나 천명이 아니라 미실에게 열광했는지 모른다. 그것은 주체에 대한 욕망이다. 

드라마 < 네 멋대로 해라 > 에서 고복수(양동근)는 정유순(윤여정)에게 제대로 된 놈을 만나라고 하자 정유순은 과연 어떻게 대답했을까? 정유순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 같은 게 무슨 제대로 된 것을 만나?" 그러자 고복수는 이렇게 말한다. "어디가 어때서 그래" 

고복수의 어머니는 자아존중감이 매우 낮은 상태에 있었다. 송강숙(이미숙)은 자아 존중감이 매우 높은 존재다. 오히려 그의 자아는 존중받아야 할 수준보다 과잉이다. 남의 자아까지도 과감하게 복제하여 자신의 목적을 위해 사용한다. 과잉의 자아 존중감도 역시 진실한 만남에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미실의 관계는 오로지 목적적이었다. 권력과 부를 전제할 때만 성립할 수 있었다. 

하지만 미실이 정유순이나 송강숙과 달랐던 것은 스스로 주체가 되고자 했던 것이다. 과연 미실이 그러한 존재였는지 역사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겠다. 하지만 그러한 존재였다면 고복수나 송은조는 히스테릭컬한 성격을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스스로 구원하라' 비담은 스스로 외상을 벗어나 주체가 되고자 했고 어머니를 적어도 원망하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왜 이러한 여성들이 비주체적인 존재가 되어야 하는가이다. 그것은 결국 여성이 경제적으로 독립적인 주체가 되지 못하는 상황이다. 드라마 < 찬란한 유산 > 에 백성희(이미숙)가 재혼을 하고 재혼을 다시 원점으로 돌리려 했던 것은 남편이 담당하던 경제적 수입의 붕괴였다. 백성희는 송강숙과 같이 새 딸을 철저하게 버리고 자신의 딸만 챙겼다. 

모성성이 끝까지 책임을 지려고 했던 것은 본능적인 것이다. 그것은 진화생물학이나 진화심리학이 이야기 하듯이 인류역사이래로 DNA에 숨겨진 진화적 법칙에 따른 것이다. 그것을 무조건 악녀라는 컨셉이나 프로이트의 심리학적 외상성으로 다루는 것은 나이브한 접근이다. 스스로 히스테릭한 콘텐츠가 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