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착륙이 필요한 이유
*그린래시(Greenlash)는 기후 변화에 대응하는 일련의 조치들에 반발하고 저항하는 현상을 말한다.
글/김헌식(중원대학교 특임 교수, 정보콘텐츠학박사, 평론가)
코로나 19 팬데믹 상황 속에서 일본의 디지털 서비스의 낙후성이 조롱받은 적이 있다. 예컨대 지원금 지급시 본인 대면 도장 확인이나 팩스를 통한 코로나 환자 보고 집계를 들 수 있다. 이에 빚어지는 행정 비용의 낭비를 언급할 수 있었고 뒤늦은 방역 대응에 대한 비판도 가능했다. 한국처럼 IT 기술을 발 빠르게 쫓는 나라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이를 달리 살펴볼 지점도 있었다. 도장 문화가 많이 살아 있다는 것은 뒤쳐진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도장을 만드는 장인이 아직 먹고 살고 있는 것이다. 도장에 들어가는 인주를 만드는 기업도 같이 먹고 살 수 있다. 한평생 그 일을 해온 세대는 죽음에 이를 때까지 그일을 하며 먹고 살아야 한다. 노인기에 이를수록 더욱 그러하다.
앞서 언급한 팩스도 마찬가지다. 팩스를 아직 쓰고 있으면 팩스기기나 팩스 용지를 제조하는 기업의 직원들은 먹고 살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팩스 업계에 젊은 세대가 평생을 바치겠다고 뛰어들지는 않는다. 당연히 고령의 직원들이 대부분을 이룬다. 만약 갑자기 팩스를 전면 금지한다면 실업자가 쏟아질 것이다. 그렇다고 도장이나 팩스를 고수하라고 할 수는 없다. 관건은 흐름이다. 자연스러운 연착륙 교체가 필요할 뿐이다. 급격한 사회 경제의 변화를 추동하는 것은 단순히 진보의 효과만 낳는 것이 아니기 때문인 것이다.
환경 담론에서도 마찬가지 현상이 벌어질 수 있다. 대표적으로 그린래시(Greenlash)에서 살펴볼 수 있다. 그린래시(Greenlash)는 기후 변화에 대응하는 일련의 조치들에 반발하고 저항하는 현상을 말한다. 그린래시는 백래시(Backlash)라는 말에서 파생되었다. 이를 사전적으로 정의하면 진보적인 사회, 정치적 변화에 반발하는 심리나 행동을 말한다. 그런데 누구에게서 나타나는가가 중요하다. 주로 자신의 영향력이 줄어든다고 느끼는 기득권층에 의해 나타난다고 통상 정의한다. 그런 경우도 있겠지만, 반드시 절대적으로 규정할 수 없다.
그린래시의 사례를 보면 네덜란드에서는 농민을 대변하는 새로운 정당이 인기인데, 이는 환경 정책과 밀접한 당이다. 정부 정책이 2030년까지 가축을 3분의 1가량 줄이라는 했기 때문이다. 가축을 줄이는 이유는 질소 배출 감축을 위해서다. 독일에서는 극우 정당이 재생 에너지 난방의무화 정책에 반대하며 세몰이를 하고 있다. 재생 에너지 비율을 급격히 많이 늘리면 기존 에너지 기업만이 직원의 해고까지 양산할 수 있기에 먹혀들고 있다.
이러한 정당들의 득세에 따라 기존 지도자도 신경을 쓰는 모양새다. 리시 수낵 영국 총리는 기업 100곳에 북해 석유·가스 시추를 허용했는데 영국 환경단체는 이 때문에 자동차 1,400만 대 수준의 탄소가 배출되는 문제를 지적했다. 이에 수낵 총리는 “탄소 순 배출량을 제로(0)로 만들어도 영국 에너지 수요의 25%는 석유와 가스에서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은 환경 규제에 대해 일시중지를 요청했는데 이유는 간단했다. 즉 프랑스는 물론이고 유럽의 산업경쟁력을 떨어뜨려 미국이나 중국을 더 유리하게 만든다고 했다.
우리나라는 어떨까. 얼마 전 화순 탄광 영업소가 폐쇄되었다. 다른 곳도 연이어 폐광된다. 화석 연료를 쓰지 말아야 한다고 하지만 그곳에서 평생 일을 한 노동자 등은 하루아침에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실업자가 되었다. 사양 산업에 이산화탄소도 배출되니 폐쇄하고 재생 에너지발전으로 튼다고 하는 말이 절대적으로 옳아 보이지만 전국 노동자의 관점에서는 달라 보인다.
원자력 발전소가 환경 오염만이 아니라 가공할 재난을 일으킬 것이라는 염려가 없는 이들이 없다. 하지만, 갑자기 폐쇄하면 역시 수많은 협력기업과 구성원들의 생계가 막막해진다. 위험을 알고도 평생 근무하던 이들에 대한 인센티브는 생각할 수 없다. 경유차가 환경 오염물질이 많은 배출이 있어 폐기 처분하게 한다면 이 또한 경제적 어려움을 가중 시킬 수 있다. 여유가 있는 이들이 매연이 배출이 큰 낡은 경유차를 몰고 다닐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태양광이 산지에 들어서게 되면 아무래도 지역 주민에게 친숙한 경관은 훼손된다. 더구나 그 전기는 지역 주민들을 위해 쓰인다는 보장도 없다. 때로는 폭우에 산사태가 우려되는 경우도 빈번하다.
기존의 탄소 배출이 많은 업종의 종사자들은 열악한 조건에서 노동을 통해 생계를 이어온 산업역군들이다. 그들이 당연히 대부분 부자일 리 없다.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통해 시장을 형성하려는 이들은 환경 담론을 특화와 마케팅 포인트로 삼는데, 이에 시대정신에 대중적 효율성과 수용력을 갖고 있다면 대세가 될 것이다. 이전에 기득권을 갖고 있어도 미래에는 이를 보장할 수 없다. 문제는 기득권이 아니라 대세 속에서 위기에 몰리는 사회적 약자들이다.
급격한 변동은 가장 낮은 사회적 약자에게 피해가 크게 돌아간다. 그들은 기득권 세력이 아니며 국민이기도 하다. 그래서 생애주기에 맞게 그들의 생계를 생각할 수 있는 조치가 선행되어야 하는 점이 현실이기도 하다. 트렌드를 무조건 빨리 따라가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며, 그것을 절대적 진보라고 부를 수도 없다. 공화정의 원리가 미래 준비와 대응에도 당연히 적용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회구성원 누구나 자신의 일을 해 온대로 미래에도 생을 영위할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 사람은 컴퓨터처럼 프로그램을 업그레이드나 버전업 시킨다고 당장에 새로운 기능과 역할로 생산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며 인격성까지 갖고 존중을 받아야 할 존재이다. 새로운 미래 세대의 산업과 일자리도 중요하지만 이미 생계에 의존하고 있는 산업과 일자리도 환경 담론에 부응하여 강력하게 고려되지 않는다면 정치적 혼란은 불을 보듯 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