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덕만-천명-선화´ 3색 여성리더십을 주목한다

부드러운힘 Kim hern SiK (Heon Sik) 2009. 10. 2. 07:12

-1인 리더십의 한계를 넘어 대의를 향한 꿈

 

진평왕이 드라마 <선덕여왕>에서는 미실 앞에 매우 무력한 왕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진평왕은 진평왕의 재위기간이 무려 54년(579~632년)이다. 신라역사에서 가장 오랜 재위기간을 자랑하는 왕이 드라마처럼 이렇게 무력했을까 싶다.

 

국력이 쇠약했던 신라 말기에는 10년을 넘기는 왕을 찾기 힘들 정도가 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조선시대 53년 동안 집권한 영조(1724년 8월-1776년 3월)보다 더 길었다. 유대왕 가운데 가장 길다는 유다는 29년간 집권 했다.

 

귀족들에 둘러싸인 왕이 54년을 집권했다는 것은 나름의 리더십이 있어야 가능했을 것이다. 적어도 드라마 <선덕여왕>에서처럼 미실에게 쉽게 당하는 왕이어서는 오래 버틸 수가 없었겠다. 그런 면을 거꾸로 증명하는 것이 진평왕의 세 딸이 아닐까 싶다. 그 딸들은 너무 대단했기 때문에 거꾸로 진평왕의 됨됨이를 생각하게 만든다.

 

첫 번째 딸 덕만은 제왕의 길을 걸었다. 그것도 전후 무후한 최초의 여왕이었다. 진평왕이 54년 동안 버티면서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줄 수 없어서 노력하다가 첫째 딸 덕만에게 물려준 것일까? 그만큼 아버지로 고민이 많은 사람도 없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은 아닐까. 아들이 아닌 딸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을 때, 그만큼 반발도 만만치 않을 것이고, 이에 대해서 아버지이자 선대왕으로 만반의 준비를 해야하지 않겠나 싶은 것이다.

 

거꾸로 진평왕의 첫째 딸 덕만의 고민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드라마와 달리 덕만은 첫 번째 딸로 진평왕의 고민을 누구보다도 잘 인식하고 있었을 것이다. 더구나 고독과 고통의 길이었다. 내우외환이 연이었다. 내부의 심적인 고통과 귀족세력의 발호는 국정운영을 불안하게 했다. 여왕의 남편으로 살 남성도 그렇게 흔치 않았을 법하다. 공주의 남편이 되어 왕을 꿈꾸는 사람은 많았을 것이다. 적어도 그래서 더욱 선덕여왕은 외로웠을 것이다.

 

필사본 화랑세기에는 삼서지제(三壻之制)라는 말을 통해 선덕여왕에게 남편이 세 명 있을 것이라고 언질 했다. 그러나 역사상 선덕여왕의 남편이 누구인지 나타나지 않는다. 어쩌면 남편이 있었던들 그 존재감을 찾을 수 없는 형식적인 남편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더구나 후사가 없었다. 당 태종이 보냈다는 향기 없는 꽃 목단은 이런 선덕여왕을 희롱한 것이라는 속설이 이러한 맥락에서 나온 것인지 모른다. 화려하기는 하지만 향기가 없으니 나비와 벌이 없는 모양이 남자 없는 선덕여왕을 놀린 내용이라는 것이다.

 

드라마 <선덕여왕>에서는 김유신과 연모의 관계였지만 사랑을 이루지 못한 것으로 그리고 있다. 여성 제왕의 길은 외로운 길이며, 그것은 누구나 쉽게 가는 길은 아니었을 것이다. 드라마 <선덕여왕>은 자신에게 고통을 주고 어려움을 주었던 신라를 먹어버리겠다고 한 덕만의 왕위에 대한 꿈을 합리화시켜주지만, 그 자신이 얼마나 왕의 자리가 어려운 것인지, 그것에 대한 고민의 치열함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어떻게 하면 미실을 이길 것인가에 치우쳐 있고, 문노가 물어보는 제왕의 자격에 대해서 관념적인 꿈으로 대신할 뿐이다. 갑자기 처절하게 생존을 위해 살아온 덕만 답지 않은 태도였다. 오히려 김유신의 변절이 설득력을 갖는다. 그 이유는 그 변절이 실제 김유신에 관한 행적과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덕여왕은 그러한 역사적 사실과 견줄 수 있는 사실이 없다.

 

◇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덕만공주 역의 이요원(사진 왼쪽), 천명공주 역의 박예진(중앙), 드라마 ´서동요´에서 선화공주 역을 맡은 이보영(사진 오른쪽). ⓒMBC, SBS

 

두 번째 딸 천명공주는 제왕의 길을 가지 않았다. 드라마 <선덕여왕>에서는 덕만의 언니로 일찍 아들 김춘추를 남기고 세상을 등진다. 하지만 실제로는 천명은 중간에 비명횡사하지 않았으며, 제왕의 길을 갈 아들을 만들었다. 덕만을 여왕의 반열에 오르게 만들었기 보다는 자신의 아들이 왕업을 이을 수 있도록 했다.

 

이는 분명 여성성의 또 다른 모습이기도 하다. 물론 천명이 왕업에 뜻이 있었으나 덕만에게 밀려 자신의 아들에 못다 이룬 꿈을 이루게 했을 수도 있다. 덕만이 직접 정치 일선을 진두하고 삼국통일의 초석을 놓았다면 천명은 그것을 이어받아 삼국통일의 위업을 근간을 이룬 아들을 낳았고, 그를 왕위에 올려 좋았다.

 

자신의 아들이 왕위에 오르지 않기를 바라지 않은 어머니는 없을 것이다. 하여간 천명은 비록 덕만과 같이 직접 왕위를 잇지는 않았지만 더 중요한 일을 했음에 분명하다. 결국 진평왕에서 두 명의 제왕이 나온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아버지의 염원을 실현시켜준 것인지도 모른다.

 

또한 덕만의 뜻과도 통하는 면이 있지 않을까. 덕만은 16년 동안 통치했다. 16년 동안 통치를 하고도 왕권이 불안하자, 진덕여왕(?~654년, 재위 647년~654년)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작업을 하기에 이른다. 덕만 선덕의 공헌은 바로 또 다른 여성에게 왕위를 물려준 것일 것이다. 귀족들의 반대가 빗발치는 가운데 또 다른 여왕을 만들어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한 작업이 있었기 때문에 천명의 아들 제29대 태종무열왕이 탄생할 수 있었다. 왕과 딸, 자매간의 끊임없는 협업의 노력이 없고서야 불가능한 일이다.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공주는 신라의 범위를 넘어서서 활동의 무대를 넓혔다. 백제 무왕의 부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당시 끊임없는 전쟁에 시달려야 했던 신라의 외부 환경을 해결하는 한 방편 이었을지 모른다. 백제의 왕과 결혼하면, 적어도 그 왕의 재위 기간에는 전쟁을 하지 않을 것이며, 이로써 내부적으로 충실함을 기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선화공주는 이단아였는지도 모른다.

 

삼국통일의 요체는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것이다. 나라를 멸망시킨다는 것은 많은 이들의 생명을 빼앗는 것이다. 다른 나라 사람들의 생명을 빼앗을 때 이쪽 나라의 백성들의 목숨도 많이 희생해야 한다. 결국 전쟁을 통해 대업의 완성이기 때문이다.

 

선화는 전쟁을 통한 삼국통일을 바라지 않았는지 모른다. 드라마 <서동요>에서는 선화공주가 그 유명한 서동요를 퍼트린 것으로 되어 있다. 일부러 왕궁에서 쫓겨나기 위해서 말이다. 색다른 아이디어이면서 황당하지만, 선화공주의 능동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는 현실적으로 부합할 수도 있다.

 

일개 마를 캐는 서동이 어찌 신라 진평왕의 공주를 얻기 위한 유언비어를 퍼트릴 수 있을까. 공주가 해야 뒤에 탈도 없을 것이다. 온달과 평강공주의 모티브는 여기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왕국에서 쫓겨난 선화공주가 신라의 공식 기록에서 사라지는 것은 당연한 노릇인지 모른다. 한편, 선화공주의 그 같은 노력은 어디에서 비롯한 것이었을까. 전쟁을 반대하고 백제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음으로써 화평한 삼한을 만들려는 꿈이었는지 모른다.

 

이러한 선화공주의 노력은 다른 덕만, 천명공주에 견주었을 때 평범한 것은 아니다. 결국 원대한 꿈을 지닌 보기 드문 여성리더십을 보여준 사례이다. 하지만 삼국통일에 대한 신라의 강한 집념은 백제의 멸망으로 이어졌고, 고구려도 붕괴시키면서 신라의 구역은 넓어졌지만 전체적인 외연은 좁아졌다.

 

어쨌든 이러한 딸 세 명을 둔 진평왕의 삶은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세 자매의 인생도 평이하지 않게만 보인다. 각자 다양한 자신의 개성을 가진 공주들의 대의를 위한 삶을 상상하는 것은 현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도 한번 음미해볼 만 할 것이다. 자신의 욕망만이 아니라 그런 사적인 욕망을 어떻게 공적인 꿈과 연결시켜갔는 지가 흥미롭기 때문이다. 앞으로 이런 점에 착안해서 상상력을 자극하는 많은 작품들이 창작 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김헌식 콘텐츠 애널리스트, 문화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