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크놀로지와 문화 콘텐츠

불편한 요리를 왜 하는가

부드러운힘 Kim hern SiK (Heon Sik) 2019. 4. 13. 14:15

          김헌식(카이스트 미래세대 위원, 평론가, 박사)

 

입시를 앞두고 있을 때 선생님들 뿐만 아니라 많은 교재 혹은 지침서에는 밥을 빨리 먹고 공부할 수 있는 방법을 말한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아껴서 문제를 푸는 데 시간을 할애해야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있다는 지침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런 논지에 따른다면 밥 먹는 시간은 없었으면 싶었다. 애써 음식을 조리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다. 

 

인간은 영양을 흡수해야 활동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영양을 흡수한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음식을 간편하게만 먹을 수 있으면 되는 것 아닌가 싶어진다. 우주인들이 스페이스 안에서 헤엄을 치면서 간단하기 짜서 먹을 수 있는 튜브 형태의 음식이라면 충분히 인간의 활동을 유지하는데 문제가 없지 않나 싶다. 음식을 먹다보면 이빨에 끼일 수도 있고 그것이 충치의 원인이 된다.  음식을 마실 수 있다면 충치는 물론이고 양치를 할 필요도 없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점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인간은 원시시대에는 생식을 했다. 생식을 한다는 것은 조리를 하는 것보다 각고의 노력을 더 할 필요가 없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인간은 불편하게도 요리를 하였다. 요리를 한다는 것은 대체적으로 익히는 음식을 만드는 과정이다. 물론 초밥처럼 익히는 과정이 없는 경우도 존재한다. 하지만 생선살은 부드럽기 때문에 애써 조리할 필요 없이 본연의 맛을 느끼고 흡수도 영양 있게 할 수 있다.

 

대부분은 음식을 익히는 조리를 하는 과정을 겪는다. 익힌 음식을 통해 인간은 몸의 부담을 한결 덜하게 된 것은 사실이다. 몸에서 각종 소화액으로 부드럽게 만들어서 흡수하게 만드는 데 이렇게 되면 소화기관이 무리하지 않아도 된다. 소화과정에 들어가는 에너지를 쓰지 않아도 된다. 이 에너지를 다른 곳에 쓸 수 있고 그 대표적인 곳이 뇌라고 추정되된다. 인간이 익힌 음식을 먹으면서 뇌가 더욱 발달하는 호모 사피엔스로 진화하는 것이다. 

 

조리하는 과정은 불편하고 그 과정에 각종 기술은 물론이고 도구가 필요하다. 인간의 음식은 이런 도구와 기술의 발달로 더욱 다채로워졌다. 영양을 더 풍부하게 만들어주기 위해서 블편함을 구가했을까. 그냥 한 곳에 넣고 갈거나 분말로 만들면 간단하지 않을까. 그것도 하나의 기술이 필요로 하고 방아나 믹서기 같은 도구의 발명을 낳았다. 그러나 그 단순한 방법만으로 인간을 만족시킬 수는 없었다.

 

인간은 조리를 하면서 진화를 했다. 일단 신체의 진화가 다른 동물과 달라졌고 요리에 필요한 도구가 발명되었다. 그로 인해 먹을 수 있는 음식의 종류는 더욱 더 다양해졌다. 지금도 수없이 음식이 탄생을 하고 있다. 테크놀로지는 편리함만을 추구하지 않는다. 어떤 불편한 과정을 하는 것이 기본적인 특징이다. 불편함을 감수하는 것은 그에 따른 결과물이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물은 만족감과도 연결이 된다.

 

식감이라는 말을 쓴다. 갈아서 그리고 짜내는 단순한 방법을 벗어나는 것 중에 하나다. 왜 이러는 걸까. 하나의 과즙 형태로 먹는다면 편리할 수 있고 충치에 걸리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것은 식재료의 본연의 식감이나 풍미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바라지 않게 된다. 

 

따라서 음식에 관한 테크놀로지는 도리어 오히려 불편하게도 작동한다. 더 많은 에너지를 사용하기도 한다. 더구나 원산지나 재배지와 멀리 떨어져 있는 상황에서 유통 운송 기간이 길수록 더 많은 에너지와 장비 그리고 기술을 써서 보존을 하게 한다. 물고기를 보라. 어차피 죽여서 먹을 것인데 그것을 살리려고 수조가 달린 자동차를 이용한다. 또한 죽었다고 해도 얼음 냉동고를 가진 운송 수단을 이용하기도 한다. 막대한 전기가 들어감에도 능히 이를 감수한다.

 

한잔의 물과 한줌의 과자를 먹기 위해 잔뜩 포장을 하거나 유리병을 사용하고 포장재와 라벨을 디자인한다. 이를 우리는 문화예술적 디자인을 하기에 이른다. 당연히 여기에도 큰 노력과 고민이 들어가게 됨은 물론이다. 한순간 입안을 즐겁게 하는 그 순간 때문에 불편함을 능히 감수하는 것이다. 그것이 인간이고 문화적 지향이다. 문화적 지향의 존재는 불편함의 감수에서 시작하여 그것에서 종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