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강지용 선수 고통과 이혼 예능의 그로테스크
-솔루션 대안을 모색하는 방향은 어떠해야 할까.
글/김헌식(중원대학교 특임 교수, 정책학/문화정보학)
전 축구 선수 故 강지용 사례는 예견이 현실이 되어버린 비극이었다. 어떻게 보면 사전에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더한다. 이혼 관련 소재나 포맷의 방송 프로그램에 대한 우려가 실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전부터 예능 프로그램에도 다룰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있다는 지적이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할수록 우려는 컸다. 과연 이혼을 예능 소재로 다룰 때 문제점은 없는지 지적하는 목소리와 별도로 어느새 그런 프로그램이 너무 많아져서 문제의식조차 둔감해져 왔다.
오히려 지적하는 이가 낯설게 느껴질 정도였다. 일정한 유행 분위기가 형성되면 그것에서 벗어나는 일은 특히 한국 사회에서 힘들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이미 트렌드가 되어버린 이혼 예능은 하나의 장르가 되는 지경이었다.
이혼을 생각하는 부부가 예능에 출연할 때 두 가지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우선 기본적으로 당사자의 심각한 문제가 웃음의 소재로 사용되곤 한다. 이 과정에서 진지해야 할 상황이 희화화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누군가에게는 그 상황이 상당한 상처가 될 수 있다. 더구나 결말은 희망적이거나 유화적이고 전향적인 방향으로 맺어지기 쉽다. 나름 솔루션을 개입시킨 프로그램의 효능을 어쨌든 입증하는 구성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랫동안 곪아온 갈등이 몇 명 전문가의 상담이나 조치를 담아내는 방송 촬영으로 해결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특히 경제적인 문제 등 분명한 갈등 상황이 엄존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앞선 구성의 흐름을 볼 때, 시청자들은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고 유익하고 재밌게 봤다는 반응을 보이기 쉽다. 갈등은 하나의 극적 장치가 되고 결말은 나름의 해소 방법을 제시하는 듯싶다.
당사자의 상황은 언제는 다른 케이스처럼 흘러가 버리고 다시 ‘흥미로운 갈등(?)’ 상황을 기다리게 한다. 하지만 그렇게 두 달 전 흘러간 강지용 선수는 실제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이제 구체적으로 강지용 사례에 대해서 분석해 보자. 강지용은 이혼 관련 예능 프로그램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대목이 있다.
“자다가 죽는 게 소원이다. 죽고 싶은 마음이 너무 크니까 차에 준비가 돼 있다. 다 있다. 하도 많이 싸우니까 이혼 전문 변호사를 만나 계약서 쓰기 직전까지 갔다. 그런데 아이 때문에 도저히 안 되겠더라. 현재 이혼 의사는 100%다.”
그냥 문장으로 대하면 별스럽지 않을 수 있지만 여기에는 전형적인 발언이 들어 있다. ‘자다가 죽는 게 소원’이라는 말은 현재의 고통이 매우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재의 고통이 너무 커서 스스로 그 고통을 없애기 위해 나서는 것이 자발적 죽음이다.
‘죽고 싶은 마음이 너무 크니까 차에 준비가 돼 있다. 다 있다’라는 말은 언제든지 준비가 되어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차에 준비되어 있는 무엇들을 확인했어야 한다.
그런데 그러한 확인은커녕 이러한 마음을 방송 프로그램은 헤아려 주지 않았다. 아이 때문에 그나마 마지막 결단을 못 하고 열심히 가장으로서 노력하고 있는 그에게 전문가와 진행자의 말은 상처를 깊게 했을 것으로 보였다.
배우자는 이렇게 말했다.
“남편이 금전적 스트레스를 받고 감당이 안 되면 ‘나 살기 싫다’는 식으로 말했다. 내가 만삭일 때 그랬다. 그때 풀고 아이 낳고 100일이 안 됐을 때 남편이 욱해서 35층 창문 밖에 매달렸다. ‘똑바로 봐’라면서 매달리는데 충격이 너무 컸다.”
이러한 문장 진술은 분명 아내의 마음과 심정을 대변하는 편집 구성이다. 진행자 같은 다른 구성원은 물론이고 전문가도 아내에게 마음이 쏠리는 분위기가 형성된다.
이러한 행위에 대해서 변호사는 남편 강지용 선수 면전에서 협박행위라고 했다. 부부 싸움을 할 때마다 자기의 죽음으로 협박했고 이는 협박죄로 유책 사유가 될 수 있음을 분명하게 했다.
이러한 명확한 지적에 대해서 남편 강지용 선수는 매우 당황하는 빛이 역력했다. 자신의 의사 표현이 범죄라는 지적에 충격을 받은 눈빛이었다.
진행자는 여기에 더해 심한 언사를 했다.
“너 이씨. 죽는 걸로 협박을 하냐. 운동을 그렇게 오래 하고 운동을 사랑하는 사람이 멘털이 그렇게 약하냐. 만약 아내가 매달려 있는 걸 보면 어떨 것 같냐. 세상에서 그것보다 무서운 게 어디 있냐.”
아이 아빠가 죽음을 언급할 때마다 배우자가 매우 불편할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아이가 매우 어린 상황이고 출산을 얼마 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그러나 그런 극단적인 발언을 하는 이의 마음도 결코 외면해서는 안 된다. 그러한데 진행자는 갑자기 반말을 한데다가 멘탈이 약한 것을 지적했다. 더구나 이는 운동선수에게는 하지 말아야 할 말이었다.
매달려 있는 것을 보면서 놀랐을 배우자는 생각하고 매달려 있는 당사자는 연기이자, 쇼라고 생각한 전제한 것이다. 이런 전제가 가능했던 것은 예능 프로그램 포맷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죽음을 생각하는 이에게 정신이 약하다는 말은 최악의 워딩이다. 달리 본다면 진지한 교양 솔루션 프로그램이라면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액자식 구성으로 2차 자료만 봤으니 정말 그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는 진행자 개인의 문제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솔루션의 해법은 늘 그렇듯이 주마간산 식이 된다. 그들의 문제는 경제적인 갈등이지 개인의 태도와 다짐이 아니었다. 남편 강지용이 할 수 없는 일이 앞에 있었다. 그의 모든 경제적 활동은 부모님 특히 아버지의 통제 아래에 있었다.
그의 바람이나 호언에도 현실적으로 이룰 수 없기 때문에 화학 공장에서 나가서 힘든 일을 감내해야 했다. 하지만, 그러한 노력은 배우자의 목표치에 부합하지 못했다. 따라서 그의 노력에도 비난에 시달렸다.
부모님은 아파트를 줄이지 않고 돈을 줄 생각도 하지 않았다. 가부장제의 전형적인 가족 문화를 지닌 집안이다. 이런 가족 문화에 대해 남편 강지용의 배우자는 결코 용인할 수 없는 탈 가부장적 문화 가치를 갖고 있었다.
중간에서 이래저래 문제아가 되었다. 어느 쪽에도 기대거나 의지할 수 없었다. 기대했던 든든한 부모님이나 보듬어 줄 누나 같은 배우자는 없었다. 여기가, 현실이 지옥이었다.
마지막 남은 동아줄이라도 될 것 같아 출연한 방송에서는 협박범이 되었고, 멘탈이 약한 엉터리 운동선수가 되었다.
법이 고통받은 이에게 얼마나 거리가 먼지 보여주었다. 거의 모든 문제는 자신에게 모였다.
심지어 진지한 현실의 문제가 예능 코드로 소비되었다. 전 국민에게 그렇게 공유되었다.
그 뒤 현실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만약 방송 출연을 하지 않았다면,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문화적 차이에 따른 의사결정이 얼마나 다를 수 있는지 이해하고 그 폭을 좁히는 문화 테라피였다.
이혼 관련 예능 프로그램이 누구의 관점으로 어떻게 제작 소비되는지 다시금 성찰하지 않는다면 언제든 다시 이런 사례는 반복될 수 있다.