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canny

로봇배우

부드러운힘 Kim hern SiK (Heon Sik) 2012. 11. 10. 13:04

이머징 이슈]



 현대 사실주의 연극이론의 창시자 스타니슬랍스키는 무대에 올라선 배우는 매순간 극중 인물로서 삶을 살아야 관객에게 진실한 감동을 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정형화된 연기는 관객 모독이라며 극도로 혐오했다. 모든 배우가 교과서처럼 배우는 사실주의 연기방법론도 역사 속으로 들어갈 시기가 머지않은 것 같다. 기계 로봇의 정형화된 연기도 관객에게 감동을 준다는 사실이 증명됐기 때문이다. 세월이 지나면 위대한 예술도 바뀌는 것일까.

 지난달 30일 남산 국립극장의 커피숍에 저명한 연극비평가와 제작감독, 로봇공학자가 한자리에 모였다. 로봇 배우 두 명(?)이 등장하는 창극공연 ‘2009 엄마와 함께 하는 국악보따리’의 최종 리허설을 앞두고 ‘로봇 기술과 공연예술의 미래’라는 주제로 과학, 예술계 사람들이 난상 토론을 벌인 것이다. 한국생산기술연구원에서 개발한 인간형 로봇 에버와 세로피는 지난 2월 시연회를 거쳐 무대 연기자의 가능성을 확인받았다. 이번 공연에서 두 로봇은 주연배우로 정식 데뷔하고 200만원의 개런티도 받았다. 전자신문사 요청으로 열린 이날 모임에서 양측 인사는 로봇 배우가 새로운 예술적 표현도구로의 잠재력이 매우 크며 생산자가 아닌 소비자 위주의 로봇기술 활용모델을 보여줬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김동언 경희대 교수=사실 연극무대에 처음 로봇을 세우기로 했을 때 관객 반응을 무척 걱정했습니다. 로봇의 연기는 혼이 없는 껍데기라는 비판을 우려했지만 의외로 관객 반응은 매우 긍정적이고 진지했습니다. 이번 공연도 열흘치 극장좌석이 벌써 매진됐으니 로봇이 흥행성을 보장하는 코드라는 사실은 입증됐다고 봅니다.

 ◇채승훈 수원대 교수=어차피 연극이란 것은 무대에서 벌어지는 허구입니다. 어떤 배우가 햄릿을 실감나게 연기해도 그가 진짜 햄릿은 아니지요. 그렇다고 배우에게 가짜인 주제에 왜 햄릿 흉내를 내냐고 비판하지 않습니다. 로봇 배우의 연기도 무대에서 가상의 캐릭터를 추구한다는 측면에서 사람 배우와 같다고 봐도 될 겁니다.

 ◇이호길 한국생산기술연구원 박사=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습니다. 이번 로봇 공연도 따지고 보면 수백년 전부터 내려온 인형극의 21세기 버전이라고 봐야 합니다. 인형극을 보면서 사람들이 웃고 눈물을 흘린다면 디지털 꼭두각시 인형(로봇)의 연기도 관객에게 감동을 주는 것이 당연하다고 봅니다. 로봇이 예술적 연기를 할 수 있는지는 더는 논란거리가 아닙니다.

 ◇김홍석 한국생산기술연구원 박사=동감입니다. 일회성으로 끝나는 공연예술에서 언제나 똑같은 연기를 재연하는 로봇 배우의 등장이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궁금합니다. 로봇 배우는 연출자가 시키는 대로 하루 종일 연기를 하니까 자칫 연극계에 계신 분들께 우리가 큰 미움을 받지나 않을지 걱정됩니다. (웃음)

 ◇채승훈 교수=괜한 걱정입니다. 로봇 배우가 널리 보급된다고 해도 실제 배우들이 쫓겨나는 일은 생기지 않을 겁니다. 로봇 배우로 인해 공연예술이 활용할 수 있는 표현도구가 하나 더 늘어나는 셈이지요. 모든 공연예술이 관객에게 가슴 벅찬 감동을 선사할 필요는 없습니다. 적당한 재미와 교육적 효과를 위해 로봇 기술을 활용하면 공연예술은 훨씬 풍요로워질 것입니다. 다만 로봇 공연을 어떤 예술장르로 규정할지는 지금부터 생각할 문제입니다.

 ◇김동언 교수=로봇 배우의 연기가 무조건 기계적이고 똑같다는 편견에는 반대합니다. 머지않아 로봇 배우는 관객의 반응에 따라서 연기 템포를 조절하거나 양방향 소통까지 가능해질 겁니다. 그러면 연기 못하고 대사를 줄줄 읽는 배우를 가리켜 마치 로봇 같다는 욕은 못하겠지요. 적당한 센서나 프로그램을 입력하면 로봇 배우도 환경변화에 따라서 움직일 수 있지 않습니까.

 ◇이호길 박사=로봇 배우에게 연기를 가르치더니 로봇 전문가가 다 되셨군요. 이번 공연을 준비하면서 로봇 개발자로서 많이 반성했습니다. 사실 로봇공학계가 매달려왔던 각종 기술적 문제들이 실제 소비자(예술계)의 눈에는 전혀 중요하지 않더라는 것이지요. 에버 얼굴에는 섬세한 표정을 위해서 23개 모터를 넣었는데 연극인들은 모터를 빼고 로봇 얼굴이나 더 작게 만들라는 식입니다.

 ◇김홍석 박사=맞습니다. 우리 눈에는 결함투성이 로봇인데 연극하는 분들은 이걸로 충분하다면서 기막히게 활용하더라구요. 그동안 로봇공학계는 항상 기술적으로 발전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렸지만 이제는 현장에 로봇 플랫폼을 던져 놓고서 소비자 목소리를 겸허하게 경청할 필요가 있습니다. 걷고 뛰거나 어려운 일을 해내는 로봇이 가장 첨단이고 유용하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채승훈 교수=앞으로는 로봇 배우가 사람과 함께 등장하는 게 아니라 수십대의 로봇 배우만 출연하는 무인 연극공연도 가능할 것입니다. 감정에 흔들리고 가끔 펑크도 내는 인간 배우보다 차라리 가면을 씌운 기계인형이 더 훌륭한 예술적 표현도구라는 주장은 20세기 초반부터 나왔으니까요. 로봇은 현대과학기술의 꿈이고 대중에게 소구력이 매우 커서 공연예술계가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김동언 교수=로봇 배우는 확실히 예술계가 예상치 못했던 변수입니다. 로봇 배우가 디지털 소품을 넘어 주인공 역할을 하도록 예술계가 고정관념을 떨치고 포용한다면 한국의 공연예술은 소비자에게 훨씬 세련된 모습으로 접근하게 될 것입니다. 로봇 전문가들도 예술계의 목소리에 더 큰 관심과 적극적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이호길 박사=로봇은 처음부터 인간의 꿈을 담아내는 캐릭터였습니다. 그동안 로봇 연구계가 개별적인 기능 구현에 너무 매달리면서 대중의 꿈을 담아내는 것을 소홀히 한 측면이 있습니다. 이번 로봇 공연을 준비하면서 소비자가 원하는 로봇 시장을 많이 배워 정말 기쁩니다.

 토론을 끝내고 달오름 극장에서 구경한 에버와 세로피의 연기는 제법 그럴 듯했다. 적어도 어린이 관객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로봇이 사람보다 더 유리한 측면이 있다. 한 10년 뒤에는 뮤지컬, 연극무대에서 다양한 컨셉트의 로봇 연기자를 쉽게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영화산업에서 인간의 연기가 아니라 3D 그래픽으로 창조된 가상 캐릭터 주인공을 봐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다. 일회성으로 끝나던 공연예술도 이제 물리적으로 복제가능한 디지털 시대로 들어가고 있다. 이러한 변화의 주역은 로봇 배우(robot actor)다.



 ◇로봇 기반 공연예술의 현주소

 역사상 최초로 연극무대에 주연으로 등장한 로봇 배우는 누구일까. 생기원의 에버3와 일본 미쓰비시 중공업의 와카마루가 정식으로 무대에 데뷔한 1세대 로봇 배우에 해당한다.

 지난해 일본 오사카는 로봇시티로서 이미지 확산을 위해 로봇 주인공이 등장하는 연극 프로젝트를 구상했다. 일본 오사카 대학에서 세계 최초로 개봉한 로봇 연극은 한 쌍의 커플이 두 대의 남녀 로봇(와카마루)과 함께 대화를 나누면서 인간의 삶에서 로봇의 역할을 놓고 토론하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연극에서 로봇은 매일 지루하고 의미 없는 일을 하는 현실을 불평하며 인간에게 질문을 던진다. 극작가 히라타 오리자는 ‘나, 일꾼’이란 제목의 연극작품이 인류와 기술의 관계에 물음을 제시한다고 말했다. 대충 눈치를 챘겠지만 심오한 철학적 배경을 지닌 연극이 대부분 그렇듯 따분하고 재미없는 작품이다. 아직 표현능력에 한계가 많은 풋내기 로봇 배우에게 처음부터 너무 어려운 연기를 시킨 셈이다.

 로봇 연극은 지난해 20분 분량만 공연했지만 내년까지 전 편을 완성할 계획이다. 당초 오사카 시 당국은 로봇이 출연하는 전용극장을 만들어 관광객이 즐겨 찾는 지역 내 명소로 만들 계획이었는데 너무 철학적이고 무거운 연극작품이 나오자 못마땅해 했다는 소문도 들린다.

 와카마루는 지난해 연극무대에 출연했지만 공연시간이 20분에 불과했고 사람의 모습을 한 로봇은 아니었다. 반면에 완벽한 인간의 이목구비를 갖춘 에버3는 지난 1일 총 70분의 공연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연기자로서 순탄한 데뷔를 했다. 공연내용도 노래와 춤이 어우러진 축제 분위기여서 일본 로봇 배우와는 캐릭터가 전혀 다르다. 10일까지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열리는 ‘2009 엄마와 함께 하는 국악보따리’ 공연은 국악 반주에 맞춰 맘껏 노래하며 즐기는 어린이 체험국악공연이다. 지난 2월 시연회에서 에버는 한자리에 고정된 상태였지만 이번 공연은 무대를 마음대로 돌아다니는 기동성을 갖춰 연기 폭이 훨씬 넓어졌다는 평가다. 외형도 고운 한복 차림으로 관객의 호평을 얻고 있다. 로봇 세로피는 우주에서 지구의 판소리에 이끌려 아이들과 에버를 이어주는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국악계에서는 로봇 에버의 판소리 연습장면이 인기를 끌자 학생들에게 국악보급을 위한 로봇 콘텐츠로 활용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배일한기자 bailh@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