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블시네마 리뷰

오히려 보이는 것은 진실을 가린다.

부드러운힘 Kim hern SiK (Heon Sik) 2020. 6. 15. 06:20

-웃는 남자(The Man Who Laughs 2012) 리뷰

 

17세기. 영국 귀족들은 기괴한 모습의 동물이나 사람을 구경하는 호사취미를 공유하고 있었다. 그런 존재를 접할 수 있는 것은 부와 지위를 드러내는 수단이었다. 본래는 진귀한 존재를 구경하는 수준이었겠지만, 주객이 전도되기 시작했다. 원래 있는 존재가 아니라 나중에는 고의로 만들어냈다. 예컨대, 인신매매집단이 아이들을 납치해 기괴한 존재로 만들어 귀족들 앞에 구경거리로 팔았다. 그들이 말하는 기괴한 존재는 바로 장애인일 수 있었다. 이제 신체장애가 있는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는 것이 마치 자신의 신분을 돋보이게 하거나 지위를 뒷받침하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영화 웃는 남자’(The Man Who Laughs)에 나오는 타조린필드는 상설 장터로 마귀를 구경하러 온 자들로 들끓었는데, 마귀를 구경한다는 것은 공연을 보는 것을 의미했다. 인신매매집단 콤프라치코스는 그웬플렌을 납치해 입을 찢어 놓는다. 자신이 스스로 웃으려 하지도 않은데 언제나 웃고 있는 표정이 된다. 즉 안면근육장애인이 된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를 주시하고 조롱하고 괴롭히면서 우월감을 느낀다. 자신들은 마음대로 웃음을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자랑이라도 하는 듯이 웃어제끼면서 말이다. 안면장애에도 단 한명 그의 영혼을 사랑한 이가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미처 몰랐다. 그의 영혼을 사랑한 데아는 시각장애인이었고 본다는 것의 역설을 원작자 빅토리 위고 대신 전하는 메신저다.

 

그들의 스토리는 다음과 같았다. 어느 추운 겨울날 그웬플렌은 인신매매집단에서조차 배제되었다. 쓸모가 없어진 모양이었다. 정처 없이 추운 겨울밤을 헤매던 그는 얼어 죽은 여인의 품에 있던 생후 5-6개월 된 아이를 만나게 된다. 얼어죽을 듯한 눈밭에서 헤메던 그웬플렌은 떠돌이 약장수 우르수스의 마차를 두드린다. 우르수스는 데아는 앞이 보이지 않았고 입이 찢어진 그웬플렌을 보고 처음에는 놀랐지만, 두 아이를 식구로 받아들인다. 약장사가 시원치 않았는지 우르수스는 웃는 얼굴의 그웬플렌과 시각 장애인 데아를 내세우며 새로운 공연을 시도한다. 그들은 공연으로 지방에서 명성을 얻어갔고 마침내 왕이 있는 궁정 도시에서 공연을 하게 된다. 그웬플렌의 인생 스토리를 공연하기 시작하면서 귀족들도 관심을 갖게 된다. 구체적으로는 웃고만 있는 그웬플렌과 눈이 평생 보이지 않는 데아의 러브 스토리는 열화와 같은 호응을 받았다.

그런데 유명세는 대가를 치르는 법일까. 단순히 팬으로 호응을 보내는 차원을 넘어 사심을 가진 이가 나타난다. 마차를 몰고 온 귀족여성이 그웬플렌을 유혹하기에 이른다. 그 귀족여성은 앤 여왕의 이복동생인 조시아나 공작부인이었다. 하지만 그웬플렌은 그 유혹에 빠져들 수 없었다. 데아를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데아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본다는 것은 진실을 감춘다.” 데아는 보이지 않기 때문에 보는 것으로 진실을 감추게 되는 일은 없게 된다. 따라서 데아는 그웬플렌의 영혼을 느꼈기 때문에 그웬플렌을 사랑한다. 데아는 다른 사람들이 놀리는 그웬플렌의 웃는 얼굴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오히려 그웬플렌의 온전한 내적인 면을 사랑한다. 데아는 비록 그웬플렌의 신분이 밝혀지게 됨에도 그런 외적 조건에 관계없이 사랑한다. 공작부인과는 다른 점이었다.

 

그런데 사실 그가 후작의 아들이었음이 밝혀진다. 후작은 앞선 왕과 투쟁을 벌이는 와중에 밀렸던 것이다. 그의 아들인 그웬플렌은 납치 되어 얼굴에 상처를 입혀 장애를 얻게 되고 천민으로 전락하게 되었던 것. 납치범이 실토하자 시종이 나타나 그웬플렌의 신분을 확인하고, 그에게 막대한 재산규모까지 알려준다. 전혀 생각하지 못한 신분의 환원으로 그의 입지가 달라졌다. 어쩌면 자신의 신분에 맞게 여성 공작의 유혹에 그만 넘어갔는지도 모른다. 여성 공작은 잔인하게도 데아를 대저택에 불러들여 자신이 그웬플렌을 유혹하는 광경을 목도하게 만든다. 데아는 충격적인 광경에 혼란스워하고, 대저택의 화부 노동자들 때문에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하지만 공작부인은 호기심과 정복욕에만 머물렀다. 정말 그를 사랑한 것은 아니었다. 그웬플렌을 외면했다. 처음에는 웃는 남자라는 기괴하고 특이한 존재에 대한 호기심이었고 그가 후작이라는 걸 알았을 때는 정복욕에 다름이 아니었다. 가난하고 눈이 보이지 않는 데아에게 확실히 자신의 권능을 과시하는 수단으로 사용하고 만 것이다.

 

 

그웬플렌의 웃는 얼굴은 그가 후작임에도 상류층에게 조롱의 대상이 된다. 후작이 정치적 영향력을 가질 수 있다는 시종의 말에 따라 여왕과 귀족들 앞에서 개혁적인 주장을 설파한다. 귀족과 왕을 위한 정치가 아니라 시민과 국민을 위한 정치를 말한다. 가진 자, 권력자가 아니라 가난하고 힘없는 자를 대변하는 정치를 주장한다. 하지만 여왕은 퇴장하고 귀족들은 놀리고 조롱한다. 특히 그의 외모를 들어 비하, 폄하를 마다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 같은 귀족인 그웬플렌을 단지 외모적인 점들을 들어 폄하하고 아예 배제시켜버린다. 그의 말을 듣기조차 하지 않는다. 데아의 말대로 보는 것이 진실을, 나아가 진리를 가린다. 상처받은 그는 결국 그 넓은 저택에도 갈 데가 없다. 다시 시장 마당으로 돌아왔는데, 데아는 숨을 헐떡이고 있다. 상심을 한 데아가 독극물을 들이켠 것이다.

 

안면근육장애인 귀족 그웬플렌과 빈민 시각장애인 데아가 서로의 장애를 보듬고 사랑을 그대로 사랑했다면 세상은 달라졌을지 모른다. 작품이 극적 효과를 꾀한 데아가 스스로 세상을 떠나는 모습은 비극적이다. 비록 비극적 감동을 줄지는 모르지만 수동적인 캐릭터로 남았기 때문에 사회적 역할 모델로 삼기에는 한계가 있다. 눈이 보이지 않는 데아가 연기자로 활약을 했던 것은 정말 고무적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에서는 자신 스스로 삶의 이야기를 스토리텔링했다. 오늘날에도 시각 장애인이 배우로 활동하기는 쉽지가 않지만, 스스로 자신의 이야기를 장애인들이 말하는 것을 넘어서서 작품 활동으로 이어지게 할 수 있다면 더 바람직하겠다. 우르수스는 사람들이 항상 나쁘지는 않아. 나쁘게 구는 것은 두렵기 때문이야. 자신에게 익숙하지 않은 대상에 두려움을 느끼게 되어 나쁜 짓을 하게 되는 거야.”라고 했다. 데아는 더욱 살아남았어야 한다. 그것은 장애인이 더 많이 활동할 수 있다면 배척하거나 위해를 가하지 않을 것이다.

 

이 영화를 통해서 비장애인이 자신의 입지를 돋보이고 장식을 위해서 장애인을 도구화하는 사회적 현실을 다시 한 번 반성하게 된다. 물론 오늘날에는 17세기처럼 볼거리, 즐길 거리로 삼지 않을 수 있지만 장애인을 돕고 배려하는 것이 자신들의 위신과 입지를 과시하기 위한 수단으로 여전히 활용하고 있다. 애써 장애를 부각하는 것이 위험해 보이는 이유다.

글/김헌식(평론가, 칼럼니스트, 박사)

 

*계간 이미지『E美지』에 실린 글(2019년 겨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