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 분석

백마탄 왕자와 키다리 아저씨는 가라

부드러운힘 Kim hern SiK (Heon Sik) 2015. 11. 11. 17:11

우리에게 필요한 조력자는

 

한때 텔레비전 드라마에는 실장님 캐릭터가 유행했다. 실장님이 너무 많이 등장하니까 나중에는 본부장님으로 바뀌었다. 이런 실장님이나 본부장님은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잘 생기고 훤칠한데다가 젊고 능력이 있다. 물론 그 능력이란 지위와 돈이다. 좋은 집과 자동차, 명품 브랜드를 소유하고 있다. 또한 해외 유학파가 많다. 그들이 젊은 나이에 성공할 수 있는 이유는 해외에서 학교를 다니거나 직장을 얻었던 경험 때문이었다. 때로는 재벌가 출신인 경우도 있다. 무엇보다 이들은 여주인공을 알게 모르게 도와준다. 어려운 취직을 주선해주거나 쉽지 않은 기회를 준다. 주인공은 도움을 주는 이가 누구인지 모르지만 알고 보면, 실장님이나 본부장님의 도움이 있었기에 자리가 주어진 것이었다. 드러내놓고 도와주는 이들은 대개 바람둥이들이다. 이들의 또 하나의 특징은 거친 듯한 여주인공에게 한순간에 매력을 느끼고 헤어 나오지 못한다. 결국 티격태격 해도 키다리 아저씨처럼 자신이 도와주던 여성과 로맨스를 이루어간다.

이러한 유형의 드라마는 아직도 많이 있다. 다만 이런 유형의 캐릭터와 관계를 구성했던 트렌디 드라마는 변화를 보이고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MBC ‘그녀는 예뻤다’였다. 이 드라마에서는 젊고 능력 있는 부편집장이 등장하는데, 다름 아닌 초등학교 친구다. 자신의 상급자로 친구가 부임을 한다면, 여러 가지 면에서 좋을 수밖에 없겠다. 그것도 자신을 무척 좋아했고 지금도 사랑하고 있는 친구가 말이다. 직장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이러한 상상을 한번쯤은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특히, 힘든 조직 생활을 하는 상황이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잘 모르는 남자가 여자에게 빠져들어 전폭적으로 도와주고 신분상승까지 이뤄주는 백마 탄 왕자나 신데렐라 콤플렉스 유형의 드라마와는 달라 보인다. 드라마 ‘애인 있어요’에서는 자신의 아내를 다시 사랑하게 되는 애인의 재발견 컨셉이 사용되는 것을 보면, 무턱대고 사랑에 빠지는 드라마 포맷은 식상해진 것이 분명해 보인다. 그런데 ‘그녀는 예뻤다’의 경우에도 결국에는 상급자가 자신을 후원하고 보살펴주는 존재라는 점에서 아주 다른 형식의 드라마는 아닌 것 같다.

이런 면에서 미국보다 한국에서 더 인기를 끈 영화 ‘인턴’에는 색다른 인물이 등장한다. 그는 여주인공이 위기나 곤란한 상황에 빠질 때마다 도움을 준다. 이런 인물이라면 대개 엄청난 재력을 가지고 있어야 하지만 이와는 전혀 달랐다. 그는 40여 년 간의 직장생활 은퇴 후 자신의 일을 찾으려는 캐릭터로 등장한다. 비록 인턴이라도 말이다. 바로 그는 70대의 인턴이었다. 대체적으로 인턴하면 20대 초반의 젊은 세대인 것과는 달랐지만 인턴이 하는 일은 같았다. 때로는 굴욕적일 수도 있겠지만 그는 나이를 내세우지도, 과거 부사장의 이력을 내세워 군림하지도, 자신의 경험을 강요하지도 않았다. 30대 초반의 여성 대표에게 필요한 일이나 조언을 알맞게 해준다. 회사 내의 일이나 개인적인 업무, 가정생활에서 어떤 때는 친구 같기도 하고 어떤 때는 키다리 아저씨, 남편이자 아버지 같기도 하다. 오히려 자신의 일과 조직을 운영하고 있는 이들에게는 취직과 승진 기회를 주는 키다리 아저씨 혹은 백마 탄 왕자보다 더 도움이 되었다. 그들은 적어도 연인관계라는 대가를 바라기라도 했지만 시니어 인턴은 절대 그런 일도 없다. 물론 영화의 여주인공처럼 창업을 하고 더구나 성공을 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러한 면에서 이 영화는 환타지다. 환타지는 현실의 결핍을 채우려는 욕구들을 반영하기 마련이다. 영화 ‘인턴’이 주는 함의는 우리에게 필요한 이들이 백마 탄 왕자나 키다리 아저씨가 아니며 그것은 동화적 몽상에 불과하다는 인식위에 있다.

JTBC 드라마 ‘송곳’ ⓒJTBC
JTBC 드라마 ‘송곳’ ⓒJTBC

 

그런데 드라마 ‘송곳’을 보면 시니어 인턴보다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사람이 따로 있을 것 같다. ‘송곳’에는 구고신(안내상)이라는 독특한 캐릭터가 등장한다. 그는 실장이나 본부장도 아니며 재력자도 연인, 친구도 아니다. 실천적 노무사이며 노동문제 해결사로 자처하는 구고신은 문소진(김가운)에게 어두운 현실에서 든든한 조력자로 등장한다. 백마 탄 왕자나 키다리 아저씨는 아니어도 현실 모순을 인식하고, 어려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방법과 힘을 주었다. 너무나 현실적이기 때문에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도움과 지원이 항상 장밋빛 결과만을 내줄까. 아닐 것이다. 구고신의 도움이 당장에 환상적인 결과를 낳지 않아도 그는 고마운 사람이다. 비단 이성에 대한 호감 때문에 문소진을 도와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남성들에게도 매우 중요한 조력자가 된다. 중화요리집에서 임금을 받지 못한 배달 청년의 문제를 기발한 방법으로 해결해주고, 이수인(지현우)이 푸르마 마트의 노동조합을 만드는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멘토이자 참여자 역할을 해준다. 구고신은 배달청년이나 이수인에게는 암울한 현실에서 서광을 비춰준 인물이다. 그러나 이 인물은 완벽하지도 멋진 행보만 보이는 것도 아니다. 처음에는 단언적이고 명쾌한 언어와 행위의 구사를 통해서 영웅처럼 비치기도 하지만 그는 항상 고뇌하고 갈등한다. 그럼에도 그는 곤란한 상황에서 현실적인 방법들을 모색한다. 그가 다른 이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었던 것은 노동환경이나 생존구제에 관해 오랫동안 몸으로 겪어왔기 때문이다. 물론 ‘송곳’은 현실에 바탕을 둔 듯해도 역시 환타지다.

‘미생’이 오피스 환타지라면, ‘송곳’은 노동환타지이다. 드라마나 영화의 환타지를 통해 현실의 결핍이나 고민을 해결하는 모습을 상상하고 대리 충족할 수 있을 것이다. 관건은 환타지의 방향성이다. 조직 안에서 보호하거나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은 없고, 오히려 그 반대이다. 이유는 아예 조직 밖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는 자본의 구조 때문이다. 이 구조의 매트릭스를 간파하고 이에 대응하기 위해 같이 참여하며 도와줄 수 있는 사람도 필요하다. 백마 탄 왕자나 키다리 아저씨보다는 현실적이고, 일상 밀착적이기 때문에 설득력도 높다. ‘미생’의 오차장이 조직 안에서 든든한 조력자였다면, ‘송곳’의 구소장은 조직 밖의 든든한 조력자이다. 여성이든 남성이든 그 성별을 불문하고, 이러한 존재가 있기를 바라는 것은 보편적이다. 그들은 어떻게 현실을 바꿔나갈까 궁금해지는 것은 바로 우리 일상의 아픈 부분, 감추고 싶은 부분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자칫 실망을 더 줄 가능성이 있다. ‘미생’의 오차장이 갑자기 아랍의 사막으로, 황당한 몽상으로 갔다면, ‘송곳’의 구소장은 어디로 갈지 궁금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글/김헌식(culpol, 정책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