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

북한의 시계는 일제 강점기에 멈춰있다

부드러운힘 Kim hern SiK (Heon Sik) 2011. 2. 9. 19:39

<김헌식 칼럼>북한의 시계는 일제 강점기에 멈춰있다

2010.11.26 09:16

 




[김헌식 문화평론가]프로이트는 성적 욕망이 인간을 움직인다고 주장해 파란을 일으켰다. 모든 인간의 행동을 성적인 욕망에서 비롯한다는 그의 주장은 반발을 불러일으킬만 했다. 도덕적 윤리적인 지향점을 가진 인간을 염두에 두거나 합리적, 이성적인 인간의 특징을 더 강조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한 일이겠다. 

프로이트 주장의 전부가 들어맞는 것은 아니지만, 부분적으로는 분명 부정하지 못할 일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의 발견이 의미를 갖는 것은 성적 욕망과 인간의 행태 사이의 인과관계가 아니라 무의식에 대한 발견이었다. 그가 성적 욕망이 잠재되거나 축적되어 있는 무의식이 인간의 행태를 이끌어낸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후기 프로이트 학파들은 성적인 욕망에 주목하기보다는 무의식과 인간의 행태에 더 관심을 갖는다. 그 대표적인 정신분석학자가 구스타프 융이다. 융은 무의식을 발전시켜 원형무의식 개념을 강조했고 그의 개념 가운데 집단무의식이 세간의 눈길을 끌게 되었다. 이같은 관점은 인간에게는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무의식이 존재하며 이는 성적인 욕망과의 인과관계를 단절시키기 일쑤다. 이런 맥락에서는 인간의 무의식과 그에 따른 정체성의 변화를 설명하지 못한다. 

이러한 점을 부각시킨 것이 에릭슨이다. 에릭슨은 초기 정체성의 개념을 부각시켰다. 이는 프로이트의 외상의 개념을 원용 발전시킨 것이다. 사람들은 어린 시절의 경험에서 일생을 걸쳐 중요하게 영향 받는다. 이러한 프로이트의 관점은 물론 어린 시절의 외상을 찾아내어 치료하려는 것에서 비롯했다. 에릭슨은 인간의 유아시기의 경험이 인간의 정체성을 형성한다고 보았다. 이는 어린 시절의 경험을 성적인 측면에서 부정적인 관점으로 접근한 것과는 차별화되었다. 정상적인 정체성을 형성하는 과정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이다. 

이러한 측면은 프롬의 사회적 성격과 맞물린다. 프롬은 사회에 따라서 물적 토대에 근거한 사회적 성격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한 성격은 사람들이 만들기도 하고 사회적 토대에서 영향을 받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문화적 정체성과도 맞물린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종합하며 문화적 관점에서 기술하면, 사회형성 초기의 경험이 문화적으로 정체성을 형성하고 그것이 구성원들에게 무의식적으로 끊임없이 영향을 미치게 된다. 클로테르 라파유의 < 컬처 코드 > 는 이러한 관점이 일부 담겨있다. 

예컨대 미국은 청년기 문화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신세계 이주나 서부개척의 무의식을 문화적 정체성으로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할리데이비슨이나 지프차를 선호한다. 하지만 프랑스는 그러한 문화적 정체성이 없이 안정과 품격을 중요하게 한다. 도전과 창조를 통한 자기 성취의 미국식 문화적 정체성과는 다르다. 더구나 미국은 서부개척 상황에서 인디언 등을 복속했기 때문에 패권주의를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북한의 경우를 살피면, 북한의 정체성은 일제시기에 해당한다. 김일성의 일본군 타격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보천보 전투다. 1937년 6월 4일 함남 갑산군 보천보에서 일본군을 사살하고 잠시 그 지역을 점령한 것을 가리킨다. 

즉, 김일성이 유일체제의 수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일제시기 보천보 전투 이후의 신화화에 기인한다. 그러한 명분과 입지 때문에 북한의 전체주의는 대항세력을 무력화시키면서 나름의 통치 질서를 마련할 수 있었다. 김정일 체제에서는 뚜렷하게 보여준 것이 없었고, 오히려 김일성의 후광에 기대어 근근하게 버티어냈다. 그것은 갈수록 리더십의 위기를 불러일으켰다. 

김정은이 김일성의 이미지를 복제하며 실력자로 등장한 것은 바로 북한의 사회 문화적 정체성을 그대로 보여준 것이다. 즉 일제시기 항일의 코드가 북한의 문화적 정체성인 것이다. 이러한 상황 설정에서는 공격과 타격을 위주로 자신을 합리화 할 수 있다. 모든 행동은 바로 제국주의나 군국주의와의 싸움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이러한 논리로 북한 주민을 단결시키려 한다. 한국전쟁의 명분도 이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하지만 아주 불행하게도 2010년 지금은 일제시기가 아니다. 그러한 점에서 퇴행적인 문화적 정체성을 계속 유지 강화하는 것이 얼마나 불행하게 하는지 확인하게 되고 있다. 무엇보다 아무리 생존을 위한 일이라지만, 그러한 퇴행적인 행동들을 강화하여 시대착오적인 행태들을 유도할 수 있는 환경들을 제공하지 않아야 한다. 

글/김헌식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