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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왼쪽), 김헌식 |
김헌식: 맞다. 폭력적이고 자극적인 장면이 잇따르고 김수현 특유의 대사발이 시청자를 흡입하는 것이다. 보통 사람들이 생각은 해봤으나 감히 내뱉지 못한 원색적인 말들을 거침없이 토해낸다. 주인공들이 싸우는 장면도 마찬가지다. 조강지처의 언니와 정부가 서로 머리 끄덩이를 잡고 뒹굴고 발차기를 하고 그 결과 눈이 시퍼렇게 멍이 든 것까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런 표현에 감정을 동일시하는 시청자는 열광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이 드라마를 외면하는 것이다.
김원: 이 드라마가 동시간대 최고 시청률을 기록하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TV 주시청자가 40대 이후 여성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불륜은 아줌마들의 관심사이므로 이 드라마에 대한 집중도가 높게 나타난 것이다.
김헌식: 이 드라마의 주인공은 얼핏 김상중과 배종옥, 김희애인 것처럼 보이지만 진짜 주인공은 배종옥, 김희애, 하유미다. 김수현 드라마에는 남자가 없다. 남자는 여성의 욕망을 드러내기 위해 혹은 여성의 못 다 이룬 소망을 이루게 하기 위한 장치나 도구에 불과하다. 김수현의 잠재적 심리는 남자의 욕망에 대해서는 별로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김원: 세 명의 여전사와 허수아비 같은 남자가 있을 뿐이다. 김상중은 박제된 캐릭터다. 우유부단해 어느 쪽도 선택하지 못하는 인물이다. 김수현은 남자는 성자와 수컷, 여자는 성녀와 요부 딱 그것밖에 없는 것처럼 그린다. 이 드라마에는 김상중이 왜 김희애를 사랑하는지에 대한 그럴듯한 설명이 없다. 김희애가 연기하는 이화영은 그저 열정 덩어리에 불같아서 남자가 사랑할 수밖에 없는 치명적 팜므파탈(요부)이다. 김희애가 빨강색 속옷 등 노출이 심한 옷을 입고 나오고 연기력으로 보완해서 그럴듯해 보일 뿐 사실 현실성 없는 캐릭터다. 1960~1970년대 자주 등장한 이 같은 인물 설정에 익숙한 나이 든 사람이라면 모를까, 젊은 사람들의 눈에는 딱 ‘미친 여자 아니야?’라고 할 만한 인물이다. 갑자기 깔깔대며 웃고 남자가 난처하다고 하는데도 키스를 퍼붓고…. 그런데 극중 김상중은 독침에 맞아 마비된 것처럼 그녀를 거부하지 못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김희애가 김상중에게 집착하는 모습은 공포스러울 정도다. 낡은 구도의 이 드라마에서 김상중은 조강지처와 정부의 욕망을 투사하기 위해 대상화된 존재일 뿐이다.
김헌식: 드라마는 이야기가 복잡하면 흥행이 안 된다. 착한 여자와 나쁜 여자, 성녀와 악녀 이렇게 단순한 구도여야 한다. 하지만 예술적인 고민을 하는 사람은 이런 드라마를 쓰지 않는다. 또 배종옥을 착한 조강지처, 김희애를 나쁜 정부로 설정했지만 두 캐릭터 모두 남자의 사랑을 받기 위해 안달하는 것은 똑같다. 요즘 현대여성들과는 동떨어진 캐릭터다. 남자 하나에 모든 것을 거는 여자가 얼마나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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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남자의 여자’ 에 남자는 없다. 실제 주인공은 김희애, 하유미, 배종옥이다. |
김헌식: 남편이 바람을 피워 고통받는 여자들을 ‘준비된 불륜녀’로 만들고 있다. 다른 남자와 바람 피운다고 갈등이 해소되나?
김원: 그러려면 남편만 바라보면서 살림 잘 하고 애 열심히 키우면서도 매력까지 있어야 한다는 얘기인데 대리만족이라고 하기엔 너무 끔찍하게 완벽한 것 아닌가?
김헌식: 김수현 드라마에서는 항상 여자는 피해자, 남자는 가해자다. 착하고 순종적인 여자가 남자의 잘못 탓에 강해지고 독해진다는 설정이다. 김수현의 ‘청춘의 덫’ ‘눈꽃’ (김수현이 원작자 겸 제작자였음)‘사랑과 야망’의 여주인공들이 다 그렇다. ‘사랑과 야망’만 해도 미자가 일탈한 것이나 정자가 망가진 것은 다 남자들 때문이었다.
김원: 흥미로운 점은 그녀들의 불행을 불러온 것은 남자들인데 그녀들이 가정의 테두리, 남자의 그늘 아래 있을 때는 작가가 동정표를 던지다가 그녀들이 바깥으로 뛰쳐나간 후에는 자식 버리고 바람 핀 년이라는 식의 낙인을 찍는다는 점이다.
김헌식: 김수현 드라마의 특징은 구도나 사건 전개가 단순명확한데 대사나 심리는 복잡하게 전개되고, 결론은 개연성 없이 갑자기 봉합되는 모습을 띤다는 점이다. 갈등 해결 방법이 전혀 도출되지 않은 채 그냥 봉합되는 것이다. 그저 감성적인 대사, 장면 연출, 편지 등과 같은 장치를 이용해 해피엔딩으로 마무리하는 식이다. 또한 김수현 드라마의 가장 큰 해악은 가해자인 남자에게 피해자인 여성은 어떤 식으로든 보복을 해도 된다는 식이라는 점이다. 가학적 대사들이 난무한다. 그렇게 따발총처럼 쏘아붙인다고 해서 갈등의 원인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김원: 사람들의 피해의식을 자극해 시청률을 끌어올리는 것이다. ‘내 남자의 여자’를 보면서 놀란 것은 65세의 나이에도 어쩜 그렇게 선정적일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김수현 드라마의 선정성이 노리는 것은 결국 시청률이다. 김수현은 어떻게 하면 시청률이 오르는지 본능적으로 안다. 그 수위가 점점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늘 그 시기 다른 작가들보다 반보(半步) 더 나간다. 다른 작가들이 심리적 마지노선이라고 여기는 것을 가장 먼저 깨고 나간다. ‘청춘의 덫’에서 심은하는 자기가 사랑했던 남자의 처남이 될 사람과 결혼한다. 최고령 현역 작가가 후배들에게 남길 게 과연 선정성밖에 없는지 묻고 싶다. 김수현은 인간의 원초적인 어두운 면만 열심히 파헤쳤을 뿐, 진정한 휴머니즘을 쓴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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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는 조강지처와 정부의 대립을 원초적으로 보여준다. 사진은 배종옥 언니로 분한 하유미와 김희애가 극중 몸싸움을 벌이는 모습. |
김원: 김수현 드라마는 얼핏 휴머니즘이나 선(善)을 바탕으로 하는 것 같지만 사실 그런 것은 다 도구로만 쓰일 뿐, 결론은 가부장제에 순응하는 것으로 끝난다. 가족애를 강조하고 남들도 다 그렇게 산다는 식으로 전개된다. 온갖 선정적인 푸닥거리가 결국은 허무하게 매듭지어지는 것이다. 전작 ‘홍소장의 가을’을 보면서 놀란 것은 젊은이들에 대한 작가의 분노를 보았기 때문이다. 사람이 나이를 먹을 수록 세상 모든 것에 연민과 안타까움에서 비롯된 관조적 시선을 가지게 될 것 같은데, 김수현은 그렇지 않았다. 젊은이들을 부모 세대의 피를 빨아먹고 성장했으나 부모를 등지는 세대로 묘사했다. 노년세대는 옳고 젊은세대는 모두 나쁜 것인 양. 그게 부모 된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자식에 대한 속상함을 건드려 시청률에 반영됐다고 본다.
김헌식: 김수현은 휴머니즘을 가장한 병적 자기애를 보여준다. 나르시시즘이 강하다. 예를 들면 ‘내 남자의 여자’에서도 김상중을 정신 못 차리게 하는 김희애의 캐릭터는 일반적으로 남자가 좋아하는 여성상과 거리가 멀다. 김수현은 남자가 사랑할 만한 여성 캐릭터를 내세워야 하는데 여성이 좋아할 만한 여성 캐릭터를 등장시킨다. 그 드라마를 보고 많은 여자들이 남자들이 그런 여성을 좋아하는구나 하고 착각할 것 같다. 또 하나 김수현 드라마에 대해 지적하고 싶은 것은 시청자를 가르치려고 하는 점이다. 김수현 드라마는 모든 상황을 누군가의 입을 통해 규정하고 정리한다. 시청자를 일종의 계몽 대상으로 보는 것 아닌가 싶다. 그런데 어떻게 사람 사는 게 그렇게 명확할 수 있겠는가?
김원: 교조적이다.
김헌식: 김수현 드라마는 여권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드라마에 등장하는 여성은 남성의 사랑을 받으려고 분투한다. 또 가부장적 아버지와 질서에 대한 선망이 담겨 있다. 김수현의 이상적 남성상은 ‘부모님전상서’의 안 교감 같은 캐릭터인 것 같다. 도덕군자이고 존경스러운 신성불가침의 인물이다. 이번 작품에서도 송재호가 연기한 배종옥의 친정아버지가 그런 인물로 그려진다.
<박주연 기자 jypar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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