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소비사회의 총아 스타일, 왜 스타일이 없나

부드러운힘 Kim hern SiK (Heon Sik) 2009. 8. 16. 11:19

-패션지의 정체, 그리고 대중문화잡지의 현실
김헌식 문화평론가


한국에서는 대중문화잡지가 생존할 수 없다는 말이 있다. 근래 ´Film2.0´ ´프리미어´ 같은 영화잡지가 문을 닫았고, 주로 장르문학을 다루는 ‘판타스틱’은 휴간에 들어갔다. ‘드라마 틱’은 무크지로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대중음악 잡지는 무가지 ‘핫 트랙스’ 밖에 없다. 사실상 대중문화잡지로 생명력을 갖고 있는 것은 ‘씨네 21’이 유일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 문화잡지가 살아남는 법은 없는가. 한국에서는 다양한 문화 현상을 다루는 잡지가 창간이 되어도 결국에는 여성지나 패션지 처럼 변하게 된다. 왜냐하면 대중문화를 소비하는 집단이 주로 20-30대 여성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이 관심을 많이 기울이는 패션이나 미용에 관한 기사를 많이 다루어야 한다.


요컨대, 화려한 내용을 담을수록 여성지나 패션지 처럼 변하게 되는 것이다. 한편, 마니아 문화를 겨냥하는 잡지는 광고수입을 잡을 수 없으므로 위기에 처하기 쉽다. 따라서 한국에서는 패션지나 여성지가 아니고서는 문화잡지가 생존할 수 없다는 말이 굳어지게 된다. 물론 패션지나 여성지가 굳건하게 유지될 수 있는 것은 광고의 힘이다. 이것은 20-30대 여성의 소비문화의 중심에 설 때 가능한 일이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The Devil Wears Prada, 2006)에서 앤디 삭스(앤 해서웨이)는 전문 저널리스트를 꿈꾸지만, 번번이 언론사의 문전박대를 받고는 뜻하지 않게 패션지 기자로 일하게 된다. 치열한 경쟁과 암투가 빈번한 패션지 업계에서 앤디 삭스는 촌스러움이라는 평가를 떨치고 마침내 멋진 커리어우먼으로 변한다. 여기에서 ‘멋진’의 기준은 화려한 패션 감각을 갖는 것이었다.


그녀는 패션지에 모여드는 각종 상품의 단맛에 취하다가 마침내 그 몽상에서 벗어나 패션지를 박차고 나온다. 드라마 ‘스타일’에서 이서정(지아)은 드라마 작가를 꿈꾸지만, 패션지 기자로 일하고 있다. 치열한 경쟁과 직장 상사의 괴롭힘 때문에 당장 그만두고 싶지만, 패션지에서 제공하는 달콤한 혜택에 결단을 내리지 못한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를 생각해보면 이서정도 과감하게 패션지를 떠나면서 비판적인 멘트를 날릴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해서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가 소비 문화를 조장하는 패션지들의 행태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접근하는 의식 있는 영화라고 볼 수는 없다. 이미 그 영화는 다양한 패션 상품을 홍보해주었기 때문이다. 패션 소비를 실컷 조장한 뒤에 한마디 비판적 언사를 집어넣는 것일 뿐이었다.


패션지는 자본주의 상품의 경연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패션지를 통해 상품의 홍보와 마케팅이 이루어지고, 상품의 수익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치열한 물밑 경쟁이 일어난다. 편집장은 그 속에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를 수 있기 때문에 선망의 대상이 될 수도 있겠다. 그러한 패션지 내외를 다루는 드라마는 상품들의 경연장이 되고 만다.


드라마 ‘스타일’이 결론적으로 패션지의 부정적인 측면을 부각한다고 해도 이미 많은 패션 상품들이 홍보되고 시청자들의 뇌리에 각인되고 있다. 중요한 것은 드라마 '스타일'이나 드라마 속에 배경으로 등장하는 잡지 스타일에 스타일이 없는 이유가 이런 점에서 비롯된다는 점이다.


드라마 ‘스타일’에서 박 차장(김혜수)이 그렇게 고고하고 당차게 굴 수 있는 것은 패션 감각에 관한 박 차장의 능력과는 관계없다. 그녀들이 하는 것은 주로 관련 이해 당사자 사이에서 정치와 권력 역학에서 처세를 잘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작 패션 감각이나 통찰력은 부차적이고 중요하지도 않다.


드라마 ‘스타일’이 시청률이 올리는 방식은 패션이 아니라 패션지 안에서 일어나는 권력 다툼이다. 또한 인간과 인간이 자신의 자존심과 통제력을 잃지 않고 유지하려는 갈등이 주는 긴장감이다. 그것이 사랑과 일이라는 두 마리 토끼로 포장된다. 그렇기 때문에 정작 한국에 패션 스타일이 없듯이 드라마에도 스타일은 없으며, 획일화된 상품들의 경연만 있다. 정작 스타일을 말하지만 그것은 이미 획일화된 상품구조의 복제와 증폭일 뿐이다.


어쨌든 다른 대중문화 잡지는 망해도 패션지는 더욱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지 모른다. 나경원 의원은 한 패션지의 200호에 기획된 ´2009 대한민국 파워우먼의 초상´ 화보에 정치인으로 유일하게 화보를 올렸다. 그만큼 패션지가 막강한 영향력을 미치기에 여성 정치인이 거부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인지 모른다.


여성 비정규직과 실업은 늘어나는 현실에서 그것을 다루는 시사 잡지 보다 환상적인 생활을 더 부각하는 패션지가 흥성하는 현상이 씁쓸한 인상을 준다. 또 그러한 내용을 다룬 소설이나 드라마, 영화보다 드라마 '스타일'에 더 대중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현상도 마찬가지 인상을 준다.


한국사회의 전체적인 양상을 생각할 때 단순히 잡지나 드라마 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현기영은 신작 '누란'을 통해 소비사회의 물질 만능주의에 빠진 젊은 세대 특히 386세대를 비판한다. 그의 말대로‘나는 소비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물신주의 사회의 명제 이전에‘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가 되어야 할 필요성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