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돌아온 전설-조용필 이문세의 부활, 왜?

부드러운힘 Kim hern SiK (Heon Sik) 2013. 6. 8. 08:25

 

추억 속에 있어야할 거장들이 걸어나오고 있다. 그냥 걸어 나오는 것이 아니라 화려한 부활을 하고 있다. 이를 지켜보는 이들은 새로운 생명을 얻었거나 마치 10대나 20대로 돌아간 듯싶다. 그들은 예전의 음악이 아니라 새로운 음악을 같이 결합하여 새로운 세대를 팬으로 확보하고 있다. 그 원동력은 바로 기존의 음악 환경의 한계에서 비롯한 것이다.


한류 덕분인지 어느새 한국의 대표가수는 아이돌이었다. 텔레비전과 라디오 가요프로는 아이돌로 전부 채워졌으며, 콘서트는 말할 것도 없고 드라마나 뮤지컬, 연극에도 아이돌 일색이었다. 심지어 지역축제도 아이돌 그룹이 휩쓸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한 문제제기가 많았고 어느 순간 그것을 뒤집는 사건이 일어날 것으로 예측되어 왔다.






드디어 음악환경에 대한 반항과 욕구의 분출이 일어났다. 조용필과 이문세의 대중적 선호가 그것이다. 이런 서호 현상은 이런 아이돌 중심의 음악 문화에 대한 반작용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의도적으로 아이돌을 반대하기 위해 저항운동을 벌이는 건 물론 아니었다. 관객과 팬들은 그런 차원이라기보다는 우리의 음악적 선호는 살아 있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동안 숨죽여왔던 음악적 욕구들이 조용필과 이문세를 통해 분출하고 나아가 융합하고 있는 셈이다. 더구나 싸이의 노래는 해외에서 반응이 좋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매체를 장악했다. 국내에서 조용필의 ‘바운스’는 세계적으로 화제를 모으고 있던 싸이의 ‘젠틀맨’을 이겨버리는 기염을 토했다. 모두 팬들의 폭발적인 성원 때문에 가능했다.


요컨대, 부족해진 음악적 다양성속에서 조용필과 이문세에 대한 새삼스런 주목은 바로 문화적 향유를 소망하는 세대의 자연스런 행동이었다.


사회경제적인 요인이 작용하는 면도 있다. 조용필과 이문세를 비롯한 많은 옛가수들의 귀환은 저성장 시대에 불확실한 미래 전망을 앞에두고 '희망'과 '위안'을 얻으려는 문화심리가 작용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아날로그적인 감수성이 한 몫 한다. 사람과 사람은 만나고 접해야 그 의미와 가치를 더욱 갖게 되기 때문이다. 열정은 줄어들고 냉소가 늘어가는 사회문화적  환경도 간접적인 원인이 된다. 매체의 간접성의 증가와 도시공간의 비대면적 복잡성의 증가는 직접 대면하고 겪어내길 원하는 체험경제 현상을 촉진한다. 최근 조용필과 이문세는 주로 공연을 통해서 대중과 만나는 자리를 마련했고 체험경제 현상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다. 공연은 그만큼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소통과 공감의 장이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여전히 매체들은 아이돌이 장악하고 있다시피하기 때문에 공연이야말로 유일무이하면서도 직접적인 교감의 효과를 빚어낼 수 있겠다.


근원적으로 그들은 끊임없이 공연장에서 관객들과 성장하고 음악적 거성이 되었기 때문에 그러한 교감이 지속될 수 있었다. 이는 만들어진 가수나 상품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이 기획하고 창조하는 뮤지션이기 때문에 대중의 선호를 지속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팬과 교감을 할 수 있는 뮤지션이 있는지 생각해볼 수밖에 없으며, 이는 케이팝의 미래를 의미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최근에 관객에게 선을 보인 두 사람의 음악 공연은 단지 예전 공연을 리바이벌하는 수준은 아니었다. 새로운 무대 장치나 기법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적용했다. 첨단 무대기술이나 조명 장치, 영상 기술을 적절하게 활용하는 연출을 선보였다. 추억의 복고풍 공연이 아니라 지금 현재의 트렌드와 호흡하는 점들을 보여주어 결코 ‘올드’하다는 느낌을 주지 않았다. 이전에는 60의 나이라면 ‘가요무대’에 출연했지만 그들은 이제 스스로 무대를 현재의 음악 코드와 접목 하고 있기 때문에 올드지 않고 새롭다. 오히려 엔틱 한 느낌을 주기에 충분하다. 예를 들어 마법의 기술이라 불리는 서라운드 스피커, 발광 다이오드(LED) 스크린 미디어 월(Media Wall), 무빙 헤드 레이저와 핀 라이트의 입체성, 타워 브릿지 형 무대와 입체적 조명은 오히려 다른 아이돌 공연에서는 볼 수 없던 것들이었다.


무엇보다 주목받는 이는 케이 팝의 역사에서 새로운 의미를 준 조용필이다. 그의 신곡이 지상파 방송사 가요 차트에서 1위를 했을 뿐만 아니라 각종 음원차트에서도 1위를 휩쓸었다. 60대 가수로는 초유의 사건(?)을 만들어냈다. 더구나 19집에 실린 그의 음악은 한 결 같이 실험성과 파격성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 현역가수라는 점을 여실히 증명해주었다. 더구나 그가 가왕이라는 점은 신곡 ‘바운스’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이문세는 조용필의 ‘바운스’를 듣고 깜짝 놀랐다고 밝혔다. 가왕이라는 호칭은 단순히 노래를 잘하거나 다양한 음악을 소화하는 능력적인 측면의 우월성을 가리키는 것만은 아니다. 이는 바로 10대부터 70대까지 모두 공감을 했던 것에서 알 수 있다. 즉, 그에 대한 주목은 과거에 대한 향수 차원이 아니라 현재이자 미래세대의 창조적 포용을 의미했다. 화석이 아니라 생생하게 살아 있음을 보여주어 박제화 된 7080문화를 깨뜨렸다.





무엇보다 음원기대에 수 십 만 장의 음반 판매고를 기록한 데는 조용필의 평생지기 여성 팬들이 있었다. 한번 팬은 영원한 팬이며, 그것은 새로운 창작을 낳는 토양이다. 여전히 그들은 팬과 관객의 힘이 한국대중음악의 동력임을 신뢰와 사랑으로 세대를 초월하여 문화적 동력을 창출 하려 한다. 그것은 바로 원조 팬클럽의 귀환이며, 한국 대중음악이 오늘 까지 지속된 힘을 확인시켜주는 것이었다. 만약 그들이 없었다면 신곡도 혁신적 무대공연도 가능하지 않았으며, 가왕들은 폐기되었을지도 모른다.


이로써 그들은 기성세대의 음악은 세대와 세대의 문화적 코드를 연결시켜주는 현재와 단절이 아니라 하나로 연결돼 있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점은 다른 가수들에게도 귀감이 된다. 팬들은 언제나 가수들이 새로운 흐름에 맞게 변화하고 그 흐름에 맞춰 활동 할 때 언제나 사랑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이는 가수를 중간 정거장으로 여기는 경향을 보이는 아이돌들에게 원조 팬클럽 멤버들이 전하고 싶은 메시지인지도 모른다. 현재의 아이돌이 비틀즈처럼 영원히 팬들을 위해 존재하는 공연문화를 지속시켜주길 바라는 소망, 그것은 뮤지션들에게 시대적 소명으로 자리매김해야 한다는 점을 이들 돌아온 전설들과 함께 보여주고 있다. 글/김헌식(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