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연극 <격정만리>의 미래는?

부드러운힘 Kim hern SiK (Heon Sik) 2009. 4. 25. 02:52

06.04.22 16:48 김헌식 (codess)


지금 꼭 사랑하고 싶은데 너는 내 곁에 없다

사랑은 동아줄을 타고 너를 찾아 하늘로 간다

그리움으로 하여

왜 우리는 산산이 부서져 흩어져야 하는가

모든 것을 바치고도

왜 나중에는 이 찢어지는 아픔만을 가져야 하는가

이별의 이 안타까운 눈빛을 가져야 하는가.

그리움에 사무쳐 이별의 고통을 감내하는 이는 누구인가. 이들이 개인 혹은 연극인들만이며, 꼭 과거 속의 사람들일까?

지난 16일 대단원의 막을 내린 연극 <격정만리>의 제1장은 이렇게 시낭송과 함께 시작된다. 김명곤 문화관광부 장관이 장관 임명 전 대본을 쓰고 연출까지 맡은 연극 <격정만리>는 극단 '아리랑'의 20주년 기념 공연작이다. 지난 16일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하지만 잘 알려졌듯이 초연은 아니며 그간 우여곡절이 많았다. 1991년 '연극의 해'에 서울연극제에 참가하려다가 실패했다. "연극인을 친일파와 친미파로 묘사해 연극사를 왜곡했다"는 집행위 지적에 따라 참가가 취소돼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또 북한의 가극 <피바다>의 원전인 '혈해지창 서사'를 삽입해 친북적 시각이 다분하다는 지적을 받았고 남한의 연극인들을 친일파로 묘사했다는 비판에 직면했던 것이다. 같은 해 대학로 소극장에서 최종원, 방은진, 이호성, 하덕성, 방은미 씨 등이 출연한 가운데 극단의 정기공연으로 살아나기는 했다.

이번 공연은 세월의 무게를 보여주듯이 화려한 연출기법을 통해 이루어졌다. <격정만리>는 '연극으로 보는 우리 연극사'다. 1920년대부터 1950년대 한국전쟁까지의 역사적 상황에서 연극인들의 격정적 삶을 담은 극중극 작품이다.

창극, 신파극, 악극 등 옛 시절의 공연 모습을 실감나게 재현했는데 <장한몽>, <아리랑>, <호신술> 등 신파연극·영화를 비롯해 '황성옛터', ‘사의 찬미’, '애수의 소야곡', '독립군 아리랑' 등 당시 불렸던 노래들을 클라리넷, 아코디언, 해금 등을 갖춘 5인조 밴드가 연주한다.

신파극의 변천사를 보여주는 가운데 신극과 신파극의 대립, 좌우 갈등 속의 연극 등이 녹아있다. 연극을 위해 치열하게 고민했던 당시 연극인들의 시대적 삶을 생생하게 보여주어 "우리 근현대 연극사를 공부하는 것 같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김명곤 문화부 장관은 한 언론사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념이 아니라 연극인들의 삶과 사랑에 중점을 뒀습니다. 우리 연극 형태가 어떻게 변했는지, 음악은 어떤지 재미있게 보고 듣다가 마지막에 가슴에 와닿는 것 하나만 갖고 가시면 됩니다."

관객의 반응은 엇갈렸다. 친일과 이념 갈등 문제를 보는 연극인 시각이 좋다는 긍정론과 재탕이라는 부정론이 얽혔다. 정작 극장을 찾는 관객들은 그리 많지 않았고 대중적 평가도 인색했다. 김명곤 문화부 장관 역시 "요즘 시대 이념을 논하는 것이 낡은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사회성 있는 작품이 세월을 따라가지 못하는 현상은 <격정만리>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2년 전 황석영 원작, 김석만 연출로 선보인 <한씨 연대기>도 이와 비슷한 반응이었고 최근 3000회 공연을 돌파한 뮤지컬 <지하철 1호선>도 마찬가지였다. 1980∼90년대 명작품들의 재공연은 미흡함을 더 남겼다는 것이다. 당대 담론을 일으켰던 20세기의 작품들이 한물 지난 물건같이 취급되는 것은 씁쓸한 일이다.

단지 이념과 친일문제 때문에 대중의 지지를 못 받은 것은 아닐 듯싶다. 그 한 가지로 등장인물을 들 수 있다. 작가이자 연출가로서 김명곤은 남자 주인공 '배우 홍종민'에 그 자신을 투영하고 있다. 이른바 '광대 정신'이다.

장관 취임사에서 말하는 광대는 "넓고 큰 영혼을 갖고 시대의 고통과 불화에 마주 서서 인간에 대한 사랑을 온몸으로 감싸 안고 표현하는 상생의 창조자"다. 홍종민은 그러한 역할을 해낸다. 여기에 홍종민의 애인 이월선과 동료 박철, 심영복, 진경숙, 송진섭 등은 모두 치열한 연극인의 삶을 모색하지만 굴곡의 현대사에 휩쓸린다. 그런데 홍종민에만 치중하는 바람에 이월선을 고리타분하게 만들어 버렸다.

연극의 첫 장면은 이월선이 예전 연극 동료 박철을 만나면서 시작된다. 월선은 다리를 저는데, 이는 일제시대에 다리를 다쳤기 때문이다. 이는 개인적인 비극에서 그치지 않고 일제의 지배를 받은 민족의 한과 고통으로 이어진다. 그녀는 처음에는 매우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여성으로 자신의 삶을 개척하려 했다. 자유연애, 치열한 연극 세계 추구가 그녀 자체였다. 이 때문에 홍종민과 불화를 겪고 헤어지고 만다.

그러나 그 가능성에도 이월선은 <격정만리>에서 낙오되어 가정으로 퇴화한다. 시대의 한계를 의미할 수도 있다. 여배우이자 신여성이 좌절한 이미지다. 극 후반부로 갈수록 이월선은 시대를 겪는 주체가 아니라 남편을 찾아 부르는 집안의 여인에 불과해진다. 남성 주인공은 '탐색 플롯'에 살고, 여성은 '결혼 플롯'에 사는 오류가 <격정만리>에도 반복되어 있다.

이월선은 이러한 제한과 구속에서 갇혔고, 그의 다리는 그러한 점을 상징적으로 말해준다. 그리고 과거에 묶여 미래를 묻어둔 채 과거 회상에 함몰된다.

<격정만리>가 시대적 상황을 넘어 고전의 반열에 오르고 끊임없이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더 많은 변신과 접합이 필요할 것이다. 세대는 변하고 시대상황도 변하지만 보편적인 메시지와 역사적 감수성은 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1950년대 홍종민 이후의 연극사는 이월선의 기억 속에 묶여 있다. 그 뒤가 <격정만리 2>로 나왔어야 하지 않나 싶은 것이다. 애초의 <격정만리>가 지닌 한계일지도 모른다. 여하튼 그런 연극을 보고 싶은데 없는 게 현실이다.

"지금 꼭 사랑하고 싶은데 너는 내 곁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