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크놀로지와 문화 콘텐츠

가짜이기 때문에 선호하는 이유

부드러운힘 Kim hern SiK (Heon Sik) 2019. 3. 18. 07:25

선택적 주의 강화와 페이크의 환타지 콘텐츠


              김헌식(카이스트 미래세대 행복 위원회 위원, 박경리 토지문화관, 평론가)

 

허언이란 헛소리다. 거짓말이며 사기이다. 속되게 말하면 구라라고 해도 지나침이 없다. 세칭 허언증 놀이가 젊은 세대에게서 확산되고 있다는 지적이 자주 있었다. 병증으로 볼 때는 허언증이 스스로 만들어낸 거짓을 그대로 믿는 현상을 말한다. 이런 면에서 리플리 증후군(Ripley Syndrome)이나 뮌하우젠증후군을 언급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증상은 상호간에 놀이로 존재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반인격장애로 상대방을 속이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큰 문제를 일으킨다. 왜 허언증이라고 했을까 추측을 해보면, 뭔가 문제가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기존 사고로는 바람직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허언 놀이를 즐긴다고 하면 단순하니 병을 뜻하는 ''이라는 말을 결합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허언증 놀이에 참여하는 사람 시각에서는 허세놀이가 적합할 지 모른다. 그렇다면 이들의 관점에서 볼 때, 이런 허언증 혹은 허세 놀이가 등장한 이유는 무엇일까. 요즘의 허언증 놀이는 디지털과 밀접하다. 우선 참여 수단의 관점에서 볼 때, 디지털 기반의 상호작용성이 확보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댓글 달기 놀이의 연장선상에 있는데, 허언에 댓글이 달리면서 계속 허언이 확장을 하기 때문이다. 만약 이러한 상호작용성에 익숙하지 않은 참여자라면 놀이에 참여할 수 없다. 그것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참여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어떻게 펼쳐질 지 짐작할 수 없는 재미도 있다. 물론 이런 형식적인 요인 때문에 참여하는 것만은 아니다.

 

디지털 공간은 놀이의 유희가 지배하는 공간이라는 점도 생각해야 한다. 심각 하거나 심지어 금기시되는 대상도 놀이의 대상으로 삼아 일탈을 간접적으로 즐긴다. 여기에 참여하는 이들은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고 참여한다. 놀이가 늘 그렇듯이 가상 상황이라는 것을 공유하여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병증하고는 관계가 없다. 병증이 되려면 그것이 진짜라고 믿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러한 놀이 방식은 어린 아이들에게서 발견되고는 한다.

 

예컨대, 공주놀이 같은 것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마치 자신이 공주인 것처럼 스토리를 풀어가고 주변 아이들은 그것을 맞춰주면서 놀이를 이어가는 경우가 있다. 그렇다고 유아적인 현상이라고만 볼 수는 없다. 이런 놀이가 가능한 것은 어린 아이들은 자신이 스스로 결핍된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면서 자신이 되고 싶은 대상에 심리적 투영을 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예전 전통사회에서 머슴들이 양반놀이를 하는 것과 같은 맥락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양반이나 귀족, 왕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은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자신이 되고 싶은 대상에 대해서 역할 놀이, 연극 놀이를 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것은 욕망의 대리투영이라고 할 수가 있다. 현실에서 충족하지 못하는 것을 이런 허언을 통해서 성취해보고자 하는 것이라 볼 수가 있다. 거꾸로 이 시대 사람들이 선망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런 허언의 담론을 통해서 짐작할 수가 있다. 그것이 디지털 공간으로 이동하여 상호관계성 속에서 재탄생하고 있는 것이다. 각종 이모티콘이나 사진, 영상등 다양한 부대 수단은 이러한 놀이를 풍부하게 만든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러한 허언은 능력의 인정이라고 볼 수도 있다.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거나 특정한 성취를 과시하는 유형이 있는가하면 현실을 비판하는 내용들은 모두 거짓말이지만, 그것이 설득력을 가질 수 있도록 구성을 해야 한다. 더구나 댓글들에 반응도 해주어야 하기 때문에 웬만한 능력을 갖지 않고 방어를 하거나 확장을 하는데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즉 그럴듯하게 사기를 치고 거짓말을 하여 상대방도 꼼짝 못하게 하는 데서 성취감을 느끼기도 한다.

 

한편 이런 허언증 놀이가 등장하는 이유에 대해 어떤 이들은 스토리텔링의 본능 때문이라고 하거나 페이크 현상을 즐기는 취향과 기호 때문이라고 말한다. 사회경제학적으로는 젊은 층들의 미취업, 양극화 등의 현실의 무력감을 이런 허언증 놀이 방식으로 극복하려는 의지의 발현이라고 말한다. 원인은 복합적이다. 그것을 만들어내는 토대도 계속될 것이다.

 

다만, 현실에서는 가짜를 진짜로 만들어 자신의 이득을 취하고 많은 이들에게 피해를 주는 이들이 많으니 그들보다는 훨씬 건전하다. 그렇기 때문에 허언증이라는 병증으로 접근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오히려 놀이로 불합리한 현실을 웃어제끼는 여유가 느껴진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런 시대에 한 바탕놀이로 조소하고 있는 셈이다.

 

옥스퍼드 사전편찬위원회가 올해의 단어로 선정하기도 했던 포스트-트루스(‘post-truth’)는 탈진실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는 세계적으로 사실의 진실에는 관심이 없는 대중적 현상을 가리킨다. 몇년전부터 인터넷에서는 가짜 뉴스들이 사실에 바탕을 둔 뉴스들을 밀어내고 중심 자리를 차지해서 논란을 일으켰다. 페북이나 구글에 올라오는 가짜 뉴스들이 진짜 뉴스인 것처럼 급속하게 회자되는 일은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게 했다.

 

미 대선에서는 이런 가짜 뉴스들이 심대하게 유권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지적도 있다. 가짜 뉴스 제작자는 자신 덕분에 트럼프가 당선이 되었다고 말했다. 가짜 뉴스 제작자 폴 호너는 트럼프 반대자들의 시위가 돈을 아르바이트생들이 벌인 일이라는 가짜 뉴스로 트럼프를 조롱했는데 트럼프 지지자들은 이를 사실로 게시하고 널리 퍼트렸다. 그는 무엇보다도 트럼프의 말이 사실이 아닌 곳은 신경을 쓰지 않고 그대로 믿어 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는데 이는 무서운 일이라고 말했다. 이에 심각성을 느낀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가짜 뉴스들이 민주주의를 훼손한다고 말한 바도 있다. 문제가 커지자 SNS기업들은 가짜 뉴스 대응책을 부랴부랴 내놓기도 했다.

 

이렇게 자신이 보고 싶은 뉴스만을 보는 인지 심리 현상을 선택적 주의 현상 또는 선택적 지각(Selective Perception) 이라고 한다. 자신에게 필요한 정보만 선택적으로 지각하고 받아들인다. 칵테일 파티 효과(Cocktail Party Effect)도 이에 해당한다. 파티장에서 많은 소음이 있지만, 사람들은 자신이 필요한 소리나 아는 사람의 목소리는 잘 듣는다. 사회적으로는 자신이 관심있거나 필요한 정보에만 집중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증폭 강화 시킨다. 이른 바 선택적 강화 현상이다. 이러한 증폭은 이제 스마트 모바일 환경 때문에 더욱 급속하게 진전되었다.

 

언론보도에 관한 연구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정치적 성향과 맞아 떨어지는 뉴스만 선택하고 다른 성향이나 정당에 관한 뉴스는 배제하거나 왜곡된 형태로 받아들였다. 즉 보는 것만 보고 보고 싶은 것만 취하는 것이다. 만약 자신이 본래 취하지 않으려 했던 곳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상황이 오면 인지 부조화(Cognitive Dissonance)현상이 발생하게 된다. 그럴 때도 사람들은 합리화의 명분이나 구실을 찾게 마련이다. 매스컴 시대가 저물고 디지털 모바일 시대가 되면 다중화 현상이 일어나서 진실의 왜곡이 일어나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오히려 그러한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결국 시스템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있는 것이다.

 

꽤 오래전부터 대중문화는 판타지 콘텐츠의 범람 속에 있다. 팀버튼의 판타지 영화 '미스페레그린과 이상한 아이들의 집', 마블의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는 마법을 등장시키며 500만 이상의 관객 동원에 성공했으며, '신비한 동물 사전'도 마법을 통해서 관객 몰이에 성공하고 있다. 특히 마블사까지 판타지를 영웅과 결합시켜내기에 이르렀다. 단순히 액션영화가 아니라 환타지와 SF 그리고 신화의 세계 구분이 없어졌다. ‘블랙 팬서그리고 캡틴 마블을 보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반지의 제왕이나 나니아 연대기처럼 구분이 되지 않는다. 출판가에서는 '신비한 동물 사전'을 비롯해 판타지 소설 '해리 포터와 저주받은 아이'가 베스트설러 1위를 차지했다. 드라마 '푸른 바다의 전설'이나 '도깨비'는 우리의 고전이나 민담에서 익숙한 인어나 도깨비를 등장시키며 판타지 드라마 세계를 구축한다. 물론 그것은 중화권 시장을 염두한 것이었다. 그곳이 그것을 금기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금기는 잠재된 시장의 수요를 축적 시키는 법이다.

 

이를 객관적으로 본다면 말도 안되는 스토리와 구성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이러한 내용을 진실로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강력한 힘을 발휘하게 된다. 이는 자신이 보고 싶은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만약 아무리 판타지라고 해도 자신이 보고 싶고 원하지 않는 맥락이니 메시지가 있다면 외면할 것이다. 모든 것이 너무 명확하더라도 이렇게 자신이 원하는 것만 보는 현상, 그것이 비록 가짜나 거짓말이라고 해도 그렇게 용인하는 현상은 왜 일어나는 것일까. 영화나 드라마같은 허구의 현실로 도피해 버리는 것일까.

 

확실해질수록 확실하지 않은 것에 기대여는 존재가 사람이다. 과학이 발달할수록 과학이 못할 것 같은 힘이나 존재에 의존하고자 한다. 또한 어쩌면 정보가 많아질수록 사람들은 피곤해지고 있다. 이는 마치 세상이 복잡해지고, 교류가 세계적으로 일어날수록 더욱 심화되는 현상일 지 모른다. 인간의 뇌는 사바다 시대의 영역에 머물러 있는데 그들이 접하고 처리해야할 정보나 판단과 선택 사항은 폭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정보나 지식을 많이 범람시킬수록 사람들 사이에서 진실을 왜곡하기는 쉬워지는 셈이다. 사회모순이나 범죄를 바라보는 인식도 이에서 자유롭지 않다. 자신들이 보고 싶은 관점으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특정목적에 따라 활용될 때, 쏠림 현상이 본질을 흐리고 잘못된 해법이나 결과물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정치가 갈수록 판타지가 되어가는 일은 이때문에 벌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판타지의 운명은 정치에서 명확할 수 있다. 정치의 판타지가 깨어지는 것은 유권자가 보고 싶은 모습을 보여주지 않기 때문이다.

 

애초에 판타지 같은 정치 이미지를 구축하는 경우에는 필연적인 운명을 맞게된다. 근래에 일어나고 있는 현실 파국의 분노의 격정여론일 것이다. 그 깨어짐으로 환상의 이미지로 정치하는 세력은 교체 대상이 될 수 밖에 없다. 처음부터 뭘 기대했던가, 진실을 알고 있던 이들에게는 놀라운 일도 분노할 일도 아닌 법이다. 미국에서도 트럼프가 백인 유권자들에게 보여준 것은 그들이 보고 싶은 것, 판타지들이다. 이 때문에 당선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깨어질 것은 분명한 운명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제 큐레이션 콘텐츠나 미디어만이 아니라 큐레이션 정치, 큐레이터 민주주의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