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태양왕 루이 14세궁정예술을 통한 정치의 결과는...?

부드러운힘 Kim hern SiK (Heon Sik) 2014. 5. 20. 10:11
프랑스 뮤지컬 '태양왕'의 라이선스 공연 포스터.ⓒEMK 뮤지컬컴퍼니
“짐은 국가다”라고 말한 태양왕(Le Roi Soleil) 루이 14세(1638-1715)를 베르사유(Versailles) 궁전과 떼어 놓고 말할 수 없다. 그가 베르사유이고 베르사유가 그이다. 그가 태양왕인 것은 베르사유를 만들고 그것을 적극 자신의 권력을 위해 활용했기 때문이다. 

그는 천재 조경사 앙드레르노트르와 건축가 루이르보를 비롯 당대 최고의 실내 장식가·예술가· 3만 명 이상을 동원해 엄청난 비용과 50년이라는 시간을 들여 웅대한 베르사유궁전을 완성했다. 어찌나 큰지 1만 명 이상의 왕실 식구가 상주할 수 있었고, 한 달 내내 있어도 다 돌아보지 못할 만큼 거대했다. 공사비용은 일반 성(城)을 500개나 만들 수 있는 양이었다. 

많은 예술가와 공장(工匠)들이 동원되어 ‘왕의 거실’을 비롯‘궁정예배당’, ‘거울의 방’, ‘전쟁의 방’ 등을 만들었다. 베르사유 궁전의 하이라이트는 ‘거울의 방’인데 357개의 대형 거울로 장식하고, 보석으로 치장했다. 2007년 프랑스 건설회사 빈치가 '거울의 방' 보수공사를 했는데, 무려 1600만 달러의 비용이 들었다. 루이 14세는 1400개나 되는 분수에 물을 연결하게 했지만, 물이 부족해 왕이 궁전의 정원을 거닐 때면 그가 지나가는 순간에만 분의 물이 뿜어지도록 했다. 

루이 14세는 애인을 많이 두었는데, 침대만 해도 궁전 내에 413개나 있었다. 베르사유 궁의 일과는 정확히 아침 8시에 시작되었고 담당 시종이 왕의 침실로 들어가면 최고위 귀족 4명, 시종 16명, 옷을 든 16명, 총을 찬 2명, 이발사 8명, 소년 시종 6명, 의자 나르는 사람 2명, 옷장을 나르는 사람 10명이 그 뒤를 따라 들어와 루이 14세의 수발을 들었다. 이렇게 화려하고 웅장한 베르사유 궁전은 어마어마한 인력과 경제적 토대 위에 성립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루이 14세는 이 왕궁을 프랑스 절대왕정의 절정기인 18세기 당시 화려한 궁정문화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무엇보다 베르사이유 궁전을 무도회나 연극 공간으로 만들어 귀족들을 끊임없이 불러들였다. 루이 14세는 귀족들의 감각을 자극하는 화려한 연출의 축제, 연회, 연극, 무도회 등에 막대한 예산을 투여했다. 그는 이를 통해 자신의 권력과 부유함은 물론 문화적인 수준을 과시했다. 

한편으로 그가 궁극적으로 원했던 것은 귀족들의 통제였다. 이러한 문화예술 공연을 통해 귀족들이 베르사유 궁전을 배회하게 만들었고, 이로 인해 루이 14세는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파악할 수 있었다. 귀족들은 차츰 궁의 생활에 권태로움을 느끼기도 했지만 베르사유 궁에서 이탈하는 것은 명예에 금이 가는 것으로 생각해 벗어나지 못하고 말았다. 

그만큼 당대의 최고의 문화예술의 향연이 벌어지는 베르사유 궁전 안에 거주한다는 의미만으로도 선택받은 자라는 인식이 형성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당대의 최고 작품이 선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호사가들이 벗어나지 못했다. 당시 궁에는 천여 명의 귀족과 영주들, 그의 가족들이 살았고 4천 여 명의 궁신(宮臣)들이 기거했다고 한다. 

무엇보다 루이 14세는 단순히 각종 공연을 뒤에서 지원만 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 무대의 주인공이 되었다. 왕은 화려하게 장식한 큰 태양을 수놓은 무대 의상을 입고 아폴로나 마르스 신처럼 무대에 등장해 자신의 절대 권력을 과시했다. 특히 카루젤 축제에서는 찬란 화려한 금빛 태양으로 꾸며진 의상과 코디를 연출한 루이 14세가 등장했고, 그 앞에는 만 오천 명의 관객이 꽉 차 있었다. 형형색색의 옷을 입은 각 귀족들은 가문의 문장을 새긴 방패를 들고 왕에게 무릎을 꿇은 채 머리를 조아렸다.

그런데, 밤이면 밤마다 베르사유 궁전에서는 공연이 성황리에 이뤄졌지만 정말 중요한 게 없었다. 화장실 변기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귀족들은 개인적으로 용무를 처리해야 했고, 궁은 지저분하기 일쑤였다. 수천 명이 궁 안에서 개인적으로 처리하는 양은 엄청났다. 루이 14세 시대의 베르사유 궁전의 재산 목록에는 274개의 의자 식 좌변기가 있었고, 그는 26개나 되는 개인 변기를 가지고 있었다. 

이 또한 그의 권력과 경제력을 뽐내는 장치였다. 그는 구멍 뚫린 의자 변기에 앉아 의사결정을 하고 명령을 내렸다. 변기는 자개를 활용해, 꽃과 새 문양으로 화려하게 장식하고, 왕의 위엄을 세웠다. 변기에 특별한 약초를 넣어 분내를 옅게 하기도 했다. 아무리 신이 내린 존엄한 왕의 변이라고 해도 냄새는 나는 법이다. 

그렇다면, 루이 14세는 얼마나 많은 돈을 궁정예술을 위해 썼을까. 대략 국가 예산의 약 50%를 베르사유 궁전 유지비로 사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이 유지비는 대부분 궁정에서 이루어지는 공연과 연회 그리고 기거하는 사람들에게 소요되는 것이었다. 귀족이나 영주가 세금을 더 내지 않는 상황에서 이 궁전 유지비는 국가 재정에 상당한 타격을 입혔다. 

더구나 루이 13세 때 10만에 불과 했던 상비군을 60만까지 늘렸는데, 아우구스부르크 동맹전쟁,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 등까지 수행하면서 많은 세금이 더 들어갔다. 당연이 많은 돈을 국민들에게서 거두어 들여야 했고, 국민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졌다. 파리 시내에는 많은 거지들이 들끓었고, 당시 프랑스인의 평균수명은 25세에 불과했다. 루이 16세 때 일어난 프랑스 혁명의 전조는 바로 루이 14세부터 시작되었다. 루이 16세는 억울한 면이 있었다. 그는 재정개혁을 위해 귀족들을 압박했지만 실효를 거두지 못했을 뿐이었는데 형장의 이슬이 되다니 말이다. 

어쨌든 루이 14세는 국가의 절반에 해당하는 돈을 들여서 궁정예술을 진흥시키고, 자신의 권력과 입지를 확고하게 했다. 그리고 수많은 귀족과 반대세력들을 자신의 통제권에서 움직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비용 때문에 그 화려한 베르사유 궁전 밖에서는 굶주리는 시민들이 넘쳐나고 말았다. 다만, 루이 14세로 인해 프랑스의 궁정예술은 발달했고, 이는 오늘날까지 프랑스의 문화예술에 대한 이미지를 확고하게 형성하는 기반이 되었다. 이를 통해 말할 수 없는 경제적 효과를 낳고 있다. 이런 아이러니란. 

글/김헌식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