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힐링 열풍은 웰빙과 어떻게 다른가?

부드러운힘 Kim hern SiK (Heon Sik) 2012. 9. 21. 13:07


근래 스님들의 책 여러 권이 베스트셀러 상위권을 차지하면서 화제가 되었다. 스님들의 책들이 이렇게 한 번에 여러 권 베스트셀러에 오른 것은 처음이라서 더욱 눈길을 끌었다. 대개 우리는 여러 개가 한 번에 겹치거나 함께 일어나면 어떤 징후가 아닐까 싶은 생각을 한다. 스님들의 여러 책이 한 번에 주목을 받았기 때문에 그 이유에 관한 탐구(?)가 언론매체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갑자기 불교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라도 일어났다는 말일까. 많은 전문가들은 그 이유를 대체로 힐링, 치유코드 때문이라고 결론 내렸다. 실제로 힐링 하면 왜인지 모르게 산사나 숲에 찾아가야 되는 듯싶다. 도시를 떠나 좋은 경치와 맑은 숲 그리고 여행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어떻게 보면 웰빙과 구분이 안 된다. 웰빙도 좋은 경치를 찾아다니고 맑은 숲에서 휴식을 취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힐링 코드는 기존의 웰빙과 어떤 점이 다른 지 살펴야 한다. 웰빙은 삶의 질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예컨대 웰빙은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집에 살아도 좀 더 환경 친화적이라는 점을 우선한다. 음식의 맛 자체보다는 성분이나 생육 환경을 따져 좀 더 건강에 도움이 되는 음식을 선호한다. 옷도 단지 비싸거나 보기 좋은 것만이 아니라 인체 피부에 좋은 점을 더 우선한다. 웰빙은 결국 잘 사는 법을 말한다지만 웰빙 생활은 또 하나의 문제를 낳는다. 웰빙은 한편으로 집착을 낳는다. 꼼꼼하게 상품이나 서비스를 신경 써야 한다. 웰빙은 이제 다른 사람들과 비교 대상이 되었다. 어느새 웰빙은 신분과 지위를 나타내는 수단이 되어버렸다. 웰빙 상품이나 공간은 일반 제품보다 비싸고 그런 제품을 사용하지 않으며 무식하거나 교양이 없는 것으로 인식될까 불안하고 염려되었다. 무엇보다 웰빙을 추구하려 하지만 오히려 상처와 피곤을 얻게 되는 것이었다. 더 좋은 것을 가지려는 욕망 때문이다. 그런 집착과 소유욕은 사람을 시기와 질투로 갈라놓고 불행하게 한다.


예컨대, 단지 공기 좋은 곳을 찾는 것이 건강을 위한 웰빙이라면 힐링은 공기 좋은 곳을 찾는 그 행위자체가 촘촘한 일과 일정으로 꽉 찬 공간을 떠나 훨훨 벗어나는 것이다. 가득 소유하고 있던 것들을 잠시 비어내고 숨 가쁜 일정과 바쁜 일들을 마음에서 털어내며 비움으로 그 자리를 가득 채운다. 단지 좋은 경치를 찾아서는 “공기 좋고 물 맑은 곳에 건강하겠지” 라고 하면 ‘얻음’(소유)을 추구하는 것이므로 웰빙인 것이다. 만약 웰빙을 얻지 못했다고 느끼는 순간 그 행위 자체를 후회, 집착하게 된다. 무엇인가 계속 얻으려는 웰빙에서 벗어난 힐링의 관점에서는 소유가 치유로 바뀌고 있다.

스님들의 책이 각광받는 맥락이 여기에 있었다. 불가에서는 소유가 집착을 낳고 집착은 번뇌를 낳으면 이는 마음의 병이 된다고 한다. 선불교에서는 방하착(放下着)을 강조한다. 이는 공(空)사상에 따라 집착을 끊고 내려놓는 것이다. 자신과 자기 것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으면 마음이 비워지고 그 안에 비움으로 채우게 된다. 비움은 평안과 포용을 낳는다. 이렇게 비움에 관한 생각은 비단 선불교에 해당하는 것만은 아니다. 잔에 물이 반 정도 차 있는 것을 보고 쇼펜하우어가 말했다. “반밖에 안 남았군!” 이 말을 듣고 에피쿠로스가 말했다. “반이나 남았군.” 이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노자가 말했다. “반밖에도 아니고 반이나도 아니다. 빌수록 점점 쓰임이 늘어난다.” 꽉 차 있다는 것은 이미 쓸 여지가 없다는 것을 말한다. 빈틈이 있을수록 이는 쓰임이 있다. 비워낼수록 쓸 수 있는 여지가 많이 늘어나는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노자의 ‘허(虛)’사상이다. 자신이 많은 것을 갖지 않을수록 다른 것을 그 안에 채울 수 있다. 자기 것에 대한 생각을 비워내면 그 안에 다른 이들도 채울 수 있다. 자기만 꽉 차면 다른 이들을 포용할 여지가 없다. 다른 이들을 움직이지 못한다. 만약 태풍의 눈이 꽉차있다면 태풍은 거대한 움직임을 가질 수 없다. 거대할수록 속은 비어있고 위대한 지도자일수록 비워둔다.


동양에만 이런 비움의 철학이 있다 하면 서양인들이 섭섭하게 생각한다. 케노시스는 그리스어로 비움이라는 뜻이다. 예수가 자신을 아무런 지위와 명성이 없는 상태로 만드는 것을 일컫는다. 자기 자신을 사회에서 비워내는 것이다. 자신을 지위와 명성으로 가득 채울수록 쓰임이 없는 셈이 되며 다른 이들을 끌어안을 수도 없다. 이렇게 자기만을 앞세우고 다른 사람들을 배척할 때 그 사이에서 갈등이 생기고 상처가 생긴다.


프로이트는 『문명과 불만』에서 인간이 행복하지 못한 것은 문명 자체가 아니라 인간관계를 조율조정 해결 하는 제도가 제대로 마련되지 않거나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부정하고 문명이전의 자연의 세계로 돌아가라는 루소의 주장에 더 귀를 기울인다고 했다. 이는 비단 행복이 숲이나 바다, 산사로 들어간다고 해서 성취되지 않음을 뜻한다. 행복은 사람들 사이에 있는 것이다.


노자의『도덕경』에 이르길 서른 살의 바퀴살이 모이는 바퀴통은 비어있기에 서른 개의 바퀴살을 잘 돌아가게 만든다고 했다. 만약 그 바퀴통이 꽉 차 있으면 마찰에 따라 서로 시끄러운 소리만 낼뿐 돌아가지도 않는다. 물론 수레도 움직이지 않는다. 결국 비워냄은 혼자 스스로만 행복해지려는 것이 아니라 남과 내가 같이 잘 조화롭게 살 수 있는 자율적인 역량의 회복이다.


그런데 이제 힐링과 치유도 어떤 지역이나 공간을 찾고, 힐링 프로그램을 꼭 이수해야 되는 것 같다. 치유를 위해서는 멘토가 있어야 할 것도 같다. 또 누군가를 찾아가 말씀을 들어야 힐링이 되는 듯싶다. 또한 누군가와 말하고 어울려야 만이 힐링이 되는 것으로만 여겨진다.

티모시 윌슨은 <스토리>에서 많은 실험과 연구결과 서로 자신들의 상처를 말하는 것은 힐링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상처와 그에 따른 느낌을 다른 이들에게 그대로 드러내는 것은 감정에 충실할 뿐, 비움이 아니라 증폭이었다. 가장 힐링이 잘 되는 것 중에 하나는 글쓰기였다. 왜일까? 객관적인 정리와 대안의 모색, 즉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고 일상과 행동, 생각들을 정리하는 것 그것 속에서 비어냄을 찾을 수 있어서다. 이렇게 자신의 빈 공간에 다른 이들을 조화롭게 채워야 하는 것이 삶이라는 사실을 재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김헌식 문화평론가


*LH에 실린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