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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아에 붙은 일본 꼬리표를 떼라

부드러운힘 Kim hern SiK (Heon Sik) 2009. 10. 20. 14:20

 

매년 그해 최고의 흥행작은 한국영화가 차지했다. 하지만 이 기록은 2009년에는 볼 수 없을 것이라는 예측이 지배적이었다. 지난 6월 < 트랜스포머: 패자의 역습 > 이 2009년 최고 예매점유율, 2009년 최다 사전 예매량 등의 기록을 수립하며 극장 스크린을 싹쓸이 하다시피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침체일로의 한국영화는 < 트랜스포머 > 를 대적할 수 없을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7월말 < 해운대 > 가 개봉했다. 이 영화는 천만관객 동원에 성공했고, 약 750만 명이 관람한 < 트랜스포머 > 를 제쳤다. 그런데 흥행가속도가 붙은 영화 < 해운대 > 의 관람객이 1300만 명 관객 동원할 것으로 예측되었다. 하지만 천만관객을 동원한 이후 급격하게 추동력이 상실되었다. 그 이유로 < 해운대 > 의 불법 유출을 든다.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흥행 대작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즉 이 영화가 없었다면 영화 < 해운대 > 를 더 보았을 것이다. 그 영화가 바로 < 국가대표 > 다. 이 영화가 천만관객을 동원한 것은 아니지만 < 해운대 > 의 개봉 뒤에 뒷심을 발휘해 800만 관객동원에 성공한다.

< 국가대표 > 는 그동안 한국 영화계에서는 실패한다는 스포츠를 소재로 하고 있다. 2007년 흥행 영화 <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 (2007)이 핸드볼을 다루었듯 국가대표는 점프스키라는 비인기 종목을 다루고 있다. 영화의 흥행으로 선수들에게 대한 격려는 물론 경기장 응원도 한층 흥겨웠다.

비인기종목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증가하면서 핸드볼은 큰 발전을 이룰 것으로 보이기도 했다. 영화 < 국가대표 > 도 잘 알려지지 않았던 스키점프 선수들의 고난과 역경을 그려내었고 이 때문에 응원의 활성화, 정책적 지원이 활발하게 이루어질 것으로 여겨졌지만, 사실상 그것이 끝이었다.

무엇보다 흥행하기 힘들다는 두 영화의 공통점 가운데 하나는 그냥 스포츠 영화가 아니라 국가 대항전이라는 것이다. 비판적으로 본다면 국가주의와 민족 이데올로기가 점철되어 있는 영화가 되는 것이다.

한국의 스포츠의 특징은 보통 때는 별로 관심이 없다가도 국가 대항전이 되면 흥미진진하게 본다는 점이다. 물론 국가대표 선수단 정도 되면 실력이 출중할 수 있기 때문에 볼만은 할 것이다. 하지만 국가 대항전에만 쏠리는 관심은 스포츠 저변의 확산에는 별 도움을 주지 못하고 만다.

백남준은 한 대담에서 한국은 예술조차 올림픽 경기 보듯한다고 비판했다. 이 말은 스포츠 경기는 그 자체로 음미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을 말해준다. 예술이나 스포츠나 전장터에 나가는 전사들이 되어야 한다. 전쟁을 방지하고 세계평화를 이끌어내는 스포츠 경기가 오히려 한국선수들에게는 전쟁터였다.

당연히 국가 대항전에만 매달리는 스포츠 문화는 평소의 스포츠에 대한 관심을 적게 만든다. 물론 국가 간 대항전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전적으로 그것에 의존할 때 스포츠는 발전할 수 없다. 스포츠 자체에 목적을 두지 못하기 때문에 오로지 승부에만 관심을 갖는다. 오히려 또한 좋은 경기를 보여주지 못하고 만다.

시민들의 지나친 국가적 기대감 때문에 경기를 망쳐버리는 일을 우리는 무수하게 보아왔다. 심리학적으로 보았을 때 관람객들은 짜릿한 쾌감을 주는 국가 간 대항전만보는 이상한 스포츠 문화를 합리화하기에 이른다. 또한 강렬한 승부이기 때문에 다른 일반경기에 흥미를 갖지 못하는 현상이 벌어진다.

또한 그러한 태도는 상대 국가에게 한국의 이미지도 부정적으로 남긴다. 스포츠 경기가 가지고 있는 평화와 화해라는 인류정신을 훼손한다. 무엇보다 자기 스스로 좋아서 즐거워서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목적을 염두해두고 임하는 스포츠 경기는 더욱 본래의 의미에서 퇴행하는 것이다.

김연아 선수의 경기 출전이 있을 때마다 반드시 따라붙은 기사의 제목은 아사다 마오 내지 일본의 반응이다. 국가주의에 민족주의 작용하고 있는 단적인 징표가운데 하다. 만약 미국의 선수가 김연아 선수에 견줄 존재라면 이렇게 까지 상대국가에 대해서 민감한 태도를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한국인은 사다 마오에 관해서는 경기 내용만이 아니라 일상의 모든 면에서 부정적인 뉴스가 나올수록 더 좋아하는 모양새다. 이제 김연아의 꼬리표에 일본이나 아사마 마오를 붙일 이유가 없다.

니체는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괴물이 되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만약 문제가 있는 대상과 겨루는 사람은 마침내 자신이 문제 있는 사람이 되고 만다. 정말 김연아 선수가 실력이 출중하다면 애써서 일본선수들이나 일본 언론의 반응을 체크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자칫 감정적 민족주의에 점철된 괴물로 보일 수 있다. 물론 피겨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이끌어내는 것은 중요하지만, 김연아 선수의 연예인화는 실제적으로 비인기 종목 피겨의 저변의 확대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다만, 피겨를 통해 돈을 벌려는 얄팍한 행태만이 증가할 것이다. 무엇보다 무조건 1등만을 요구하는 국가대항전으로서 피겨를 바라보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그것은 국가대항전에서 김연아만 유효할 뿐만 아니라 국내에서 피겨선수 김연아는 주목을 받지 못하고 피겨 자체를 즐기는 스포츠문화와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피겨가 아름답다고 한다. 예술의 경지라고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예술이 될 수 없다. 왜 일까. 아름다움은 수치화된 아름다움이 존재할 수 없고, 그것을 등수로 나누는 것도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