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 분석

짤의 문화심리

부드러운힘 Kim hern SiK (Heon Sik) 2017. 10. 20. 22:59

짤의 문화심리

:짤없다가 짤있다로, 새로운 순간 언어의 미학

 

짤은 짤방의 줄임말이고 다시 짤방은 짤림방지의 줄임말이라고 한다. 요즘 신조어의 기본원칙은 말줄임의 약어이다. 심지어 모음이나 자음만 조합을 하기도 한다. 예컨대, 짤방은 ㅉ ㅂ이 된다. 갈수록 간단한 기호화 되는 것이다. 압축이 디지털 시대의 콘텐츠 심리인지도 모른다. 영상을 포함한 콘텐츠는 최대한 용량을 줄여서 전송을 하여야 한다는 무의식이 작용하고 있는 지 모른다. 짤이 탄생하게 된 것도 이런 압축에 대한 강박에 가까운 심리 때문에 기인했는지 모른다.

2000년대초 디시인사이드가 짤의 자궁이라고 말한다. 이미지를 중요시했던 새로운 디지털 문화가 정자에 해당하는 지 모른다. 당시에는 텍스트 중심의 사회에 대한 이미지 세대의 저항이 디시인사이드에 토양을 이루고 있었다. 이때문에 텍스트만 올리게 되면 짤리는 대상이 되었다. 짤린다는 것은 주목을 받지 못한다는 곳이고 이는 존재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인터넷에서 자신들이 작성한 글이나 컨텐츠가 리플이 달리지 않는 무플 현상이 제일 무섭고 공포스럽다고 한다. 왜냐하면 존재 자체가 부정된 것으로 인식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악플이 고마뭄의 대상이 된다. 나쁘게 평가를 받았어도 누군가 시선을 주었기 때문이다.



짤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물론 악플은 기분이 좋지 않다. 짤림을 당하는 것은 배제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조건 주목을 받아야 한다. 이는 생존의 문제였다. 당장에 형식적인 요건을 채워야 하기 때문에 사진이나 그래픽 이미지를 무조건 삽입을 하기에 이른다. 적어도 요건을 갖추었기 때문에 텍스트 내용이 좋고 나쁘고를 따지지 않고는 배제되는 일은 부당하기도 하다. 따라서 상관없는 사진이나 그래픽을 넣는 곳은 정당화 될 수 있었다. 그런데 거꾸로 의외의 사진이나 그래픽 이미지를 넣은 것이 웃음을 주게 되었다.

짤에는 저항의 의미가 담겨 있기도 한 것이다. 짤이라는 한국말 자체가 주는 어감도 있다. 짤이라는 말이 짤 없다는 말을 연상하게 한다. 기원은 확실하지 않지만 '일절'60-70년대 사이에 '얄짤'로 음이 바뀌었고 짤로 굳어졌다는 설이 있다. 一切'모두' '전체'라는 뜻으로 쓰일 때는 '일체'라고 읽고 부정의 뜻으로 '아무 것도' '전혀'라는 뜻으로 쓰일 때는 '일절'이라고 한다. 외려 짤이 없다는 말은 어림도 없다는 말을 넘어서서 오히려 짤이 있다는 저항적 역설적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짤이 전체일 수도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은 디지털 시대이기 때문이다. 많은양, 전체를 통해서 본질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간단, 혹은 순간을 통해서 본질적인 것을 보여주어야 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이런 저항과 자신의 메시지 부가는 짤의 기본적인 특징이면서 정체성이 되기도 했다. 이를 말해주는 것이 패러디 짤이라고 할 수 있다. 패러디는 우리가 알고 있는 스토리나 캐릭터 들을 다르게 재창작하여 본질적인 의미를 다른 측면에서 제시한다. 이를 전복적인 풍자라고 일컫기도 한다. 여기에서는 주로 영화, 드라마, 광고, 애니메이션 등을 포함한다. 사람들이 많이 알고 공유할 수 있는 대중문화 콘텐츠가 그 매개물이 된다. 알고 있는 콘텐츠가 캐릭터나 장면을 재미있게 재창작하는 것이 중요했다. 반드시 사회적인 메시지를 통해 묵직한 여운을 남기는데 궁극적인 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렇게 되면 결국 재미와 오락성이 짤의 기본적인 특징이며 목표가 되는 것 같다. 그것 자체가 하나의 콘텐츠로 텍스트에 삽입되어 있을 때는 그럴지도 모를 것이다. 이는 움짤이라고 하는 짧은 동영상 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움짤은 말그대로 움직이는 짤이다. 움짤은 고정되어 있는 그냥 짤보다는 동적인 움직임을 주기 때문에 보통 짤보다는 시각적 인지적 효과 면에서 달랐다. 5초 정도 안에 순간적인 동적인 움직임을 담아내고 있는 것이 움짝이다. 자신들이 강조하고 싶은 동적인 움직임을 강조한다. 그 반복적인 행동이 웃음을 준다. 왜냐하면 우리는 보통 특정 행위를 반복적으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똑같이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사람이 아니라 사물이 그렇게 하는 것이고 만약 사람과 같은 존재가 그렇게 반복한다면 웃음을 유발한다. 하지만 일정한 시간이 넘어가면 식상과 피로감이 몰려오게 된다. 여전히 움짤은 시간에 주목했지만, 특정 시간을 넘어 가면 매력을 잃게 되는 것이다.

짤이라는 것 자체가 순간의 미학에 기반을 두고 있고 그것은 포착의 미학이다. 이미지에 시간을 가둔 것이다. 움짤은 GIF라는 테크놀로지 기술을 통해 좀 더 반복적으로 연장할 뿐이지만 그 시간은 그리 오래되지 않는다. 여기에는 사진과 영상의 중간 절충의 채널을 찾은 새로운 세대의 문화적 기호이자 언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짤은 새로운 언어 기호이다. 젊은 세대는 항상 자신만의 정체성을 형상하려고 한다. 그것은 기존 사회나 세대와는 다른 분별되는 구별짓기의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테크놀로지기술이 크게 짤의 변화와 진화에 기여했다는 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새로운 단계로 짤이 진화하게 된 요인에는 스마트폰의 등장이었다. PC에서는 디시인사이드 같은 커뮤니티 사이트를 중심으로 짤이 공유되었다. 스마트모바일 환경이 2008년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짤은 더욱 폭발했다. 그것은 바로 SNS가 일상의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 급속하게 들어오게 되었기 때문이다. 카톡이나 페북처럼 언제 어디서라도 접근할 수 있는 소셜네트워크 서비스의 등장은 이런 짤을 모바일 커뮤니케이션의 필수요소로 자리 잡게 했다. 사람들은 짤을 저장했다가 적절한 대화 상황에서 이를 사용했다. 좋은 짤을 찾으면 그것을 다를 이들에게 빠르게 공유했고 심지어 자기 스스로 만들어서 그것이 많이 선호되는 것을 성취감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런 짤의 소통 수단으로 사용한 것은 비단 젊은이들에게만 한정된 것은 아니다. 트렌드를 쫓아야 한다는 기성세대들 특히 중장년 남성들도 적극적으로 이를 받아들이고 사용하게 되었다. 그렇게 짤을 많이 사용하게 되는 것은 자신도 트렌디 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도 했지만 다른 이유가 있었다. 짤이 다양한 감정 표현을 드러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상 한국과 일본의 남성들은 감정 표현을 다양하게 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러한 SNS 짤을 통해서 내면의 감정을 겉으로 표출하고 싶었기 때문에 사용을 빈번하게 했다. 하지만 이러한 점은 일상생활과 많이 들수록 인간관계에서 부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고 같이 동시대 구성원으로 인정받으려는 타인지향을 통한 충족감의 자아심리는 작동했던 것이다.

움짤은 더욱 더 이러한 기능과 역할을 할 수 있을 듯이 보였다. 스마트모바일 문화가 발달할수록 움짤의 기능이 더욱 강화되기에 이르렀다. 그만큼 기술적으로는 정보의 전송속도를 감내할 수 있게 되었다. 전문적인 앱도 생겨났을 뿐만 아니라 핸드폰에서 움짤을 만들 수 있게도 되었다. 사진이나 그래픽 자체보다는 동영상이 더욱 동적인 생동감을 주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페이스북등은 아예 자체 내에 그러한 기능과 서비스를 선을 보였다. 동적인 생동감은 순간을 연장하는 것이지만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생명력을 갖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짤은 처음부터 일관된 기능과 정체성을 동시에 갖고 있다. 그것은 혼자만 즐기거나 작품화를 지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기 위해서 만들거나 이용했다는 점이다. 처음에 짤이 디시인사이드에 탄생한 것은 짤리지 않기 위한 방지책이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대화를 하는 창에서 사용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사람들의 눈길을 잡아 끌거나 자신이 사용한 짤이 다른 사람에게 일정한 감정적인 영향과 반응을 이끌어 낼 수 있기를 바라면서 사용한다. 당연히 다른 사람과 공유하고 싶은 것도 이 때문이다. 대화창은 순식간에 엄청난 양을 기록하고 그 가운데 순간적으로 짤이 생긴다. 흐름의 가운데 순간이 개입되어 다시 흐름을 이루게 촉진하는 것이 짤이다. 자신의 미학적 만족만을 위해서 탄생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중문화콘텐츠이며 대중문화심리를 반영하는 운명에 있었다. 그것이 한편으로는 짤이 언어라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 언어를 사용하는 종족이 얼마나 되는가에 따라서 확장성은 달라질 것이다. 영화나 소설 가려진 시간 사이로에서 보여주는 비밀스런 언어 종족은 이제 짤을 넘어서 이모지나 이모티콘으로 진화했다. 미래의 고고학자들은 이러한 짤을 발굴하여 의미를 캘지 모른다. 미래의 문화유산 그것도 언어유산일 것이다. 이렇게 되어가는 것은 짤이 시대적인 감수성과 맥락을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공유 범위와 시차의 흐름에 따라서 짤은 고립될 수도 있는 것이다.

짤의 미학은 찰나의 미학이다. 순간적으로 인식되고 감흥을 일으키고 공유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면을 본다면, 디지털 시대의 소산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오히려 짤은 아날로그적이다. 그 순간을 통해서 전체를 보여주려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전체를 볼 수 있는 것은 시간의 누적적인 경험이 존재해야 가능하다. 누적적인 경험이라는 것은 순간의 축적을 말한다. 그러한 경험의 축적이라는 전제가 없다면 짤은 그야말로 짤이 없는 것이고 짤림방지를 제어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왜 디지털에서 아날로그가 나오며 다시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상호 창출되는지 알 수 있다.

글. 김헌식(평론가/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