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크놀로지와 문화 콘텐츠

불편한 테크놀로지의 재인식

부드러운힘 Kim hern SiK (Heon Sik) 2019. 3. 18. 09:33

불편한 테크놀로지의 재인식

-불편한 것이 오히려 편리한 것보다 강력하게 소구

 

 

                        김헌식(카이스트 미래세대행복위원회, 박사, 평론가)


“지금 이 시간부터 스마트 폰의 모든 내용을 공유한다.”
영화 “완벽한 타인”의 사람들은 그렇게 게임을 시작한다. 2018년~2019년 개봉해 크게 흥행에 성공한다. 이 영화는 단순한 내용이라 제작비도저렴하게들었지만대중적 관심을 크게 불러 일으켰다. 출발은 단순한 게임이다. 그러나 테크놀로지의 불편함을 넘지 말아야 하는 것도 있다는 점을 일깨운다. 그럼 이제 어떤 게임인지가 중요하다. 부부 동반 모임에서 제안된 이 게임은 특정 시간 이후부터는 핸드폰에 도착한 문자는 읽어줘야 하고, 걸려온 전화 통화는 스피커폰으로 공유를 해야한다. 물론 상대방은 문자나 통화가 공유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른다. 그렇게 해야 평소의 대화가 그대로 공유되면서 평소에 알지 못했던 사생할을 알게 되는 재미가 있게 된다. 사생활의 재미란 평소에 말하는 것과 다른 뭔가 잘못을 하고 있는 사실이 있는가에 모아진다. 정말 나쁜 짓을 많이 하고 다니는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못할 것이고, 거꾸로 거리낄 만한 일을 하지 않는다고 큰소리친 사람들일수록 스마트폰을 통해 오가는 말과 행동들을 알고 싶게 만들 것이다. 관객이 기대하는 것도 이대 목이며 그런 점이 없다면 영화는 더이상 전개도 힘들고 흥미를 유발하기 힘들 것이다. 

이것을 제안한 여성은 사실은 남편의 친구와 내연의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과연 여자 문제에 대해서 궁금증이 일었기 때문에 그 같은 제안을 했던 것이다. 어느 정도 관객이 예상하듯이 이후의 상황은 겉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정말 잘못된 생활을 한 사실이 드러난 경우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오해가 오해를 낳는다. 물론 이러한 상황 전개가 영화의 흥미요소가 되지만 정말 현실에서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고통스러운 일임에 분명하다. 이 영화에서 느끼는 점은 사람에게는 적정한 비밀이 유지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단지 사생활 보호하는 가치 지향 때문이기도 하지만 결코 잘못된 행동을 은폐해줘야 한다는 말도 아니다. 


편리한 공유 테크놀로지의 역설

커뮤니케이션은 노이즈 발생이 운명이다. 반드시 불필요한 잡음이 생긴다. 사람 사이에 커뮤니케이션을 할때 오가는 말이 70-80%정도 밖에 이해를 못한다는 연구도 있다. 선택적 주의 현상도 있다.  보는 것이 보는 것이 아니며 들리는 것이 들리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관심 있는 부분만 더 집중을 하고 이해를 한다. 자신의 지식이나 가치관에 따라서 판단을 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불완전하게 이해를 하고 나아가 오해를 할 수 있다. 나 자신을 잘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인간의 상황이라면 다른 존재에 대해서는 더욱 그럴 수 밖에 없다. 

또한 대화는 언어로 이뤄져 있지만 누군가와 대화를 할 때는 과장을 하거나 간과하거나 부풀리기도 하고 감정을 첨예화하기도 한다.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도 겉으로는 달리 표현하는 경우도 비일비재 하다. 또 한 문장으로 표현한다고 해도 그안에는 상당한 배경과 맥락과 이전의 경험과사건, 사실이 얽혀 있는 경우도 많다.

더구나 당장에 드러나거나 보여지는 말이나 행동 등보다는 시간의 흐름에도 따라 진면모가 드러나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다. 물론 나중에 진짜로 알게 되었을 때의 결과를 방지하기 위해서 후회 심정을 막기 위해 미리 알았으면 하는 것이 사람들마다 품는 마음이기는 하다. 불필요한 오해가 관계를 악화 시킬 수 있기 때문에 관계의 유지 강화를 위해 정보를 모두 공유하는 것이 테크놀로지 차원에서 보면 영상 통화라는 것을 생각해볼 수 있다. 사람과 사람이 얼굴을 보고 대화를 할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그것이 편리한 테크놀로지의 기능과 역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대화 방식은 19세기 문학작품에도 등장하고는 했다. 사람 얼굴이 보이는 거울을 앞에 두고 통화를 하는 미래 세계를 상상하는 작품 말이다. 단지 상상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많은 공학자들은 이를 위해 연구에 매진해왔다. 그런데 실제로 이런 기술이 모두 나왔음에도 실제로는 매우 제한되게 쓴다. 이는 영상 통화 뿐만 아니라 증강현실이나 홀로그램에도 마찬가지로 적용이 된다. 정말 멀리 떨어져 있는 가족이나 연인 그리고 업무상 회의등에 사용하면 효율성이 높을 뿐이다. 
이유 가운데 하나는 영상 통화가 불필요한 오해의 정보를 줄 수도 있고 개인의 사생활을 아무리 가족이나 연인이라고 해도 보장이 되어야 한다. 개인이 가지고 있는 사상과 양심은 물론 개인의 취향도 범법이 아니라면 보장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갈수록 더 깊어지고 있다. 실시간 공유가 아니라 그 흔적의 기억은 어떨까. 스마트폰은 그 사람의 모든 것이 들어 있다고 말한다. 비록 삭제를 한다고 해도 완전히 파쇄를 하지 않는 이상 흔적은 남는다. 그 흔적만을 다시금 복구하여 제시했을 때 역시 문자나 영상은 미디어 콘텐츠이다. 미디어는 직접성이 아니라 간접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당장에 모든 것이 진리를 담고 있다고 보기 힘든 면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무조건 포렌식을 통해서 많은 대중에게 공개하는 것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다. 업무적으로도 모두 정보를 공개하는 것이 수평적이고 민주적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런 면에서 많은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는 것이 경제적인 가치가 어마어마 하다는 빅데이터 담론으로 학장되기도 했다. 본인도 모르는 것은 그렇다쳐도 수시로 변하는 인간의 마음과 정서에서 과거의 흔적이 데이터를 가지고 지금은 물론 미래를 재단하는 것은 위험할 수 있다. 과거의 발언과행동이 지금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다고 인지하기 쉽지만 반드시 그렇게 규정할 수는 없다. 그것이 바로 정보 공개의 역설인데 그건은 인간이 가지고있는 인지적 한계 나아가 뇌의 한계이다. 더구나 인간은 7가지 정보 테마에서 한두개 플러스 마이너스의 인지 기억력을 가지고 있으며 뇌는 자기 스스로 편집을 한다. 많은실험에서 기억의 왜곡 편집 현상은 쉽게 확인 된다. 이러한 점이 여전히 불편함이 내재된 테크놀로지의 생존을 가능게 한다.
사람들은 편리한 기술이 있음에도 불편한 방식을 유지하려 한다. 그것은 단지 취향이 아니라 인간이라고 하고는 존재론적인 특성과 맞물려 있는 것이고 이 때문에 편리한 테크놀로지의 미래만을 예측하고 그에 맞게 국가 정책이나 비즈니스가 추진되는 것도 되짚어야 하는 문제가 된다.


불편한 고급

불편에는 진실이 담겨 있다. 그래서 불편한 진실이라는 말도 있다. 깨어있는 이들이라고 자임하는 사람들은 애써 오지를 찾고 고산 지대에서 아슬아슬한 여행을 한다. 험한 산악지역을 종주한다. 사막을 횡단하기도 하고 얼음을 가로지르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편하고, 안전한 것을 좋아한다고 말하지만 이런 불편한 여행은 이러한 통념과 배치되는 행동을 한다. 또한 사람들은 이머시브 럭셔리(Immersive Luxury) 관점에서 최첨단 기술과 고급스런 스타일이 결합된 고가의 여행상품을 선호한다고 생각하는 것과 반대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왜 이렇게 불편하고 때로는 위험한 행동들을 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불편한 상황 속에서 자신과 자신이 속한 상황이 어떤 것인지를 명확하게 대면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바로 인간 자체에 대한 대면이다. 또한 다른 하나는 인간의 의지적인 차원에서 불편한 여행을 감수하는 경향도 분명 존재한다. 조닝 아웃(Zoning Out)관점에서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개념은 일정한 공간에서 벗어나 외딴 곳에서 연락할수 없는 지경인데도 비용을 아끼지 않고 지불 하는 것을 말한다.

 

인간은 스스로 자율적인 주체이고자 한다. 스스로 걷고 행동하고 무엇인가 자신의 성취를 이루고자 한다. 그것에서 강력한 즐거움을 느낀다. 남이 운전하는 자동차에 있기 보다는 스스로 운전을 하거나 자신이 스스로 움직여 이동하기를 바란다. 자전거는 자신의 근육을 사용해야 하므로 불편함을 준다. 하지만 자신의 근육을 통해 자전거라는 기계를 움직이고 자신조차도 더 빨리 움직이기 때문에 성취감을 준다.

 

스스로 걸어서 이동하는 것은 몸을 피곤하게 하지만 자신의 주체성과 자율성의 실현을 가능하게 해준다. 그 속에서 자신과 대면할수 있다. 그 자신은 바로 문명과를 별개로 생물학적인 존재로 자연과 대면하지만 그 자연속에서 감성적으로 감응하려는 존재가 된다. 자연에서 문명의 이기를 활용하는 것은 자연 속에서 인간의 위치를 가리는 기능을 할 뿐이다.

 

대개의 여행은 편하게 구성되어 있다. 편안한 숙소에 맛있는 음식 그리고 방문하는 여행지도 아름답고 안전하다. 하지만 이것을 누리기 위해서는 전제조건이 많은 돈을 내야 한다. 돈을 지불하고도 그 여행이 진정한 여행일 수는 없다. 그것은 현지의 일부분만 보는 것이고 무엇보다 누군가 만들어놓은 혹은 준비해 놓은 측면도 접할 수 있다. 하지만 불편함을 감수하고 그 틀을 벗어나면 스스로 자신이 보고 싶은 것을 볼 수 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생각이나 깨달음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불편한 여행은 또한 다른 이들이 보통 가지 않는 지역이나 공간에 진입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이들과 차별성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인간의 본성에 부합한다. 언제나 새로운 곳, 차별적인 공간에 도전하는 일은 낯설고 힘든 과정을 수반한다. 이는 도전과제가 주어지는 것과 같다. 하지만 그 과정을 겪어내면 도전과제는 해결되고 큰 즐거움과 성취감을 얻게 된다.

 

공정 여행 차원에서 불편한 여행을 감수하는 이들도 있다. 잘 꾸며진 여행 공간에서 나는 수익은 많지만 그것이 지역에 순환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지역주민이 비정규직이거나 일용직으로 착취를 당하고 지역주민에게 분배되기 보다는 유럽 등의 대형 자본으로 유입되기 때문에 일부러 그런 여행 기업이나 시설을 이용하지 않는 이들은 바로 불편한 여행을 감수한다.

 

민박집을 이용하고, 지역의 가게를 활용하여 필요한 물품을 구입한다. 음식과 잠자리, 이동 과정이 편하지 않지만 그 과정에서 무엇인가 다른 깨달음과 즐거움이 있다는 것을 불편한 여행자들은 믿는다. 예컨대, 지역주민들의 일상 삶을 더 잘 볼 수 있고, 그들과 유대관계를 맺을 수 있다. 기존의 여행 프로그램이나 관광지에서 겪을 수없는 체험을 하게 된다.

 

지역주민들의 숙박시설과 상점을 이용하기 때문에 지역 공동체와 지역주민들에게 돈이 순환된다. 불편함을 감수하면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 거꾸로 편함을 추구하면 누구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에서 멀어질 수 있다. 생존적인 차원의 여행지 종사자들과 더 큰 부를 축적하기 위한 여행업자들은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편함은 본질을 위장한다. 불편함은 본질을 드러낸다.

 

사람들은 그 본질을 찾아 불편함을 감수한다. 하지만 그 감수하는 과정은 고통이 따르고 위험이 동반된다. 어디 여행뿐이겠는가. 어떤 것이든 편함은 본질을 위장하고 그 위장을 통해서 무엇인가 앗아간다. 그 앗아감 속에서 우리는 물질적 정신적으로 무엇인가를 잃어간다.

 

누군가 잃어간다면 누군가는 그것을 획득하는 이들이 있다. 그 불편한 진실을 편함이라는 상품화의 연출미학이 만들어내는 구조일수록 파국은 가까워 오며, 불편한 노정을 시작하는 이들은 많아질 수밖에 없다. 불편한 노정을 시작하는 이들이 많을수록 허위의 문화가 지배하고 있는 곳일 게다.

 

불편한 테크놀로지가 매력인 이유

 

테크놀로지의 발달은 음악의 수용의 역사를 바꾼다. 에디슨이 축음기를 만들어 공연장의 음악을 가정으로 옮겼듯이 카세트테이프의 등장은 음악의 간편성을 도모했다. 가정에서 야외로 음악을 이동시켰고, 특히 워크맨은 이동간의 개인 음악 감상실을 하나씩 만들어주었다.


그러나 이 테이프는 오래들을수록 손상되어 영원성을 담보할 수 없었고 음질도 제한적이었다. 하지만 CD는 무한 반복이 가능할 정도로 수명이 길었고 그것은 어쩌면 소유주인 인간의 수명보다 길게 그것도 상태마저 온전히 자신을 보호할 수 있었다.


더 이상 이보다 더 나은 음악의 소유와 간편성, 이동성, 안정성은 다른 어떤 테크놀로지가 대체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적어도 인터넷 공간의 확장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인터넷은 디지털 파일 형태의 음악콘텐츠를 내쏟았고, 애써 음반이나 음악 CD를 가지고 있을 필요가 없었다. 언제어디서든 자신이 원하는 음악을 인터넷 공간에서 다운받아 즐길 수 있었다.


어느새 거리에 음악테이프에 이어 CD를 파는 행상들이 사라졌고, 곧 레코드 가게들은 아예 종적을 감추었다. MP3는 하나의 음악의 문화적 아이콘이 되었다. 하지만 그 안의 음악파일은 구체적으로 손에 잡히지 않았고, 보여줄 수도 없었다. 적어도 CD의 시대에는 케이스라도 보여줄 수 있었다.

 

최근 미국에서 사라졌던 LP음반이 부활했다는 주요 언론의 보도가 있었다. 명작이거나 희귀본을 찾거나 마니아적 성격이 강한 장르에 대해서 이러한 LP음반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었다. 이는 비단 미국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복고적 상품으로만 생각했었지만 한국에서도 유명 아이돌, 대중가요 음반 중에 이런 LP음반이 기획되고 있다.

 

이렇게 LP음반을 찾는 것은 충성도 높은 팬이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지만, 일부에서는 간편하게 들을 수 있는 음악보다 자신의 노력이 많이 들어가는 LP음반 감상이 더 애착이 가기 때문이라고 한다. 디지털 파일이나 CD는 너무나 간편해서 인스턴트의 느낌이 날 것이다. 하지만 LP음반은 하나하나 닦고 잘 정리하고 그것을 다시 조심스럽게 다루어 플레이어 위에 올리고 바늘을 닿게 해야 들을 수 있는 음악이다.

 

사람은 자신의 노력이 많이 들어갈수록 그 행위나 결과에 대해서 더 애정을 갖는 법이다. 불편한 것이 오히려 편리한 것보다 강력하게 소구되는 측면이 있다. 사람들이 자전거를 애써서 힘들게 타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자신의 근육으로 자전거를 움직이며 이동하는 것은 반드시 운동효과 때문만은 아니다. 차라리 운동효과 때문이라면 헬스장에 가면 될 것이며 불편하게 자전거를 작동시키며 이동하지는 않을 것이다.

 

영화 <건축학 개론>에서는 이제는 볼 수 없는, 아니 황학동 벼룩시장에서나 볼 수 있는 CD플레이어가 등장한다. 전람회의 음악 CD를 여주인공에게서 건네받지만 끝내 듣지를 못한다. 집에는 LP음반 플레이어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는 첫사랑의 감정을 이끌어내기 위해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21세기에 CD플레이어가 부활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LP음반이 부활해도 말이다.

 

만약 CD에 대한 추억이 많은 세대들이 기성세대의 주류를 이룬다면 달라질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LP음반이 가지고 있는 아날로그 정서에 비해서 CD는 지나치게 디지털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만, 그 안에 지나간 아름다운 추억이 담겨 있다면 그것은 인간화되는 콘텐츠일 것이다.

 

다만, 인간의 편리성을 추구하는 콘텐츠는 역설적으로 외면받기 쉽다. CD보다 더 편리한 파일 형태의 음악은 그래서 더욱 소유하려는 심리가 없어지고 오로지 접속을 통해서만 만족을 얻으려 하는지 모른다. 그런데 그 만족은 물론 CDLP음반처럼 제돈 내고 사지 않으면서 추구된다. 웬만해서는 음악콘텐츠의 구매는 팬들의 역할의 대상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인간은 만져지고, 느끼고 손으로 간직할 수 있는 무엇인가에 더 매력을 느끼는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